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함경북도 경원(慶源) 사람이다.
그는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 이주하였다.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자리잡은 그는 러시아 군대의 군납 상인으로서 우육류(牛肉類) 납품으로 거금을 모았다. 또한 그는 인물이 고매하여 25세에는 수백호를 거느리는 노야(老爺)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고 나날이 주민의 신망이 높아져 도헌(都憲 또는 都老爺:지방장관의 총대)으로 근무하면서 두 번에 걸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는 등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위한 주요 인사로 부각되었다. 이렇게 노우키에프스크의 부호가 된 그는 신용을 바탕으로 당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성공한 부호 최봉준(崔鳳俊)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후 그는 그 재산을 배경으로 조국 독립운동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한족(韓族)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우선 민족교육에 뜻을 둔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러시아에 있는 한교들을 교육시켰으며 도헌으로 재직 당시 매년 3천 루불의 봉급을 전부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식으로 매년 1명씩 교포학생을 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적극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국내에서 오는 애국지사들을 맞이하고 이범윤(李範允) 등과 상의한 후 국권회복운동에 중추기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동의회(同義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서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에 진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단체로 육성하였다. 그후 국내 혹은 간도에서 이범진(李範晋)·이위종·이상설(李相卨)·장지연(張志淵)·정재관(鄭在寬)·안중근(安重根)·홍범도(洪範圖)·전명운(田明雲)·이진룡(李鎭龍) 등이 일제의 침략에 격분하여 망명하여 옴에 따라 점차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기지화 되었다. 이 같은 동의회를 건설하여 활동하던 그는 한편 이범윤의 창의회(彰義會)와도 제휴하여 무장 항일운동도 전개하였다. 국내와 간도로부터 이동하여 온 의병들을 규합하고 자신의 수많은 재산을 배경으로 하여, 노우키에프스크와 두만강 사이 합집구의(哈什溝義) 부근의 자신의 소유지를 제공하여 의병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노우키에프스크는 일약 무장항일군의 기지가 되었으며 3, 4천의 병력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그는 이같이 집결된 의병들을 무기상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써 무장, 훈련을 시켜 정예의 항일군으로 양성시켰다. 이 의병부대의 대장은 이범윤이었으며, 그는 이 부대의 자금을 공급, 관리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은 1908년 4월경부터 개시되었다. 우선 두만강을 도강하여 일제의 국경 수비 상황의 정보를 탐지하였으며, 그해 여름부터는 본격적인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비교적 일본군의 수비가 약한 지점을 골라 도강작전을 개시한 의병대는 함북 일대의 소규모의 일군 수비대와 꾸준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유생(儒生)을 대표하는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가 이곳에 도착하여 그와 이범윤 부대를 방문하고, 관일약(貫一約)이란 맹약으로 애국·애도·애신·애인(愛國·愛道·愛身·愛人)의 마음을 함양하여 장차 나라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활동은 일본군의 증강과 일제 당국의 책동으로 일본과의 분쟁을 원치 않는 러시아 당국의 단속강화로 점차 쇠퇴하여 갔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비록 산발적이나마 1909년까지 계속하였던 사실은 주목해야 하겠다. 특히 1909년 7월에는 2백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진입하여 경원(慶源), 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1909년에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10년 7월에 이르러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그를 인수하여 재간하였다. 그가 사장에 추대되었고 부사장 이상운(李尙雲), 총무 김규섭(金圭燮), 재무 차석보(車錫甫), 편집장발행인 유진률(兪鎭律) 등으로 개편되었다. 이같이 재간된 이 신문은 격렬한 항일논문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 등 한교가 살고 있는 해외와 국내에 배부하였다. 그 신문은 일제의 한국침탈이 다가올수록 논조가 과격하게 되었으며, 1910년 8월 20일 자 「대동공보」는 무력하게 일제에 침탈돼 가는 조국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피를 흘리는 방법 뿐"이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그는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으로서 한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연해주에 거류하는 재한인으로서 그의 원조를 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활동 중에도 노우키에프스크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유류제조소를 두어 경영하였다. 이 제조소에는 교포 인부 약 1백여 명을 채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단 유사시에는 항일단체로서의 의병으로써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연해주에는 많은 애국지사가 활동하였는데 노우키에프스크에는 그와 이범윤·홍범도가 있었으며, 블라디보스톡에는 이동휘(李東輝)·김하석(金夏錫)·김치보(金致寶)가, 니코리스크에는 문창범(文昌範)이 자리를 잡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치열해 갔다.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은 앞으로의 투쟁방법과 계획을 논의하였다. 또한 노령 한인 지도자들은 재차 무장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군을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여운형(呂運亨)·신익희(申翼熙)·남형우(南亨祐)·이춘숙(李春塾)·조성환(曺成煥)·현순(玄楯)·선우 혁(鮮于赫)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해 불조계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그는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였다. 당시 선출된 초대 내각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신석우(申錫雨, 후에 문창범),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국무원비서장 조소앙(趙素昻) 등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자 재노령 한인 지도자들은 상해의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관하여 1919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회의를 열었다. 김철훈(金哲訓)의장의 사회로 열린 이 회의는 그와 문창범을 비롯한 21명의 민족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토의한 결과 임시정부를 가승인하고 후에 정부가 노령에 이전하면 정식으로 가담하기로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각이 개편될 때 그는 재무총장에서 제외되었다.
1919년 11월 그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허만수(許萬洙)·김좌두(金佐斗)·이 용(李鏞)·김하석·김규면(金奎冕)·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조직하였으며 무력항쟁을 기도하여 각지에서 우선적으로 무기 수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그가 일본군에게 피살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의 순국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63세의 그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 것이었다.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여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의 진지를 5일 오전중까지 전부 점령하였으며 러시아 군을 무장 해제시킨 후 포로로 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일군의 원조를 얻어 5일 오전 4시부터 신한촌을 습격하여 한민학교, 한민회관, 민가 등을 방화하고 한인을 닥치는 대로 체포, 살육하였다. 이때 체포당한 사람이 51명이었다. 당시 신한촌에 있던 한인은 일군의 만행을 피하여 니코리스크로 탈출하였는데 일본군은 니코리스크에도 일군을 보내어 한인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이 지방에 체류하고 있던 그를 비롯한 한인 67명이 일군에 의하여 감금되었던 것이다. 그후 다른 한인들은 석방되었는데 그와 김이직(金理直)·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柱弼) 등 지도급 인사 4명이 계속 감금되었다가 4월 7일 총살당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렇게 발표하였다. 「이 4명은 모두 배일 선인단의 유력자로 4월 5일 사건에 제하여도 무기를 지(持)하고······조사를 계속하던 중 4월 7일 아 헌병분대 숙사 이전과 함께 압송 도중 도주하였으므로 체포하려 한 즉 피등의 저항이 심하므로 부득이 사격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당시 "독립신문"에는
「저항이오· 저항이 무엇이요. 적수로 무슨 저항을 하겠오. 하물며 최재형씨는 60 노령으로 체포될 시에 피(避)하라 하여도 피하지 아니하였소. 도주라니요. 쇠사슬로 묶여서 자동차에 실려 가는데 도주란 무슨 말이오. 적이 이전한 숙사와 구숙사와는 거리가 퍽 가까울 뿐만 아니라 대시가에 연(連)하였소. 이 시가내로 압송해 가는 길에 도주하여 다시 체포하다가 부득이 총살하였다 하면 그 많은 사람 중에 어찌해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오. 적은 악이 나서 때리며 찌르며 잡아 가지고 심문도 잘 안하고 때리면 차다가 사살한 모양이오.」
이 양측의 기사를 보더라도 그의 최후가 얼마나 무법하게 일제에 의하여 자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동년 5월 22일 상해에서 순국추도회를 거행하였다. 당시 참석자는 이동휘·안창호 등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3면
- 고등경찰요사 15·87·92·96·12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4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37·442·456·482·492·494·495·876·88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30·3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3·40·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41·63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2·119·120·213·2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82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54·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4·5·8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50·54·55·61·64·187·334·469·498·546·561·5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34·493·508·530·81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68·417·418면
- 동아일보(1920. 5. 8, 5. 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47·769·770·7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78·79·156·185·189·191·195·236·239·410·411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