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73
성명
한자 崔在亨
이명 都憲, 崔才亨, 崔材衡, 崔才衡, 표트르 세묘노비치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4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4년 러시아 연해주 노우키에프스크에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서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에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1908년 4월경부터 두만강을 도강하여 일제의 국경 수비 상황의 정보를 탐지하였으며, 그해 여름부터 의병을 이끌고 도강작전을 개시하고 함북 일대의 일군 수비대와 전투를 하였으며, 1909년에 안중근(安重根)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였고, 1910년 7월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하여 재간하고 항일논문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해외와 국내에 배부하였으며.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이 되어 교포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였으며 의정원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919년 11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4월 일군에 체포되어 총살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함경북도 경원(慶源) 사람이다.

그는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 이주하였다.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자리잡은 그는 러시아 군대의 군납 상인으로서 우육류(牛肉類) 납품으로 거금을 모았다. 또한 그는 인물이 고매하여 25세에는 수백호를 거느리는 노야(老爺)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고 나날이 주민의 신망이 높아져 도헌(都憲 또는 都老爺:지방장관의 총대)으로 근무하면서 두 번에 걸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는 등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위한 주요 인사로 부각되었다. 이렇게 노우키에프스크의 부호가 된 그는 신용을 바탕으로 당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성공한 부호 최봉준(崔鳳俊)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후 그는 그 재산을 배경으로 조국 독립운동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한족(韓族)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우선 민족교육에 뜻을 둔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 러시아에 있는 한교들을 교육시켰으며 도헌으로 재직 당시 매년 3천 루불의 봉급을 전부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식으로 매년 1명씩 교포학생을 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적극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국내에서 오는 애국지사들을 맞이하고 이범윤(李範允) 등과 상의한 후 국권회복운동에 중추기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동의회(同義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서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에 진력하는 한편 항일 무장단체로 육성하였다. 그후 국내 혹은 간도에서 이범진(李範晋)·이위종·이상설(李相卨)·장지연(張志淵)·정재관(鄭在寬)·안중근(安重根)·홍범도(洪範圖)·전명운(田明雲)·이진룡(李鎭龍) 등이 일제의 침략에 격분하여 망명하여 옴에 따라 점차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기지화 되었다. 이 같은 동의회를 건설하여 활동하던 그는 한편 이범윤의 창의회(彰義會)와도 제휴하여 무장 항일운동도 전개하였다. 국내와 간도로부터 이동하여 온 의병들을 규합하고 자신의 수많은 재산을 배경으로 하여, 노우키에프스크와 두만강 사이 합집구의(哈什溝義) 부근의 자신의 소유지를 제공하여 의병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노우키에프스크는 일약 무장항일군의 기지가 되었으며 3, 4천의 병력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그는 이같이 집결된 의병들을 무기상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써 무장, 훈련을 시켜 정예의 항일군으로 양성시켰다. 이 의병부대의 대장은 이범윤이었으며, 그는 이 부대의 자금을 공급, 관리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은 1908년 4월경부터 개시되었다. 우선 두만강을 도강하여 일제의 국경 수비 상황의 정보를 탐지하였으며, 그해 여름부터는 본격적인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비교적 일본군의 수비가 약한 지점을 골라 도강작전을 개시한 의병대는 함북 일대의 소규모의 일군 수비대와 꾸준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유생(儒生)을 대표하는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가 이곳에 도착하여 그와 이범윤 부대를 방문하고, 관일약(貫一約)이란 맹약으로 애국·애도·애신·애인(愛國·愛道·愛身·愛人)의 마음을 함양하여 장차 나라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병활동은 일본군의 증강과 일제 당국의 책동으로 일본과의 분쟁을 원치 않는 러시아 당국의 단속강화로 점차 쇠퇴하여 갔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비록 산발적이나마 1909년까지 계속하였던 사실은 주목해야 하겠다. 특히 1909년 7월에는 2백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진입하여 경원(慶源), 회령(會寧)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1909년에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10년 7월에 이르러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그를 인수하여 재간하였다. 그가 사장에 추대되었고 부사장 이상운(李尙雲), 총무 김규섭(金圭燮), 재무 차석보(車錫甫), 편집장발행인 유진률(兪鎭律) 등으로 개편되었다. 이같이 재간된 이 신문은 격렬한 항일논문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 등 한교가 살고 있는 해외와 국내에 배부하였다. 그 신문은 일제의 한국침탈이 다가올수록 논조가 과격하게 되었으며, 1910년 8월 20일 자 「대동공보」는 무력하게 일제에 침탈돼 가는 조국의 운명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피를 흘리는 방법 뿐"이라고 절규하였다. 또한 그는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韓族民會長)으로서 한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당시 연해주에 거류하는 재한인으로서 그의 원조를 받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같은 활동 중에도 노우키에프스크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유류제조소를 두어 경영하였다. 이 제조소에는 교포 인부 약 1백여 명을 채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일단 유사시에는 항일단체로서의 의병으로써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연해주에는 많은 애국지사가 활동하였는데 노우키에프스크에는 그와 이범윤·홍범도가 있었으며, 블라디보스톡에는 이동휘(李東輝)·김하석(金夏錫)·김치보(金致寶)가, 니코리스크에는 문창범(文昌範)이 자리를 잡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치열해 갔다.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게 되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은 앞으로의 투쟁방법과 계획을 논의하였다. 또한 노령 한인 지도자들은 재차 무장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군을 규합하는 책임을 맡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여운형(呂運亨)·신익희(申翼熙)·남형우(南亨祐)·이춘숙(李春塾)·조성환(曺成煥)·현순(玄楯)·선우 혁(鮮于赫)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해 불조계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그는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였다. 당시 선출된 초대 내각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신석우(申錫雨, 후에 문창범),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국무원비서장 조소앙(趙素昻) 등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자 재노령 한인 지도자들은 상해의 임시정부 승인문제에 관하여 1919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 회의를 열었다. 김철훈(金哲訓)의장의 사회로 열린 이 회의는 그와 문창범을 비롯한 21명의 민족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토의한 결과 임시정부를 가승인하고 후에 정부가 노령에 이전하면 정식으로 가담하기로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의 내각이 개편될 때 그는 재무총장에서 제외되었다.

1919년 11월 그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허만수(許萬洙)·김좌두(金佐斗)·이 용(李鏞)·김하석·김규면(金奎冕)·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조직하였으며 무력항쟁을 기도하여 각지에서 우선적으로 무기 수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그가 일본군에게 피살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의 순국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63세의 그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 것이었다. 당시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일본군은 1920년 4월 4일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여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의 진지를 5일 오전중까지 전부 점령하였으며 러시아 군을 무장 해제시킨 후 포로로 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일군의 원조를 얻어 5일 오전 4시부터 신한촌을 습격하여 한민학교, 한민회관, 민가 등을 방화하고 한인을 닥치는 대로 체포, 살육하였다. 이때 체포당한 사람이 51명이었다. 당시 신한촌에 있던 한인은 일군의 만행을 피하여 니코리스크로 탈출하였는데 일본군은 니코리스크에도 일군을 보내어 한인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이 지방에 체류하고 있던 그를 비롯한 한인 67명이 일군에 의하여 감금되었던 것이다. 그후 다른 한인들은 석방되었는데 그와 김이직(金理直)·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柱弼) 등 지도급 인사 4명이 계속 감금되었다가 4월 7일 총살당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렇게 발표하였다. 「이 4명은 모두 배일 선인단의 유력자로 4월 5일 사건에 제하여도 무기를 지(持)하고······조사를 계속하던 중 4월 7일 아 헌병분대 숙사 이전과 함께 압송 도중 도주하였으므로 체포하려 한 즉 피등의 저항이 심하므로 부득이 사격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당시 "독립신문"에는

「저항이오· 저항이 무엇이요. 적수로 무슨 저항을 하겠오. 하물며 최재형씨는 60 노령으로 체포될 시에 피(避)하라 하여도 피하지 아니하였소. 도주라니요. 쇠사슬로 묶여서 자동차에 실려 가는데 도주란 무슨 말이오. 적이 이전한 숙사와 구숙사와는 거리가 퍽 가까울 뿐만 아니라 대시가에 연(連)하였소. 이 시가내로 압송해 가는 길에 도주하여 다시 체포하다가 부득이 총살하였다 하면 그 많은 사람 중에 어찌해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오. 적은 악이 나서 때리며 찌르며 잡아 가지고 심문도 잘 안하고 때리면 차다가 사살한 모양이오.」

이 양측의 기사를 보더라도 그의 최후가 얼마나 무법하게 일제에 의하여 자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동년 5월 22일 상해에서 순국추도회를 거행하였다. 당시 참석자는 이동휘·안창호 등 3백여 명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3면
  • 고등경찰요사 15·87·92·96·12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4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37·442·456·482·492·494·495·876·88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7·30·34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3·40·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41·63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2·119·120·213·2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82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8·54·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4·5·8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50·54·55·61·64·187·334·469·498·546·561·5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34·493·508·530·81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68·417·418면
  • 동아일보(1920. 5. 8, 5. 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47·769·770·7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78·79·156·185·189·191·195·236·239·410·41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최재형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 ЦойПётр Семёнович 함북 경원 -
본문
1860년 8월 15일 함북 경원군에서 최흥백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명은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Цой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다. 부친 최흥백은 그 당시 경원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동포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부친은 가족을 인솔해 동년 9월 9일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로 이주하였다. 이후 연추(얀치헤, 煙秋, 현재 추카노프카) 마을로 이사하였다. 이어 20세기 초,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급변하는 정치 상황에서 노보키예프스크(1905, 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하였고, 다시 1910년에는 슬라뱐카(1910년)로, 마지막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사하였다. 이주한지 2년 후인 1871년 한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소년시절 러시아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선원생활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축적 하였다. 1878년부터 조선 ・ 중국 ・ 러시아 3국 국경이 접해있는 지역인 얀치혜에서 러시아병영의 통역으로 일하였다. 1880년 연추남도소의 러시아어 서기로 피선되어, 3년 동안 문서정리와 사무처리를 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1884년 연해주 당국은 군사적 목적으로 조선 국경까지 군사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도로는 블라디보스토크-라스돌리노예-바라바시-슬라비얀카-노보끼에프스크-크라스노예셀로 촌을 연결하는 군용도로였다. 군용도로 건설시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연해주 당국으로부터 영군 300명을 거느릴 권한을 받아 연추에서 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10년간 도로건설에 관여하는 통역으로 일하면서 많은 조선인들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1893년 연추남도소의 도헌에 피임되었다. 이때 유실수를 이용한 녹지조성과 교육계몽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축적된 부와 러시아인 주류사회에서 얻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90년대 말 지금의 하산 지구 크라스키노의 노보키예프스크에 최초의 공원(과수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교육사업에서도 큰 업적을 세웠다. 해마다 성실한 많은 한인 젊은이들을 뽑아 러시아 대도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외에도 넓은 인맥 덕분에 당시 큰 상업회사들이었던 ‘추린’, ‘쿤스트와 알베르스’, ‘퍈코프’, ‘마르코프’ 등의 지역판매상점이 포시에트 지구의 노보키예프스크, 슬라뱐카, 아디미 등에 유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 건물들은 주변에서 가장 멋진 벽돌건물들이었고, 주문신청을 받은 상점들은 1주일 안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상품들을 제공하였다. 1894년 페트로그라드에 가서 제1차 전러시아 면장대회에 참여하였고, 그 후 13년 동안 도헌(都憲)으로 일하였다.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의 니콜라이 황제 대관식에 참여하였다. 1890년대 하반기 재러동포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지원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 연추지역은 조선, 중국, 일본과 관련된 러시아의 주요 군사지점으로서 다수의 러시아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막사 등 건축물과 이들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연료, 상품 그리고 이들을 먹일 육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특히, 의화단사건, 러일전쟁 등이 일어나자 더 많은 물류가 필요하게 되어, 큰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한 바실리 루키치(Хан Василий Лукич)와 한 옐리세이 루키치(Хан Елисей Лукич) 형제, 김 표트르 니콜라에비치(Ким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최 니콜라이 루키치(Цой Николай Лукич) 등의 재력가들과 의형제 관계를 맺었다. 자신의 조력가들과 상업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러시아 군(軍)에 대한 물품청부사업 등을 통해 성공적으로 물질적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다. 러일전쟁 후 1905년 말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데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을사늑약 체결로 인하여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데 더욱 놀랐다.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실상과 국제정세를 분명히 이해하고자 할 때에, 평소 “유신개혁 인물로 외국에 망명하여 세계대세를 통관하는” 인물로 알고 있던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두어 번 일본으로 올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바로 일본 도쿄(東京)로 향하였다. 일본에 반년동안 체류하면서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보았고, 세계정세의 흐름도 파악하였다. 그리고 박영효와의 만남을 통하여 국가의 위급함을 절실히 깨닫고 이에 민족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서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계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李範允)과 연락하여 함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쓰고자 하였다. 1908년 4월 동의회를 조직한 이후 총재로서 내외에 이 조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해조신문』에 그 취지서를 게재하였다. 동의회는 1905년 이후 러시아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총 망라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함께 한 중심인물은 이범진(李範晉), 이위종(李瑋鍾) 부자와 이범윤 등이었다. 많은 자산의 소유자였으므로 동의회의 조직과 운영, 활동에 드는 비용 대부분을 지출하였다. 러시아지역에서 한인들의 의병활동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8년 4월까지 연해주로부터 약 1천명의 의병이 함경도로 넘어들어 갔는데, 이 때 이범윤과 힘을 합해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부대를 100명 내외의 소부대로 나누어 비교적 일본수비대의 경비가 취약한 지점을 골라 산발적인 도강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국내진공에 성공한 각 부대는 함경도 갑산, 무산 등 예정 지점에 집결하여 장기적이며 항구적인 국내항쟁을 시도하였다. 한편 의병들의 국내진입에 국경지대의 일본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러시아 지역에 밀정을 파견하는 한편 군대를 전진 배치하여 재러의병의 국내진공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일본측의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이범윤과 함께 이끄는 연해주의병들은 6월말과 7월초에 두만강 하류에 있는 일본 소규모부대를 궤멸시키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활동은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일제의 러시아에 대한 외교와 이범윤 등과의 갈등 ・ 대립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하게 되어 1908년 하반기 이후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러시아지역의 의병이 이범윤, 유인석(柳麟錫) 등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정치적 망명세력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던 시기에 다른 재러한인 자산가계급과는 달리 의병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일제의 조선강점이 다가오면서 더욱 무장투쟁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무장투쟁노선에서 계몽운동방향으로 운동 노선을 전환하였다 1908년 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민족지 『대동공보』 사장으로서 언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장투쟁의 시기를 엿보았다. 『대동공보』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던 시기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11월 18일 창간하여 1910년 9월 1일까지 약 2년 동안 발행한 한글 민족지였다. 이 신문의 종지는 동포의 사상을 계몽하여 문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의 내용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국권회복,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관한 것이다. 재러한인의 권익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대동공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0년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신문 간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대양보』가 간행되자 신문의 발행소 건축에 기여하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일본에게는 최고의 경계대상이었다. 러시아 정부에 대한 일제의 끈질긴 외교적 간섭과 압박, 그리고 공작으로 인해서 한때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0년 러일협정 체결 이후 비밀첩자들을 통해 일본과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는 거짓정보를 날조해 흘렸다. 일본 첩보기관에 의해 기만당한 극동 대군관구사령부는 이러한 거짓선전에 근거를 두고 1911년 러시아에서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가 연해주 군무지사 스볘친(И.Н.Свечин) 앞으로 “본인은 한인 최재형을 애국자이자 러시아에도 충성스런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옹호하는 내용의 협조서신을 보냄으로써 가까스로 일단락되었다. 1911년 12월 19일,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후 망국민이 된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동포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였다. 1911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먼저 임시임원을 선출하였는데, 그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13년 10월 6일 특별총회에서도, 1914년 1월 19일 정기총회에서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4년 권업회는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이르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자 독립운동 지휘기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인들의 노령이주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그 시기를 이용하여 재러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인아령이주오십년 기념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행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개최될 수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좋아지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5년 8월 일본이 한인지도자 28명의 추방을 러시아측에 요청하였는데, 그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아울러 1916년 8월 러일신협약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주요 한인지도자인 김도여(金道汝), 이종호(李鍾浩)의 가택이 수색당할 때, 슬라뱐카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얀치헤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18년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는 한인회임시중앙총회에서 보고위탁을 받아 초청받은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대회에서 안건토의를 구성한 각 분과위원회 가운데 토지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간부선출에서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만장일치로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본군이 1918년 8월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침략해 오자 가족을 이끌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우수리스크 군회(젬스트보) 의원, 검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대한국민의회는 회장 문창범(文昌範), 부회장 김철훈(金哲勳), 서기 오창환(吳昌煥) 등의 명의로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또한 3월 중순, 국민의회가 이동휘를 선전부장에, 김립을 이동휘의 부관에 선임해서 이동휘를 간도방면에 파견해 독립운동의 선전 선동에 종사하게 하였을 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하게 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김신부로에서 이동녕이 의장이 되어 제1회 의정원회의가 개회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치 아니하였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연해주와 연흑룡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극동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쉬코토보, 포시에트, 기타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대대적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황카피톤)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기 전날 밤 몸을 피신하라는 가족들의 간청이 있었지만,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나는 일본군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당시 60세),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고 말하며 죽음의 상황을 준비하였다고 후손들이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최재형(관리번호:887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