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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음)6월 20일 함북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로, 이명은 최반수(崔班首), 최비지개이다. 1869년 기사년 대흉년 시기에 빈농인 부모를 따라 연해주 지신허(地新墟)로 이주하였으나, 아버지가 곧 사망하여 집안이 더욱 기울어지게 되었다. 1876년 지신허를 떠나 추풍(秋風)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마적들의 창궐로 정착할 수 없었다. 1880년 두만강 인근 녹둔도 근처 향산동(香山洞)으로 이주하여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1883년 결혼 후 새로운 삶을 개척하면서 공부에도 정진하여 연추지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 되었다. 1897년 9월 7일자 『독립신문』의 「러시아 해삼위 근처 연추 각 지방이 이십 이사인대」라는 기사에서, 유진률(兪鎭律)과 함께, “행사가 정직하고 학문이 정밀하여 대접을 높이 받는” 인물로 평가받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특히 서양 각국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독립신문』 1899년 4월 28일자에 「유리한 말」을 기고해 조선이 서양과 같은 문명국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문명개화를 강조하였다. 아울러 남녀 구분 없이 어릴 때부터 문명개화한 교육을 시킬 것을 주창하였다. 향산동에서 주민들의 추대로 거류지 민장에 피선되어 여러 해 동안 지도자인 노야(老爺)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1895년부터 연추지역에서 군대 용달업에 3~4년 동안 종사하였다. 1900년 의화단사건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군대용달을 하던 중,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공급을 위하여 사업을 크게 확대하였고, 이를 계기로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전쟁 특수를 통하여 자산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에는 생우(生牛) 수요가 크게 증가하여, 북한지역의 생우 납품을 통하여 이윤을 남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교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20일자 잡보 「박문교육(博聞敎育)」에 보면, 성진 신평에서 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그치지 않고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도 이루어졌다. 『황성신문』 1907년 5월 29일 「해삼위 특신 계동학교 취지서(海參威特信啓東學校趣旨書)」에, 발기인 겸 서기 등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연해주 이포에 명동학교가 만들어지자, 총감으로서 학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해조신문』 1908년 3월 24일자 「명동교익진(明東校益進)」에, 『해조신문』 1908년 4월 18일자 「명동학교」에, 명동학교 교직원들이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한편 연추 향림동 선흥의숙 설립에도 최재형(崔在亨), 김학만(金學萬) 등과 함께 기여하였다.
1908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사용했던 1,400여톤급 복현환(伏見丸)을 구입하여 준창호(俊昌號)라 명명하고, 화물선 및 여객선으로 이용하면서 수입은 더욱 급증하였다. 한번 출항할 때 승선인원은 200여명이었으며, 거래한 소는 150마리였다. 또한 성진항 각국 거류지에 화물대판매소를 설치하고 상하이(上海), 홍콩(香港),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등지와 무역을 하였다. 미주에서 발행되는 『공립신보』 1908년 6월 10일자 「환영 준창호」라는 글과 『황성신문』 1908년 3월 8일자 「준창환의 환영」이라는 논설이 게재될 정도로 준창호는 한국인들의 자랑거리였다. 또한 『신한민보』 1918년 7월 18일자에 있듯이, 북쪽에서 생산되는 몇 억 마리의 명태를 남쪽 도시에 수송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에는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해조신문』 창간호(1908년 2월 26일) 「발간하는 말」에서, 새 지식과 새 견문을 넓히는데 힘쓰기 위하여 신문을 간행함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우리의 문명제도를 본받아 가던 일본에게 보호라 하는 더러운 칭호를 받으니”라고 하여 을사늑약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언론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당대 최고의 지성이며 민족주의자인 장지연(張志淵)을 『해조신문』 주필로 초청할 정도로 민족신문의 간행에 열정적이었다. 또한 ‘한보관’이라는 신문사 건물을 신축하여 주었다. 인쇄기와 활자는 원산에서 1906년 9월에 창간하였다가 1908년 1월에 폐간된 『북한실업신보』의 것을 구입하였다. 신문을 국내에 보급할 경우 자신의 소유인 준창호를 적극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일제의 압력을 받아 『해조신문』은 폐간되었다.
국내와 일본과의 무역은 그의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1908년 의병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자 국내를 상대로 무역업에 종사하던 입장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1908년 12월 상순부터 연추(煙秋)에 와서 최재형, 이범윤 등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이범윤에 대하여는 러시아 관헌에게 호소하는 한편, 이범윤을 숙박시킨 연추 「고미사리」(役所의 名)의 한국인 통역 모씨를 부당하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운동에 대한 비난은 자신의 사업과 결부된 연해주의병들의 활동에 대한 것뿐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의거를 일으키자 이를 찬양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유족을 후원하였다. 1910년 8월 23일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될 위기에 처하자 동지 624명과 함께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성명회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 후 조직되었다.
1912년 이후 생우 등 무역업은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국 본토 산둥성(山東省)과 시베리아 등지에서 생우 및 냉동 소고기가 수입되는 등 소 수입의 다변화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1912년 준창호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13년 이후에는 한인사회 발전을 위하여 기부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업신문』 1913년 12월 21일자 「본 지회 의연 광고」에 보면, 24원을 기부하고 있다. 또한 『권업신문』 1914년 1월 18일 「특별 광고」를 보면, 최재형 등과 함께 한인노령이주 50주년 발기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총회에 참여한 대표원」에 보면, 권업회 연추지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권업신문』 1914년 2월 15일자 「활자는 샀소」에서 보듯이, 『권업신문』 활자구입에 200원을 기부하고 있다.
1913년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창호(安昌浩)와 가깝게 지냈다. 안창호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병중에 있는 안창호에 대한 염려, 안창호의 거처를 알지 못해 편지 한 장 나누지 못한 서운함 등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자신이 국내에 다녀온 사이 자신의 거처를 방문했던 안창호를 만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1913년 2월 14일자 편지에서는 원산 등지의 국내 사정과 친안창호계 인물들인 이강(李剛), 이갑(李甲) 등의 안부를 전해주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에는 고려족 중앙총회의 임원으로 같은 해 7월 7일 간행한 『청구신보』의 창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봄에 추풍지역으로 이사한 뒤, 같은 해 9월 15일에 이질에 걸려 신음하다가 같은 달 25일 밤에 사망하였다. 『신한민보』 1918년 1월 17일 기사에 따르면, 추풍 허커우 정교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자산가로서, 러시아 지역 한인사회 여러 분야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비록 민족운동가라기보다는 상인이었지만, 『해조신문』 간행 등 계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평가되었다. 또한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될 위기에 처하자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민족운동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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