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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953736
성명
한자 方四兼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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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건국포장
1905년 12월 미국(美國) 캘리포니아주에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정치적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를 조직하였고 1916년부터 수차례 국민의무금ㆍ독립의연금 등을 납부했으며, 1923년 미국(美國) 시카고에서 한국독립연구회(韓國獨立硏究會)를 창립하여 간사(幹事)로 활동하였고, 1931년과 1944년 이후로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사설을 게재하여 재미한인(在美韓人)들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고취시킨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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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방사겸은 23세 때인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05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장경이 결성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에 참여하였다. 회원모집을 위한 순찰위원으로 미국 각지를 순행하면서 미주 한인들의 교육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동교육회는 1907년 정치적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조직을 확대 발전시켰다. 이때 방사겸은 새크라멘토에서 회원을 확보하고 지방회를 설립하였으며, 프레즈노와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가 친일외교관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주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립협회와 방사겸이 관여하고 있는 대동보국회가 합동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이때 방사겸은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로조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고'하면서 두 단체의 합동을 적극 찬성하였다. 1909년 2월 공립협회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합동하여 '국민회(國民會)'가 되었고, 1910년 '국민회'는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었다.

방사겸은 그후 미국 시카고 등지에서 1923년 한국독립연구회(韓國獨立硏究會)를 창립하여 간사로 활동하였고, 1931년과 1944년 이후로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여러 차례 사설을 게재하여 재미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방사겸은 별세하기 3년 전에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여 순한글로 적은 평생일기 7권을 남겼다. 평생일기에는 한국인의 미주 이민과 독립운동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新韓民報(1916. 2. 8, 1917. 10. 24, 1919. 4. 19, 5. 29, 1931. 12. 17, 1942. 6. 4)
  • 北美時報(1944. 6. 15, 8. 15, 9. 1, 9. 15, 1945. 6. 15, 7. 1)
  • 독립(1945. 4. 11, 6. 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661~662면
  • 방사겸 평생일기(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6)
  • 容疑鮮人에 관한 건(兵庫縣知事 : 1923. 6. 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6)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방사겸 이명 : 방홍집, 영어명 : 사무엘(Samuel K. Bhang) 평남 평양(平壤) -
본문
1881년 (음)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7형제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방홍집, 영어명은 사무엘(Samuel K. Bhang)이다. 아버지 방정우는 평양에서 어물전(魚物廛), 형은 객주(客主)를 하는 이름난 상인 부호 집안이었다.6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글을 배웠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이 전장터로 변하자, 강동으로 4년간 피난한 뒤 돌아왔다. 14세 때 형의 객주에서 재정 출납 업무를 보았다. 16세에 중화당에서 무쇠점을 하는 김씨 딸과 결혼했지만, 아내와의 불화로 미국행을 결심하였다.1903년 12월 하순 무관학교 출신이자 일어와 영어에 능통한 매형 차종호와 인천에서 코리아 호를 탔다. 1904년 1월 16일 일본 고베(神戶)를 거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통역 겸 농장관리인 안정수(安定洙)로부터 하와이 섬의 길노이 사탕농장에 배치되어 노동을 하였다. 5~6개월이 지나 미 본토로 건너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황국일이 운영하는 한인기숙사에 머물렀다. 이때 안창호(安昌浩)의 소개로 주류도매회사에 취직하였다.장경(張景)을 만나 로스앤젤레스 부근 패서디나(Pasadena)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1905년 12월 9일 패서디나에서 장경·김미리사(金美理士)·김우제(金愚濟)·이병호(李秉瑚)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창립하였다.1906년 6~7월경 장경의 추천으로 대동교육회 순찰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순찰위원의 임무는 한인이 거주하는 지방마다 지방회를 설립하는 것이었으므로,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로스앤젤레스를 순행하며 회원 모집과 함께 지방회 설립에 주력하였다.1907년 1월 총회를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하는 동시에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확대·개편하였다. 대동보국회와 쌍벽을 이뤘던 공립협회(共立協會)로부터 회규(會規) 위반으로 출회(黜會)되었다. 장경과 ‘홍’자를 항렬자로 하여 ‘홍집’으로 이름 짓고 의형제를 맺었다. 9월 다시 대동보국회 중앙회로부터 순찰위원으로 임명되자, 중앙회 경찰직을 사임하고 10월 솔트레이크시티를 거쳐 콜로라도주 덴버로 갔다. 덴버에서 박용만(朴容萬)을 만났고 12월 그가 운영하는 노동주선소 겸 여관에 대동보국회 경찰소(지방회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를 설립하였다.1908년 1월 대동보국회로부터 12명의 시찰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덴버지역 수봉위원(收捧委員)이자 『대동공보』 덴버지사 위원으로도 뽑혔다. 30일 덴버지방경찰소 회원들로부터 총 25달러를 모아 『대동공보』 재정에 보탰다. 3월 순찰위원 임무 수행을 위해 덴버를 떠나 콜로라도주로 순행하였다.1910년 6월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하여 정태은·남정헌·김경·홍승국 등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았다.1911년 10월 안창호가 대동보국회 출신 장인명(張仁明)에게 동지 추천을 의뢰하자, 장인명은 그를 반드시 필요한 인물로 적극 추천하였다. 이후 공부를 계속하고자 시카고로 갔다. 1년간 중국집 요리사로 일하면서 대학 입시 공부를 했으며, 시카고 휘튼대학(Wheaton) 예비과에 들어갔다. 12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의 1912년도 임원선거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어 부회장으로 뽑힌 장인명 등과 지방회를 이끌었다.1912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신문인 『대양보(大洋報)』 재정 후원을 위해 지방회원들과 의연금을 모았다. 이즈음 장경의 권유로 홍삼장사를 위해 쿠바와 자메이카로 갔다. 여러 달 동안 장사하여 2천 달러를 벌었다.1913년 여름부터 일리노이주 에핑햄(Effingham)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 뒤 졸업하였다. 1914년 2월 미술학교에 다닐 당시, 링컨의 명언을 디자인하여 하와이의 태평양잡지사로 보냈다. 그의 디자인이 『태평양잡지』 2월호에 게재되었다.1916년 3월 이살로메와 결혼한 뒤 워싱턴주 포틀랜드와 시애틀 중간의 센티넬라로 이주하였다. 슬하에 5남(창만/다니엘, 창준/헨리, 창영, 창복/새무엘, 창국/데이비드) 5녀(채숙/오드리, 정숙/올리브, 인숙/애나, 봉숙/에바, 명숙/에스터)를 두었다.1917년 5월 센티넬라에서 중국 음식인 찹수이(Chop Suey) 가게를 차려 성공을 거두었다. 8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기관지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사옥 마련 때문에 빌린 은행채를 갚고자 보상 발기자를 모집했는데, 제2회 발기자로 참여하였다. 8월 16일에는 『신한민보』에 「빚 가운데서 건집시다」라는 글을 게재하여 신한민보 가옥은행채 보상운동 발기인이 될 것을 촉구하였다.1919년 대동보국회 동지였던 김홍균이 살고 있는 스탁톤(Stockton)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흉작과 쌀값 폭락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 5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인구등록 규정을 공고하고 이를 위해 인구등록 총부 위원과 파출소 위원을 임명할 때, 김종학과 함께 스탁톤파출소 위원으로 스탁톤 지방 한인 등록과 독립의연금·21례금·애국금 등을 모집하였다.1921년 10월 캘리포니아주 콜링가(Coalinga)로 이주하여 정수(淨水) 일을 하였다.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의 재정 곤란 소식을 듣고 적지 않은 후원금과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1923년 6월 시카고 한인들과 한국독립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로 선임되어 회장 황용성(黃龍成), 부회장 김경(金慶)과 함께 활동하였다. 건강 악화로 시카고로 가서 입원 치료 등으로 1년 여를 쉬면서 영문으로 된 『찹수이 요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1925년 3월 19일부터 4월 2일까지 『신한민보』에 「재미한인의 경제곤란」이란 글을 3회 연재하였다.1930년 6월 미시간주 콜로마(Coloma)에서 사업을 하던 중 장인환(張仁煥) 의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애도와 함께 장례비를 기부하였다. 9월 11일과 18일 『신한민보』에 「재미한인의 통일이 되고 안되는 것은 재미한인의 애국에 있다」라는 글을 기고하였다.1931년 7월 30일부터 8월 13일까지 3차에 걸쳐 『신한민보』에 「한인통일의 이해관계, 하와이 사회풍파는 혁명으로 볼 수 있다」는 글을 실었다. 12월 17일에 「만주 중일 충돌에 인하여 일어나는 재미한인 연합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이란 글을 게재하였다.1934년 11월 이승만이 유럽을 방문하러 가는 길에 인디애나폴리스를 방문하자, 자신의 가게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다.1944년 6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6회에 걸쳐 동지회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에 「독립, 군사, 외교, 선전 4대 운동에 민중 합동이 필요」란 글을 실어 4대 운동을 위해 모두 합동할 것과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활동에 힘을 실어줄 것을 강조하였다.1945년 4월 11일부터 6월 6일까지 3회에 걸쳐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에 「독립의 가치와 그 세력」이란 글을 게재하여 국가 독립 주권에 대한 가치와 세력을 언급한 뒤 자유 생활을 보장할 국가 독립권 회복을 위해 희생할 것을 피력하였다. 6월 15일부터 9월 1일까지 『북미시보』에 3회에 걸쳐 「평화회에 대한 우리의 할 일」이라는 글을 실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앞서 미 본토와 하와이 한인사회의 합동이 선행될 필요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8월 2일부터 8월 30일까지 『신한민보』에 「대한 독립 이후에는 미포(美布, 미 본토와 하와이) 한인의 할 일이 무엇인가」를 4차례에 걸쳐 연재하였다.1916년부터 1920년까지 국민의무금 3차 15달러,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운동 후원을 위해 대표의연·독립의연·21례금·애국금·공채표 등 130달러를 의연하였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금 35달러, 『신한민보』·『북미시보』 대금 38달러를 비롯하여 인구세, 중국항일전쟁동정금, 본국의 수재동정금과 한재의연금 등 독립운동 자금을 재정 후원하였다.1945년 12월 1일부터 1946년 2월 1일까지 5차에 걸쳐 「우리나라를 국제 관할 밑에 둔다고」라는 글을 통해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1946년 8월 20일 『북미시보』에 「조선의 현상과 장래」란 글을 기고하여 남북한이 연합정부를 조직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다. 1945년 9월부터 1946년까지 정부 후원금 20달러, 독립금 30달러, 동지회 인구세 10달러, 동지회 연례금 10달러, 『북미시보』 대금 5달러, 『북미시보』 기계 특연금 50달러를 재정 후원하였다.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파견된 한국대표단 부단장 장기영이 대표단 비용 부족으로 미화 2천 달러를 요청하자, 어려운 살림에도 흔쾌히 송금하였다. 회의 직후 한국대표단이 워싱턴으로 와서 환국을 권유하였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6월 15일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한국에서 장관이 된 장기영과 대통령 이승만 등을 만난 뒤 1949년 11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방문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하고 예전과 달라졌다고 통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면서 말년을 보냈다. 1952년부터 3년 동안 자신의 생애와 미주 반세기를 소상하게 노트에 정리한 뒤 『평생일기』란 이름으로 7권을 남겼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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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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