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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무산(茂山)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자서전에 따르면 본명은 최주동(崔柱東)이다. 유년기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우수리스크(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ий, 현 우수리스크) 근처의 작은 한인 마을로 이주한 후, 다시 올긴스키 구역의 얼두거우(二道溝, Элтыгоу) 마을로 이주하였다.
12세가 되었던 1907년경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지역에 있던 친척에게 보져 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중학 졸업 후 베이징(北京)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 한국의 접경지대인 러시아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 부근)와 중국 훈춘(琿春) 일대에서 교육계몽운동에 힘썼다. 이때 황병길(黃炳吉) 등이 설립한 훈춘의 강서당(講書堂)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고향인 올긴스키 구역 얼두거우로 돌아와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생하자, 1919년 2월 러시아공산당(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하였다. 그해 4월 올가군 프롤로브카(Фроловка) 마을에서 조직된 임시혁명빨치산참모부가 소작을 통한 빈농착취를 금지케 하자는 결정을 채택하자, 올가군의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농민들에게 선전하는 데 힘썼다.
1919년 5월 러시아 하마탕(蛤嗼塘, 현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부근 얼두거우 마을에서 허재명·김준 등과 함께 한인 빨치산부대를 창설하였다. 창설 후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중 백위파군과 러시아 원동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북간도 훈춘지역으로 일시 이동하였다. 이때 부대가 ‘민족혁명파’와 ‘국제혁명파’로 분열되자, 1920년 1월 150여 명의 ‘국제혁명파’ 대원들을 이끌고 러시아 하마탕 부근 얼두거우로 이동하여 고려인특립대대를 재조직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러시아혁명세력 간의 협약과 러시아인 동지들의 권고에 따라 고려인특립대대를 무장해제하였다.
1920년 4월 참변이 일어나자, 동지 20여 명과 함께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로 이동하였다. 이때 하바롭스크 크라스나야 레츠카(Красная Речка)에 위치한 러시아 붉은의병대 본영 사령관인 불라코프(Буллаков) 휘하에서 잠시 일한 후, 자유시(Свободный)로 이동하였다.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파 계열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고려인특립대대)에 합류하여 중대장과 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5월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하기 위한 준비기관으로 조직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정식 승인을 받아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로 명칭이 변경되었을 때,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소속 사관학교 제1연대 군정위원에 임명되었다.
1922년 6월 말 연해주 아누치노(Анучино)로 이동하고, 그해 7월 21일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비밀간부 산하에 고려부가 조직되자 기관지인 붉은긔 주필로 활동했다. 그해 8월 31일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결정으로 ‘한족공산당연해주연합총회(韓族共産黨沿海洲聯合總會, 일명 ‘솔밭관 한족공산당’)’가 ‘러시아공산당 포시예트-훈춘구역 간부’로 개칭되었을 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이때 러시아의병대(빨치산) 연해도 군사위원회와 고려의병대(독립단) 대표들의 협의회를 개최하여 연합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고려의병대들의 통일을 결정하고 러시아 한인 무장부대들의 힘을 모으는 데 힘썼다. 그 결과 1922년 9월 15일 연해주 한인 빨치산부대들의 통합조직인 연해주 고려인의병대를 지도할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되자, 군정위원장에 임명되어 그해 12월까지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니콜리스크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단장(團長)을 역임하며, 한국과 일본 내에 단원들을 잠입시켜 각지의 유력자나 유학생들과의 네트워크를 통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내전이 종결된 1923년 이후 연해주 남부 국경지대인 연추-훈춘 일대의 러시아공산당 지부 책임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선전 활동에 힘썼다. 1923년 4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고려부 연추(煙秋) 특립부장(特立部長)으로 해별사(海別社) 원도치(遠島峙)에서 한인을 모집하였고, 같은 해 5월경 고려공산당 파견원 한천일(韓天日),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공산당 고등기관 ‘켓부’의 파견원 최고상(崔高上) 등과 함께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파견되어 연추와 훈춘을 거쳐 국내로 잠입하려 하였다. 7월 4일 고려공산당 극동선전장(極東宣傳長) 정학룡(鄭學龍) 등과 회합하여 간도, 훈춘 지방에서의 사회주의 선전, 기관 연락 배치, 계획 등의 개선 확충책에 대해 협의하였다.
1925년 7월 노동당원 이정수(李挺洙)의 국내 잠입에 도움을 주었고 1926년 고려공산당 고려부 연해도 당 위원 남오지부장(南烏支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집단화 과정을 지도하기 위해 한인 농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수청(水淸. Сучан) 신영거우(新英溝, Николаевка)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수청지역 파견 경험을 바탕으로 1930년 3월부터 4월까지 선봉에 4회에 걸쳐 「절름발이 수청구역」, 3회에 걸쳐 「당정책을 악화하는 경향을 따리자」를 게재하며 러시아 한인 농촌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1928년 모스크바(Москва)로 건너가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였다. 이때 모스크바 작가동맹회원으로 국제혁명작가 동양비서부 비서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선봉 주필에 취임했지만, 1933년 주필직을 그만두었다. 1934년 원동변강 작가동맹의 검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5년 2월부터 12월까지 다시 선봉 책임주필직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선봉 책임주필을 맡고 있던 1936년 2월 9일 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된 후, 6개월 후인 8월 1일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3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Қызылорда)로 이주되어 ‘레닌명칭 중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던 중, 1939년 12월 14일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다.
1940년 10월 26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에서 이른바 러시아연방 형법 58조 10항을 명목으로 감금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누이동생이 있던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꼴호즈’로 이주하여 지내던 중, 1947년 11월 16일 소련 당국에 의해 다시 붙잡혔다. 1949년 11월 2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에 의해서 ‘반소비에트 간첩조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유형을 받았다.
1950년 2월 31일 크라스노야르스크주 볼셰우디스키 라이온에 도착해 유형 생활에 들어간 후, 4년 6개월 만인 1954년 9월 2일 석방되었다. 이후 명예회복과 복권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복권 받지 못한 채 1960년 5월 25일 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Аккурган)에서 암 투병 중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소련이 무너진 후인 1998년 9월 18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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