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0035
성명
한자 崔燦植
이명 崔昌錫, 崔贊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6 훈격 애족장
1920년 6월 5일 연해주(沿海洲) 추풍(秋風)에서 무장조직 구성에 참여하고 8월 6일에는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연해주연합총회(沿海洲聯合總會)상의위원(常議委員)으로 집행부(執行部) 비서(秘書)재정부(財政部) 부장(部長)에 선임되어 활동했으며 1922년 추풍(秋風) 솔밭관(송전관(松田關))에서 참모부(參謀部) 무기과장(武器課長)을 역임하다가 동년(同年) 무장해제(武裝解除) 후에는 직접 50여 명의 부대를 지휘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최찬식은 1920년 6월 5일 연해주(沿海洲) 추풍(秋風)에서 항일무장조직 구성에 참여하고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연해주연합총회(沿海洲聯合總會)의 상의위원(常議委員)으로 집행부 비서 및 재정부 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솔밭관〔松田關〕에서 공산당총사령부 참모부(參謀部) 무기과장(武器課長)을 역임하였는데 동년 무장해제(武裝解除) 후에는 직접 50여 명의 부대를 지휘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최찬식은 1925년 12월 그로데꼬브구역 계몽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병으로 1926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金東漢 送還에 關한 件(1925. 7.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5)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377면
  • 沿海洲 韓族共産黨의 行動에 關한 件(1922. 5. 1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선봉(1926. 1. 21)
  • 재소한인이민사(김피오트르게르노비치·방상현, 1993) 249면
  • 松田關韓族共産黨의 眞相, 1922. 6월, 大正11年朝鮮治安狀況(朝鮮總督府警務局) 2권 69~103면
  • 1923년 4월 南烏琿春地方의 槪況(1923. 5. 10) 朝鮮軍參謀部發 朝特報에 關한 綴(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최찬식 최창석(崔昌錫), 최찬식(崔贊植) - 솔밭관 한족공산당
본문
자료에 따르면 1891년생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출신 배경과 집안 내력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최찬식(崔贊植)과 최창석(崔昌錫)이 있다.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무장 독립운동 단체 조직에 참여하였고 한족공산당연해주연합총회(韓族共産黨沿海洲聯合總會, 일명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간부로 선임되어 러시아 내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을 전후하여 한인 청년과 지식인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급속하게 수용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적 경향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이어지고,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 등으로 인하여 피해가 발생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연해주 남부지역인 추풍(秋風) 구역에서도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한인빨치산군대가 창설되었다. 1920년 6월 5일 추풍 구역 당어재골(唐於子溝) 신길동(新吉洞, 푸칠로프카(Пуциловка)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2리)에 위치한 최형식의 집에서 최문서(崔文瑞)·황원호(黃元浩) 등 14명과 회합하고 지방대를 조직한 후, 모병에 힘썼다. 그 결과 기존에 솔밭관에 조직되어 있던 지방대 조직인 ‘신길동청년회’를 ‘우리동무군’으로 개칭하였다. 그해 7월 개최된 임시총회에 유진구(柳震九)·이중집(李仲執)·황원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임시총회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4월참변’에 비추어 볼 때 무력에 의한 단순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므로, 공산주의를 표방해 러시아 공산당과 공명하는 것이 세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하다고 결론짓고 연해주한족공산당 조직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1920년 8월 결성된 솔밭관 한족공산당의 군정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솔밭관 한족공산당은 결성 직후 산하 무장단체인 ‘우리동무군’을 ‘공산주의군’으로 개칭하고 백위군과 러시아에 진출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20년 10월 일제가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명분으로 중국 만주지역을 침공하자, 만주 지역에 있던 많은 한인 부대들이 러시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한민회(韓民會), 의군부(義軍府) 간부와 군인들이 솔밭관 한족공산당 산하 공산주의군에 대거 가담하였다. 이에 조직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1921년 2월 초 개최한 ‘전체군대 총회’에 참여하여 상의위원(常議委員)으로 집행부(執行部) 비서(秘書) 및 재정부(財政部) 부장(部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경 5월경 총사령부장 최문서(崔文瑞) 등과 일하면서 솔밭관 한족공산당 총사령부 참모부(參謀部) 무기과장(武器課長)을 역임하였다. 그해 8월 31일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결정으로 솔밭관 한족공산당이 ‘러시아공산당 포시예트-훈춘구역 간부’로 개칭되자, 조직과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러시아 내전에서 러시아 빨치산 및 적군과 협력해 백위파, 일본군 등 연합군과 싸운 러시아 한인 무장부대들은 1922년 11월 10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의 명령으로 일본군의 철수 후인 11월 15일부터 24일에 걸쳐 무장해제 되었다. 무장해제 이후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고, 직접 50여 명의 부대를 지휘하여 위원장 이중집, 신우여(申禹汝) 등 솔밭관 한족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연락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25년 7월경 블라디보스토크 공산학교 학생으로 수학했다고 알려져 있고, 같은 해 12월 그로데꼬브구역 계몽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병환으로 1926년 1월 1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최찬식(관리번호:950035)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