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함남 북청(北靑) 사람이다.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북청진위대(北靑鎭衛隊) 소대장으로 있었다가 일본 동경(東京)에 가서 직조대학(織造大學) 염색과에서 공부하면서 독립을 위한 비밀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밀활동이 발각되어 북청으로 돌아와 자봉침회사에서 주인으로 일하면서 수입의 절반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활동하였다. 1915년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당시에는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여 8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후 만주 장백현(長白縣)에 있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은 1919년 3월 만주지역에서 3·1운동이 전개된 후 같은 해 5월 경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 대안(對岸) 장백현에서 함경남도 출신의 이희삼(李熙三)·이동백(李東白)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편 지단 조직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19년 11월 1일 조직된 장백현 17도구의 장백지단이다. 아울러 국내에도 지단 조직을 확대하였는 데, 그 조직망은 대개 중심인물들의 원적지인 함경남도 지역이었다. 대표적인 지단으로는 함경도 단천(端川)지단과 북청(北靑)지단을 들 수 있다.
임표는 1920년 7월 대한독립군비단이 연해주(沿海州) 이만으로 이동할 때, 제1차 이동부대를 이끌고 이만에 와서 사관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1년 10월 노령 연해주에서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중대장, 집행위원 및 사령부 참모장으로 김찬·김덕은(金德殷)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사령부 사령관은 이용(李鏞)이었다. 같은 해 12월에 이만 전투에 참전, 러시아 적군과 한편이 되어 일본군과 백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22년 8월에는 노령 이만에서 조직된 대한혁명통군서(大韓革命統軍署)의 참모부장에 선임되었다.
임표는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국민대표회의 결렬후 창조파가 주도한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25년에는 이만시의 집단농장 농장장으로 일하였고, 1925년부터는 스비야기노 마을의 집단농장 농장장으로 일하였다. 이 당시 상해 임시정부와 계속 연락을 취하였으며, 계봉우·이동휘(李東輝)·박일리야 등과 자주 서신 왕래를 하였다. 1936년 10월에 연해주 정치부에 검거되어 재판도 없이 투옥된 후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122面
- 심문조서(소련 합동국가보안부 연해주지청 제4부, 1934. 3. 25)
-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國家報勳處) 第12輯 82·107·109∼112·115·129·134·248·250·253面
- 獨立新聞(1923. 3. 7)
- 朝鮮民族運動年鑑 153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國會圖書館) 511∼518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第1卷 344·386面
- 소련 검찰청 연해주주 검사부국장 확인서(1957. 3.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