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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3716
성명
한자 南宮炎
이명 南宮廉, 南宮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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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애족장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동년(同年) 미국(美國) 뉴욕에서 이승만(李承晩),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고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1924년에는 동회(同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재미한인(在美韓人)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고, 1928년에는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를,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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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남궁염은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李承晩),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1924년에는 이 모임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928년에는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7)
  • 假政府 歐美委員部 通信에 관한건(조선총독부 경무국 : 1924. 5.8)
  • 延禧專門學校 同志會 興業俱樂部 關係報告(國史編纂委員會)
  •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ⅹⅹⅱ(국가보훈처) 美洲篇(4) 12~1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7집 1284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13권 60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궁염 남궁렴(南宮廉), 남궁염(南宮焱), 영어명 : 데이비드(David Y. Namkoong) 서울 -
본문
1888년 3월 17일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서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과 어머니 양혜덕(梁惠德) 사이에서 3남매 중 독자로 태어났다. 영어명은 데이비드(David Y. Namkoong)이다. 1924년 8월 20일 이승만의 소개로 만난 우복자(영어명 : 조앤)와 뉴욕한인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우복자는 이승만(李承晩)과 YMCA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우흥태의 딸이다. 서울 보성여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으로 유학 와서 조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다녔고, 후에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우복자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서울 재동(齋洞)에 있는 관립 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이어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인 협성회(協成會)에서 활동하였다. 1902년 5월 남궁억이 러시아와 일본 간의 의정서(議定書) 전문을 『황성신문』에 게재하고, 의정서의 부당함과 일제의 간계를 폭로한 일로 총무 나수연(羅壽淵)과 함께 경무청에 구속되었다. 이때 경무청 감방 앞에서 거적을 깔고 아버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13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였다고 한다. 1905년 5월 황성기독청년회(皇城基督靑年會, YMCA의 전신)에서 심상초학(尋常初學) 영어과 교사를 설립하자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1906년 7월에는 동현(銅峴) 수하동(水下洞) 엡웻야학교(懿法夜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1906년 아버지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朴泳孝)의 도움으로 미국 여권을 얻어 미국으로 떠났다. 1906년 11월 초 최정익(崔正益)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같은 달 하순 최정익과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 해 12월 6일 친분이 두터웠던 신흥우(申興雨)가 자신이 대학을 다니고 있던 로스앤젤레스로 와 줄 것을 요청하자, 그곳으로 이주한 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1907년 3월 28일에는 국내에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 취지에 찬동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박형모·신봉희·염달욱과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10월 당시 로스앤젤레스 소재 대학교 예비과 2반에 재학하고 있었다. 1911년 4월에는 『웅변법(雄辯法)』을 역술하여 출판하였고, 8월에는 버지니아주로 이주하였다. 버지니아주 랜돌프 메이콘 대학(Randolph-Macon College)을 다니면서 여름 방학 때는 학비 마련을 위해 시골로 책을 팔러 다녔다. 1918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교수의 추천으로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시큐리티 앤드 트러스트 은행(American Security & Trust)에 취직하였다.1920년 8월 뉴욕에서 대한인유학생회 뉴욕지부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유학생회 뉴욕지부 설립 후에는 천세헌(千世憲)·이원준·임초(林超)·이봉수와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9월에는 가칭 북미대한인유학생회 발기회장 김현구(金鉉九)로부터 학생회 조직에 관한 일반 사무 전권을 위임받아 이용직(李容稷)과 함께 유학생회 임시총회 총무가 되어 정식 유학생회 발족에 힘을 기울였다. 1921년 3월에는 이용직과 함께 북미한인학생회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현상 유지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1921년경 이승만(李承晩)을 만난 것을 계기로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구미위원부에서 일을 보았다. 1921년 4월 구미위원부 26차 통상회에 방청(傍聽)으로 참석하였다. 그 해 12월 31일 뉴욕시 구미위원부 사무실에서 이승만을 비롯하여 이용직·정한경(鄭翰景)·김영기(金永琦)·신형호(申衡浩)·허정(許政) 등과 함께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2주일 후인 1922년 1월 15일 뉴욕 이봉수(李鳳秀)의 집에서 비밀결사 대광단(大光團)을 조직하였다. 1922년 5월 구미위원부 재무(掌財)로 근무하면서 김영기·이용직·신형호 등과 함께 구미위원부의 대내외 연락, 재정 수납과 지출, 각종 서류 정리와 보전, 통신문 발행 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1923년 4월에는 북미대한인학생회 서기 겸 재무로 활동하였다. 그 해 9월 이승만에 의해 뉴욕에 파견되어 대광단(大光團)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뉴욕지부로 개편하였다. 이때 뉴욕지부 회장으로 선임되어 회계 최용진(崔龍鎭), 서기 안택주(安宅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24년 10월 그동안 부진했던 구미위원부를 새롭게 개편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1월에는 구미위원부 각지 지방위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인구세와 국민담보금 수합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 해 3월 임시정부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키고 4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에 구미위원부는 이승만 지지 세력인 하와이 대한인교민단과 동지회의 자금 지원으로 워싱턴사무소를 유지하였으나, 결국 재정 부족으로 1928년 폐지되었다.1926년에는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이사하면서 생계를 위해 노동주선소를 열었으나 건강 문제로 곧 문을 닫았다. 이후 뉴욕에서 20여 년간 상업으로 생활을 꾸렸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경(金慶)·김도연(金度演)·허정·오천석(吳天錫)·윤치영(尹致暎)·방화중(邦化重)·장덕수(張德秀)·최용진 등과 함께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기인으로 창간 취지서를 발표하고, 그 해 3월 『삼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이후 『삼일신보』를 각지에 발송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으나, 1930년 6월 폐간되었다.1930년 2월 국민회 총회에서 국내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재미한인중앙선전부를 조직하고 뉴욕에 본부를 정하자, 오천석과 함께 서기로 선임되어 위원장 허정을 보좌하였다. 1932년 1월 31일 뉴욕한인교회 정기총회에서 안정수(安鼎洙)·장석영·이철원 등과 함께 신임 이사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2월 뉴욕에서 미주 한인단체를 망라한 단일당 결성운동을 위한 공동대회가 개최되자, 임초·황창하·김도연 등과 함께 공동회 규칙 제정위원으로 선임되어 초안을 마련하였다. 8월 29일에는 동지회 뉴욕지부에서 국치기념식을 개최하자, 기념식 사회를 보았다.1933년 6월 하순 김규식(金奎植)이 뉴욕을 방문하여 통일전선과 함께 한·중 연대를 위한 강연을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뉴욕지부와 중한민중동맹(中韓民衆同盟) 뉴욕지부가 설립되었다. 6월 24일 뉴욕 화교공립소학교에서 중한민중동맹 뉴욕지부 설치를 위한 담화회가 중국인 오건초의 사회로 열리자, 중국 측 16명, 한국 측은 3인이 참석하여 중한민중동맹 뉴욕지부 설립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때 뉴욕지부 위원으로 중국인 정대표 8인, 대표 후보 8인, 한국 측 정대표 3인, 대표 후보 3인을 선정할 때, 조극(趙極)·장진산과 함께 한국 측 대표 후보로 선정되었다.1939년 4월 아버지 남궁억의 부음을 듣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국하였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940년 3월에는 뉴욕에서 한인 단체 연합으로 치러진 삼일절 기념식에서 사회를 맡아 보았다. 1941년 동지회 담보금을 아내와 함께 각 2달러씩 납부하였다. 1941년 1월 대한인동지회 뉴욕지부 임원 개선 시 회장으로 선임되어 총무 이진일(李震日) 등과 함께 동지회 사무를 집행하였다. 그 해 2월에는 대한인동지회 뉴욕지부와 국민회 뉴욕지방회의 상호 연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2월 뉴욕 한인 10인과 함께 뉴욕한인연합회를 조직하고, 정기원·이진일·김경(金慶)·추일엽·박이근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942년 1월 뉴욕한인연합회 위원회에서 연합회 명칭을 ‘뉴욕한인광복후원회’로 개칭하고 임원을 선출하자,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월 7일 회의에서 명칭을 다시 뉴욕한인연합회로 복구하였다. 그 해 2월 하순 워싱턴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가 개최되자,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대표, 한미협회 대표, 그리고 한국·중국·러시아 한인 대표들과 함께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에 동의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월에는 시카고에서 북미지방 동지대표회가 개최되자, 뉴욕 대표로 참석하여 조직 명칭을 북미동지회 총지부로 개칭하였고, 조직을 의사부와 행정부로 개편하였다. 또한 행정부 임원 선정 시 총지부장으로 선임되어 서기 김세선(金世璇), 회계 최용진, 편집부원 안어진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2년 1월 독립금 10달러, 5월 5달러, 6월 5달러를 후원하였다. 그 해 7월 뉴욕한인연합회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자 사회를 맡아 보았다.1944년 4월과 6월 부인과 함께 독립금 각 5달러씩을 후원하였다. 그 해 6월 이승만이 주미외교부 개조문제를 계기로 자신의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일명 한국외교위원부) 협찬회(協贊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협찬회는 산하 5개 분과 위원부를 설치하였는데, 이중 김세선·최용진·유일한(柳一韓)·신상근(申相根) 등과 경제분과위원부에 배속되었다.1945년 8월 해방이 된 이후에도 뉴욕에서 활동하였다. 그 해 12월 동지회 뉴욕지부의 1946년도 임원 선거에서 서기로 선출되어 재무로 선임된 아내 조앤과 함께 일하였다. 1946년 4월 동지회 북미총회 뉴욕 지방 수전위원(收錢委員)으로 선임되었고, 6월에는 동지회 기관지인 『북미시보(北美時報)』 식자기 특연금으로 아내와 함께 각 10달러씩 후원하였다. 1949년 4월 뉴욕총영사관이 설립되자, 그 해 5월 초대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뉴욕총영사 겸 외자구매처(外資購買處) 이사관, 1955년 총영사(2급) 겸 외자청(外資廳) 이사관이 되었다. 1959년 3월 본부와의 연락 관계로 일시 귀국했을 때, 건강상 문제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만류로 1960년 4·19가 일어나 사직할 때까지 12년간 최장수 총영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1년간 롱아일랜드로 가서 정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낙 쇠약해진 탓에 1961년 11월 29일 뉴욕시 외곽 록크빌 센터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화장되었고, 1974년 강원도 홍천 선영에 뒤늦게 묻혔다.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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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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