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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4월 17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상가면(上加面)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월송(月松)이다. 대한제국 시기 황제의 측근인 전 군부대신이자 내장원경 이용익(李容翊)의 양손자이다.
1906년 5~6월경 고향인 명천군 상가면에 4년제 과정으로 사립보성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해 9월 보성전문학교 초대 학감 정영택(鄭永澤)과 함께 청주(淸州)에 사립청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재정을 지원하던 한북흥학회 부설로 한북의숙 속성사범과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았다.
1907년 3월 24일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한 이용익의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2대 보성전문 교주에 취임하였다.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에 의하면, “너(이종호)는 내 업을 이어 보성학교를 열심히 찬조하여 문명을 발달하게 하라”라는 이용익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보성전문 활동은 이미 1905년 9월 이용익의 중국 상하이(上海) 망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말부터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의 항일활동으로 황실의 재정지원이 중단되었고, 통감부의 관립화 기도와 1908년 이른바 ‘유지회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때 인쇄소 보성관을 경영하면서 많은 교과서와 신서적을 간행하였고, 조선 각지 학교에 무료로 배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8년부터 한북의숙을 계승한 서북협성학교 교장을 하였다. 서북협성학교는 1년 과정의 속성사범과로 시작하였는데, 당시 교과과정은 산술·지리·역사·법률·물리학·교육학·영어·일어·작문 등이었다. 협성학교는 이 외에 보통과와 측량과를 두었다. 같은 기간 함경도 종성(鍾城)에 함북보성학교도 설립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안창호(安昌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민족교육사에 있어 역사적 의미를 갖는 학교로, 교육방침을 건전한 인격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 양성, 건강한 체력 훈련에 두었다.
1909년에는 함경도 길주(吉州)에 보성학교와 길주여학교를 설립하였고, 함경도 출신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강화도에 사립보창학교를 설립하는 등 학교설립에 크게 진력하였다. 또한 같은 해 4월 일본으로 잠시 건너가 도쿄(東京)의 조선유학생 춘계운동회에 참여하여 금화 100원을 기부하였다. 이러한 교육사업에 대해 민족지사 매천 황현(黃玹)은 조부인 이용익의 유지(遺志)를 따른 것으로 “교육사업이라면 남에게 뒤질세라 무조건 달려들었다”라고 평한 바 있다.
교육활동과 더불어 각종 학회와 단체를 통해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일환으로 1906년 10월에 결성된 한북흥학회에, 1908년 1월 이후에는 한북흥학회를 계승한 서북학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북흥학회는 1906년 10월 이준(李俊)·이동휘 등 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이 설립한 계몽운동 단체이다. 서북학회는 이동휘·안창호·박은식(朴殷植)·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 등 관서·관북 지방과 황해도 지방 출신 인사를 주축으로 설립된 애국계몽단체로,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고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여 지교(枝校)를 두고 애국심 고취와 교육증진을 위한 월보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서북학회의 평의원으로 『서북학회월보』를 만들 때 1만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08년 10월 『대한협회회보』에 “자존(自尊), 자중(自重), 자신(自信), 자애(自愛)의 마음으로 (중략) 우리들은 맹성(猛省)할지며 분발할지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나라를 보존하지 못하면 누가 우리들의 나라를 이같이 보존하리오”라면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경주할 것을 역설하였다.
1907년 설립된 신민회(新民會)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기에 의해, 양기탁(梁起鐸)을 총감독으로 하고 전덕기(全德基)·이동휘·이갑·유동렬·안창호 등이 창건위원이 되고, 이와 함께 최광옥(崔光玉)·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박은식·신채호(申采浩)·이강(李剛)·임치정(林蚩正)·주진수(朱鎭洙)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때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 창립과 같은 기간인 4월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대한제국 황제의 밀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떠나는 이준을 집에 초대하여 성공을 기원하는 송별연을 베푼 일도 있었다. 또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범윤(李範允) 의병부대에는 총기 매입 등을 위한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1908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항일 민족신문 발간을 추진하였다. 박은식과 협의하여 김하구(金河球)·장지연(張志淵) 등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는 일을 기획하였다. 그 결과 최봉준(崔鳳俊)과 정순만(鄭淳萬) 주도로 그해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이 창간될 수 있었다. 해외발간 최초의 우리말 일간 신문으로, 3개월간 75호까지 발간한 해조신문은 국내에도 보급되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일본 추밀원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하얼빈 저격 처단사건 직후 배후인물로 지목되었다. 일제 헌병대는 사건 관렴 혐의로 현지에서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 등을, 국내에서는 안창호·이갑·유동열·임치정 등을 체포하였다. 같은 해 11월 초 명천에서 원산(元山)으로 가던 길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고 가택수색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910년 2월 19일 안창호·이갑·이기종(李箕鐘)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이후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10년 4월 이갑 등과 함께 중국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를 경유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곳 신한촌에서 1911년 5월 이상설(李相卨)·김립(金立)·김도여(金道汝) 등과 함께 이상설을 의장으로 하는 권업회(勸業會)를 만들었다. 이때 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협회를 위해 총 5천 루블을 희사하였고, 협회의 강화·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가 제공한 5천 루블은 1912년 3월 한민학교 건축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권업회 활동 확장을 위해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왔고, 지부 개설을 위해 자비를 들여 아무르강 유역의 니콜라예프스크(泥港)와 다른 지역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권업회는 해조신문의 후신 격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간하였다. 『권업신문』은 1912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채호·김하구 등이 권업회 기관지로 창설한 신문으로, 초대 주필은 신채호였다. 그러나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국이 되면서부터 일본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연해주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는 연해주 총독에게 두 차례에 걸쳐 권업회와 합성회사의 해산, 권업신문 발행 중지, 반일 성향의 주요 한인 지도자의 추방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동휘·이동녕(李東寧)·윤해(尹海)·김하구 등 20명의 인사들과 함께 주요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거론되었다. 러시아 측이 이를 받아들인 결과 권업신문은 같은 해 8월 30일 지령 126호 발행을 끝으로 러시아정부로부터 발매정지를 당하였고 권업회도 9월에 해산되었다.
1914년 8월 초 요새사령관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밖으로의 퇴거명령을 받았다. 이강과 정재관(鄭在寬)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은 러시아 헌병대에 투옥되었다. 그 결과 하바롭스크로 주거를 옮겼으나 이곳에서 또다시 추방되었다. 이에 이동휘·김립 등과 함께 연해주를 떠나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수분 대전자 나자구(羅子溝)에 정착하였다. 그해 12월 이곳에서 이동휘를 교장으로 김립·김규면(金圭冕) 등이 교관으로 하는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운영비용을 제공하였다. 이 학교는 현대식 군사교육과 민족교육을 가르쳤고 8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는데, 후일 이곳에서 배출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일본영사관의 요청을 중국 당국이 받아들임에 따라 1915년 말 강제 폐쇄되었다.
1916년 이후 사회활동과 관련한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상으로 보면 1917년 상하이에서 후일 부인이 되는 장계인 여사를 만난 사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향 함경도 명천으로 강제 압송된 사실만 알 수 있다. 고향으로 압송된 이후 1년 여 동안 거주제한의 감금생활을 하였고, 이듬해인 1918년 10월 서울로 올라갔다. 상경 이유는 1910년 이후 천도교가 맡아 경영하던 보성전문학교를 되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조부 이용익의 제일은행 경성지점 예치금 78만원 반환 청구소송 노력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서대문과 돈의동 등을 전전하며 빈궁하게 셋방살이를 하다가 1932년 3월 28일 서울 하야시정(林町) 단칸방에서 사망하였다. 1964년 4월 26일 종로구 낙원동 구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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