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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3월 10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대동강면(大同江面) 선교리(船橋里) 봉용동(鳳龍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으로 아버지는 장명구(張明九)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다.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6세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숙부 집에 의탁해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887년 공립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892년 부친이 돌아가신 후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1904년 11월 24일 겔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한 후. 빅아일랜드(Big Island) 코할라(Kohala)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였다. 1906년 7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샌 아르도(San Ardo)에 있는 철도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어깨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식당과 하숙집에서 일을 하는 등 어렵게 잡역일을 하면서도 어려운 동포를 도왔다. 1907년 3월 파사디나(Pasadena)에서 설립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백인 노동자들의 아시아계 노동자 배척운동으로 직업을 얻기 어렵게 되자, 알래스카로 가서 연어통조림 공장에서 일하였다. 1907년 9월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산호세(San Jose)의 브라운(Brown)이 경영하는 기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2개월 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반네스가(Vanness St.)와 필론가(Fillone St.)의 집에서 가사일을 하였다.
1908년 3월 20일 대한제국의 외부고문(外部顧問)임에도 일본정책에 적극 협력한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須知分)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스티븐스는 콜롬비아대학교와 하워드대학교(Howard University)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국무부 외교관이 되어, 1878년 주일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대리공사를 역임하였다. 1884년 일본의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와 한성조약(漢城條約) 협상을 도왔으며, 일본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대한제국 외부고문에 임명되어, 미국 언론을 대상으로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반일정서를 진정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스티븐스는 캘리포니아지역에서 일본노동자 배척운동이 거세지자 미국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의 당위성을 미주 한인들에게 인식시킬 목적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스티븐스는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당일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총영사 고이케 초조(小池張造)의 환대를 받으며 페어몬트 호텔(Fairmontt Hotel)에 투숙하였다. 이튿날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은 후에 선정(善政)이 계속되고 있으며, 일본의 한국 보호정책은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보다 좋은 대우를 하고 있고, 농촌의 농민들까지도 일본의 보호정치를 좋아하고 있다며 망언을 쏟아냈다. 이러한 인터뷰 기사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imes)에 보도되었고, 이 기사를 본 재미 한인들은 분노하였다.
북미 한인의 대표 조직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는 3월 21일 곧바로 ‘스티븐스 사태’의 해결을 모색하고자 한인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립협회의 최정익(崔正益)·정재관(鄭在寬)과 대동보국회의 문양목(文讓穆)·이학현(李學鉉) 등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3월 22일 오전 최정익 등은 페어몬트 호텔 로비로 찾아가 스티븐스를 면담하며 망언을 바로 잡아 줄 것과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한국은 황제가 암매(暗昧, 어리석고 우매하다)하고 정부 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함으로 민원이 파다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서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 빼앗길 것이다. 다행히 한국의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정부를 개혁한 것이 한국 백성에게 행복한 것이기에 일본의 보호정치를 찬양한 것이고 또 그것이 사실이며 정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스티븐스의 답변에 분함을 참을 수 없었던 정재관은 스티븐스를 쳐서 넘어트렸고, 다른 사람들은 의자를 들어서 스티븐스를 향해 던지며 공격해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4인의 총대들이 돌아와 전후사정을 보고하고 그날 오후 8시 공립협회원과 대동보국회원들은 공동회를 다시 소집해 대책을 협의하면서 스티븐스 처단을 결의하였다. 이 대책회의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전명운(田明雲)이 스티븐스 처단을 자원할 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다음날인 3월 23일 오전 9시 1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 북쪽 약 20야드 지점에서 호텔측이 제공한 리무진을 타고 온 고이케 총영사와 스티븐스가 차례로 내렸다. 스티븐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전명운이 쏜살같이 다가가 총을 쐈으나 격발되지 않자, 권총 손잡이로 스티븐스의 왼쪽 얼굴을 가격하였다. 갑자기 일격을 당한 스티븐스가 전명운에게 달려들자 전명운은 이를 피해 도주하였다. 이때 전명운을 쫓는 스티븐스 뒤에서 총을 꺼내 연속으로 세 발을 발사해 첫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하복부에 명중하였다. 어깨에 총을 맞은 전명운은 쓰러졌고, 두 발을 맞은 스티븐스는 피를 흘리며 자동차 쪽으로 걸어가 승차하였다. 스티븐스를 태운 리무진은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항만응급병원(Harbor Emergency Hospital)으로 이동해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다.
자동차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세무서 직원 헨리 섹스톤(Henry P. Sexton)이 장인환의 손을 내려쳐 권총을 떨어뜨렸고, 경찰관 오웬스(Edward Owens)에게 붙잡혔다. 총상을 입은 전명운도 경찰관 맥그란드(James McGrand)에게 붙잡혔다. 응급치료를 마친 스티븐스는 세인트 프란시스 기념병원에 입원하여 탄환 제거 수술을 받던 중 3월 25일 오후 11시 10분 사망하였다. 간수가 스티븐스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총을 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나”라고 묻자, “아닙니다. 저는 잘됐다고 봅니다. 스티븐스는 우리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겼으며, 우리 한국인들의 적입니다. 마땅히 그(스티븐스)는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경찰에 구속된 후 1급 살인혐의로 3월 27일부터 280여 일 동안 조사가 계속되었다. 미국 주재 일본총영사관 측과 스티븐스 유족들은 사형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단 카글란(Nathan C. Coghlan)·존 바레트(John Barret)·로버트 페랄(Robert Ferral) 등 3인의 변호사 가운데, 아일랜드 사람인 카글란은 조국이 같은 처지에 있던 한인에게 동정을 표하여 변론에 최선을 다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두 의사를 후원하는 모금운동이 북미·하와이·멕시코 등 미주를 넘어 국내와 일본·중국·러시아 교민사회로 확대되어, 모두 8,390달러가 모금되었다. 그리고 이상설이 집필한 양의사 합전(兩義士合傳)이 발간되어 교민사회에 배포되었다.
12월 23일 샌프란시스코 고등재판소에서 ‘계획에 의한 1급살인’ 혐의를 두고 변호인들은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을 위한 애국행위로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변론하였다. 12명의 배심원 중에 7명은 사형·5명은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여덟 차례의 비밀투표와 토론 끝에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의견 일치를 보면서 징역 25년을 받았다. 1909년 1월 2일부터 샌쿠엔틴(San Quentin) 주립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는 동안 품행을 단정히 하며 일요일에 형무소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카펫의 찌든 때를 빼는 세탁기술을 익히며 틈틈이 영어를 공부하였다. 투옥된 지 8년 4개월 이상이 되면 가출옥이 가능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적극적인 가출옥운동을 전개하며 세 차례에 걸쳐 가석방 청원서를 제출하였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강영소(姜永韶)와 황사선(黃思宣) 목사 등이 풀려나면 생계를 보장한다는 각서를 제출해 교도소 측으로부터 가석방을 허락받고, 옥고를 겪은 지 10년 8개월 만인 1919년 1월 10일 풀려났다.
가석방 기간 중에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수 없어, 감옥에서 배운 재봉업과 세탁업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1919년 12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구제부 임원, 1922년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1923년 대의원회 의장 등으로 활동하는 등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전개되는 민립대학 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적십자회비·간도학살 동포 구제금·독립의연금·의무금·외교비 의연금·쿠바동포 구제금·고국 수재 구제금·민립대학기성비 후원금·관동대진재 동포동정금 등을 후원하였다. 1924년 4월 10일에는 미주동포사회 주관으로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장인환의사 해방축하회’를 개최하고 완전 석방을 환영하였다. 1926년 장기간 후원하던 선천(宣川)의 대동고아원 총무로 임명되어 미주 동포들의 동정금 모집을 의뢰받은 후, 캘리포니아 여러 지역의 동포사회를 방문하여 후원금을 모았다.
1927년 4월 29일 세탁소를 처분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사회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23년 만에 돌아와 평양 선교리의 숙부댁을 먼저 방문해 회포를 풀었다. 같은 해 6월 10일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윤치복(尹致福)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제의 끈질긴 감시와 억압을 받아 건강이 악화되어,결혼생활과 고아원 사업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그해 10월 27일 3년을 기약하고 혼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세탁업과 막노동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두고 온 부인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미국 이민조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또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도 원활하지 못하자 좌절감에 빠져 1930년 5월 10일 공립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이 깊어져 안식교회의 위생병원(Health Betterment Institute)에 입원하였지만 대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5월 22일 낮 12시 15분 3층 입원실 창문을 열고 투신, 사망하였다. 미주 한인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며 동포사회 전체가 애도하였다. 유해는 5월 26일 오후 2시 30분 샌프란시스코의 사이프러스 공원묘지(Cypress Lawn Memorial Park)에 안장되었다. 1975년 8월 3일 봉환되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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