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1899년 12월 8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현우면(縣右面) 한사리(寒寺里, 현 제천시 남천동)에서 태어났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동지회(同志會)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미국 유학을 목적으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후, 1923년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했으나 이민국 신체검사에 걸려 9월 8일 상륙 허가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도착 즉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가입해 의무금 5달러를 내었다.1928년 12월 25일 성탄절을 계기로 디트로이트(Detroit)에서 정안주식회사를 운영하며 활동하던 정양필(鄭良弼)을 비롯해 안재창(安載昌)·조오흥·유기원·전덕기 등과 동지회 지방회 설립을 준비하였다. 이어 1929년 3·1절 기념식 때 동지회 디트로이트지방회를 공식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초대 회장과 총무는 정양필과 조오흥이다.이후 뉴욕(New York)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어떤 학교였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1931년 3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산하 뉴욕학생회에서 뉴욕으로 오는 고학생들에게 직업을 주기 위한 조사위원을 선정할 때 안승만·오천석과 함께 3인의 조사위원에 선정되었다. 1931년 6월 5일 뉴욕한인교회에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동부연회가를 개최할 때 기부금으로 도왔다. 1927년 6월 뉴욕, 시카고(Chicago), 디트로이트 등지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실업가와 학생들이 한국인의 산업을 진흥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든 류미한인산업협회에 1932년 회원으로 활동했고, 그 해 11월 8인의 이사를 선발할 때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추천되었다.이후 1938년 6월부터 8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회가 운영하는 다뉴바 하기국어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중가주지역 3·1절 기념식을 거행할 때 순국선열추도문을 낭독하며 행사를 진행했고, 3·1성금을 의연하였다. 194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의무금으로 10달러, 그 이듬해 1월 광복군후원금으로 1달러를 의연하였다. 이어 1940년과 1941년 중가주(中加州)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때 독립운동약사를 발표하였다. 1941년도 대한인국민회 중가주지방회에서 서기와 실업위원으로 활동했고, 1941년 2월 1일 국민회(國民會) 창립 22주년 기념식 때 “국민회의 사명과 발전책”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1942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미국 국방을 돕기 위한 활동을 펼칠 때 25달러의 국방공채를 매입했고 같은 해 9월 3년 치 인구세 3달러를 비롯해 의무금 10달러, 『신한민보』 대금 5달러 등 각지의 공금으로 60달러를 의연하였다. 연로한 한인들의 노후를 위해 김중수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설립한 나성한인양로원을 위해 1939년과 1942년에 모두 15달러를 지원하기도 하였다.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개조 문제로 미주 한인사회에서 갈등이 표출하기 시작할 때인 1942년 12월부터 반(反)국민회로 돌아섰다. 그리고 1943년 5월 15일 다뉴바한인교회에서 동지회 중가주지방회를 결성할 때 회장 김형식, 부회장 송태은, 총무 정흥봉, 재무 김성대와 함께 서기로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 한인 전체 대표회를 개최해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를 논의할 때 이살음(李薩音)·김종림(金宗林)·송태은·송헌영(宋憲永) 등과 동지회북미지방총회를 대표하는 5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나 의견 불일치로 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1945년 5월 2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1회 동지회미포대표회에서 대회 의장 이살음, 부의장 윤병구(尹炳球)와 함께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 대회에서 기존 동지회의 명칭을 ‘대한민주당’으로 개정하기로 의결하자 7인의 규칙기초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에도 동지회북미지방총회 서기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대항해 회장 이살음, 부회장 송헌주(宋憲澍)로 구성한 ‘재미한인단체연맹’을 만들 때 윤병구·조극(趙極)·백인명과 함께 이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6년에도 동지회 남가주지방회 회장과 동지회북미지방총회 서기로 활동했고 그 해 나성지방 3·1절 기념식을 주관하였다.1948년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이주해 1949년과 50년에 한미무역회사를 사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동지회 릴리하Liliha지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적극 활동했으나 1957년 3월 탈퇴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