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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1372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申用傑
이명 신용길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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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6 훈격 애족장
1915년경 훈춘(琿瑃)에서 황병길(黃丙吉)훈춘의용대(琿瑃義勇隊)를 조직했고 1917년 10월혁명 이후 김경천의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후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참여하여 1921년 11월 11일 나자렌꼬 지휘하 올가(港) 빨치산 연합부대의 일원으로서 올가(港)에서 백위군 몰차노프 군대와 전투 도중 26명의 빨치산 대원들과 함께 전사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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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항일전쟁을 치르다 희생되었다.

신용걸은 평남 안주의 빈농집안 출신으로 1915년경 혼춘(琿瑃)에서 황병길(黃丙吉)과 혼춘의용대(琿瑃義勇隊)를 조직하였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김경천의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신용걸은 청산리 전투 이후 러시아로 이동해 온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와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참여하였다. 1921년 11월 11일 나자렌꼬 지휘 하에 올가항(港) 빨치산 연합부대의 일원으로서 백위군 몰차노프 군대와 전투 도중 26명의 빨치산 대원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십월혁명십주년 원동기념준비위원회)
  •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255면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5)
  • 일제하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역사비평사, 1990) 185~18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용걸 - 평남 안주(安州) 올가항 전투
본문
1896년 12월 5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원동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자료의 한계로 이주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14~15년 무렵 하바롭스크에 거주하며 한인학교의 교사로 일하였다.1915년 중국 훈춘(琿春)에서 조직된 훈춘의용대(琿春義勇隊)에 찬무국(贊務局) 비서과원으로 참여하였다. 훈춘의용대는 대한광복군정부 정도령 이동휘(李東輝)가 1915년 5월 8일 황병길(黃炳吉)을 훈춘의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조직되었다. 훈춘의용대에는 사령관 황병길을 비롯하여 사령부 부관 이흥삼(李興三), 대대장 김광빈(金光斌), 중대장 오병묵(吳丙黙), 소대장 진창한(陳昌漢), 윤동철(尹東喆) 등 약 50여 명의 훈춘과 연해주의 항일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수찬(水淸)에서 김경천(金擎天)이 지휘하는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던 김경천은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내다 연해주 한인 빨치산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수찬(현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수찬에서 창해소년단을 조직하여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을 비롯한 제국주의 간섭군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 그리고 중국 마적인 훙후즈(紅鬍賊)에 맞서 싸웠다. 1920년 말과 1921년 초에 걸쳐 연해주의 한인 빨치산부대들이 대규모 독립군단을 결성하기 위해 아무르주의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자유시)로 이동하고 난 후, 연해주에 남은 한인 빨치산부대들은 트레치 푸진Третий Фудин에 모여 수찬한인빨치산부대를 만들어 통합되었다. 통합부대를 이끌 지휘관으로 김경천이 초빙되었다. 병력은 700~800명 정도였다.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도 설립되었다. 이때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장교가 되었다.1921년 가을 일본군이 올가항에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중대장으로 3개 소대를 이끌고 올가항으로 파견되었다. 올가항에 도착한 신용걸 중대는 라자렌코가 지휘하는 올가항수비대대에 편입되었다. 1921년 11월 14일 밤 일본군함이 올가항 해안에 도착하여 다음날 새벽녘에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잠시 후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올가항수비대의 맹렬한 대응 사격에 물러섰다. 오전 10시경 백군 군함들의 함포 사격과 함께 일본군과 백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상호간 총알이 빗발치는 격전이 벌어졌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의 전투는 매우 힘겨웠다. 탄환이 떨어지자 기마육박전에 나섰다. 중대장 신용걸이 긴 칼을 휘두르며 선두에서 질풍같이 돌진하자 부하들은 “만세!”를 외치며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결국 첫 번째 전투에서 신용걸 중대와 올가항수비대는 일본군과 백군의 공격을 물리쳤다.다음날인 11월 16일 신용걸 중대와 적군 부대는 올가에 상륙한 일본군과 백군의 진지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공격의 중앙을 한인중대가 담당하였다. 약 2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이후에 올가는 빨치산에게 점령되었고, 백군과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대원 21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과 백군의 피해는 사망 90여 명에 부상자는 120여 명이었다. 이때 포위 공격을 당하는 도중 포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치머우빨치산 대원이던 이영도는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흰파(백위파) 장졸들은 조선부대들이 전사한 전투장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흰파(백위파) 장교들이 신용걸 동지 있는 곳에 당도하여 그를 수색할 때에 그는 잃었던 정신이 회복되었다. 중상당한 신용걸 장군은 10방 짜리 마우제리를 가지고서 수색하던 흰파(백위파)들을 총살하고 나중에 남은 탄환으로 자총하고 죽었다. 그가 전사한 곁집에서 살던 러시아 여자는 전쟁이 그치고 좀 조용하니 창문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다가 신용걸 장군이 흰파(백위파)들을 죽이고 자총하는 것을 보다가 장판에 쓰러져서 목을 놓고 울었다고 한다.”전투를 마친 한인부대는 전사한 전우들을 올가시 공원 안에 묻고 올가를 떠났다. 올가시 공원 안에는 올가전투에서 희생된 빨치산 추모탑이 세워져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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