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0471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李多勿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2 훈격 애족장
1920년 봄 노령 옴스크에서 이성(李聖), 이인섭(李仁燮) 등과 『새벽북(효고(曉鼓))』을 발간하고, 동년 옴스크에서 김표돌 등과 한인사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21년 경 이동휘 계(李東輝系)독립군단(獨立軍團)에 참여하여 자유시사변을 겪었고, 1922년 초 이르크츠크에서 대일 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하기 위해 (金)표도르 등 13인과 극동진출을 도모하다가 러시아적군(赤軍)에 체포되어 러시아적군 제5군단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이후 이르크츠크의 감옥에서 옥고(獄苦)를 겪다가 순국(殉國)사실(事實)확인(確認)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노령(露領) 크라스키노[煙秋] 사람이다.

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초 노령 옴스크에서 안경억(安京億)·김표도르와 더불어 한인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노보 니콜리스크에 간이군사훈련소를 설치하였으며, 동년 봄 이성(李聖)·이인섭(李仁燮)·안경억(安京億) 등과 더불어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 기관지인 '새벽북(曉鼓)'을 발행하다가 동년 여름 이르쿠츠크로 이주하여 제호(題號)를 '경세종(警世鍾)'으로 변경·발간하였다.

그후 1921년 6월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 혹은 알렉세예프스크)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부대의 군통수권문제, 즉 상해파(上海派) 이동휘(李東輝)가 후원한 한인니항군대(韓人尼港軍隊; 후일 사할린의용대로 개칭, 일명 사할린부대)와 이르쿠츠크파의 문창범(文昌範)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지지한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일명 自由大隊) 간의 군 통수권 장악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동년 6월 이르쿠츠크 계열의 고려군정의회(高麗軍政議會)가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하는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났다. 자유시참변시 이동휘 계열의 독립군단(獨立軍團)에 참여한 그는 러시아 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었으며, 이송후 한인독립군부대와 함께 러시아 볼세비키의 제5군단 관할 여단으로 배속되었다.

러시아 제5군단 산하에 한인 여단이 배속되자, 한인여단을 해산시켜 이동휘를 지지하는 연해주 방면의 군사위원회에 파견할 것을 계획한 그는 1922년 이동휘 계열의 채영(蔡英), 전 자유대대 장교였던 제3연대장 황하일(黃河一), 2연대 정치위원장 송세주(宋世柱), 장교 김표도르 등 14명과 함께 군대해산문서를 작성하여 1차로 30여 명의 군인을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파송하였고, 재차 다수의 군인을 인솔하고 탈출하려다 러시아적군(赤軍)에 발각·체포되어 제5군단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후 이르쿠츠크의 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3년 경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日報(1923·6·24)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청계연구소) 1권 221·244·341·342·34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다물 - 외국 러시아 자유시참변
본문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얀치헤[연추((烟秋), 현 크라스키노] 출신이다.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 32세로 기록되어 있어, 1892년생으로 추정된다. 부인은 박일리이다.러시아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옴스크 한인공산당(韓人共産黨)에 참여하였다. 1920년 초 안경억(安京億)과 김표도르 이바노비치의 후원을 받아 한인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사관학교는 옴스크 국민회(國民會)와 청년회가 연합하여 세운 학교로, 사관학생은 80명이었다. 같은 해 봄 옴스크에서 이성(李成)·이인섭(李仁燮)·안경억과 공산주의 주간신문 『새벽북(曉鼓)』을 발간하고,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해 여름 신문사를 이르쿠츠크로 이전한 후 『경세종(擎世鍾)』으로 변경하였다.1920년 7월 7일부터 15일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 제1차 대표원회의를 통해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가 성립되면서, 이성·채동순(蔡東順)·한봉익(韓鳳翼)·박승만(朴承晩)과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으며, 8월 26일 제9차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해임되었다.치타에서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산하 한인부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한인부 기관지 『노농신보(勞農新報)』 기자 겸 번역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인부에서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들을 통합하여 대부대를 창설하고자,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大會) 소집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1월 16일 치타에서 한인부 정기회의가 개최되었고, 전한의병대회 소집위원회가 구성되자, 박애(朴愛)·장도정(張道政)과 위원에 임명되었고, 박윤해(朴允海)와 한인부 통역관으로도 선임되었다. 1921년 3월 중순 크라스노야로보에서 전한의병대회가 개최되어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와 대한의용군총사령부가 조직되었다.한편, 1920년 말부터 1921년 초까지 간도와 러시아의 독립군 부대들이 러시아 자유시[(自由市), 현 스보보드니]에 집결하였다. 전한군사위원회에서는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고자 하였으나, 고려혁명군정회의(高麗革命軍政會議)와 대립 속에서 통합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자유시참변 당시 러시아 적군(赤軍)에게 붙잡혀 이르쿠츠크로 이송된 후, 러시아 제5군단 산하 한인여단에 배속되었다.1921년 말부터 이동휘(李東輝)가 이르쿠츠크 주둔 고려혁명군을 극동지역으로 이동시키고자 할 때, 채영(蔡永)·황하일(黃河一)·송세주(宋世柱)·김표도르 이바노비치 등과 1차로 군인 30명을 비밀리에 극동지역으로 파송하였고, 이어서 다수의 군인을 인솔 이동시키고자 하였다.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인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고려공산당 연합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이동휘와 홍도(洪濤)가 대회에 참석하였고, 이때 김아파나시·장도정·장기영(張基永)·도용호(都容浩) 등과 이르쿠츠크에서 중앙위원의 활동을 지원하였다.1922년 3월 18일 고려혁명군 중 일부를 이르쿠츠크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시켰다는 이유로 붙잡혀 조사받고, 같은 해 4월 5일 동지 15명과 러시아 제5군단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혐의는 “불법적으로 한인들을 극동으로 이동시켜 그곳에 민족주의 조류의 빨치산부대를 창설하여 적군 대중들 속에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퍼뜨려 적군을 붕괴시키고, 조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반하는 개인적인 권력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 창립에 참여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재판 후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3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이다물(관리번호:95047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