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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5월 22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청수면(淸水面) 원정리(遠井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산(海山)이고, 이명은 한자가 다른 정재관(鄭載寬)이다. 경성관립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3년 하와이 이민선 코리아호를 타고 그해 11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1년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고, 노동계약 만기가 되자 유학을 목적으로 1904년경 북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에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활동하면서 1905년 4월 5일에 결성된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멤버가 되었다. 그해 11월 창간된 공립협회 기관지인 『공립신문(共立新聞)』 발행인이자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6년 5월부터 1907년 4월까지 공립협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1907년 4월부터 1908년 2월까지 총무로 활동하다. 안창호가 1907년 2월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결성하고 한국으로 파견되자 안창호를 이어 공립협회 총회장 대리를 역임하였다. 1908년 2월 공립협회 총회장에 취임, 1909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창간 이래 유인물로 제작되었던 『공립신문』이 1907년 4월 26일자부터 활판인쇄본으로 제작되었을 때,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고 1908년 2월 『신한민보(新韓民報)』로 신문 제호를 바꾸었을 때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8년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찬양하는 발언을 쏟아내자 신문 보도를 접한 최유섭(崔有涉)·문양목(文讓穆) 등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동지 4명과 함께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로 찾아가 스티븐스를 힐문하고 사과와 정정을 요구하였다.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이에 격분하여 스티븐스를 구타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는 스티븐스를 “일본은 자유의 적이요, 수지분(스티븐스)은 공리의 적”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이후 스티븐스는 페리 부두 앞에서 장인환(張仁煥)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1909년 2월 북미 공립협회와 하와이 교민의 통일 단체인 한인 합성협회가 통합해 결성한 국민회에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1909년 4월 미국 순방 차 국민회를 방문한 헤이그특사 이상설(李相卨)을 이사로 영입하였다. 국민회 총회장으로서 같은 해 5월 1일 이상설과 함께 원동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었다. 앞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 공립협회원 이강(李剛)·김성무(金成武)와 합류해 원동사업을 추진하였다.
1908년 10월 설립되어 본사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둔 아세아실업주식회사(亞細亞實業株式會社)가 시작한 원동사업인 독립운동기지 개척 사업은 1909년 3월 출범한 태동실업주식회사(泰東實業株式會社)에 의해 승계되었고, 김성무 등과 함께 태동실업주식회사 대리인으로서 봉밀산((蜂蜜山)) 토지를 구입해 개척사업에 뛰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주필이 되어 언론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주 『신한민보』의 블라디보스토크 통신원 일을 겸하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계획을 의논하였고,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의 안중근(安重根) 의거가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합병한다는 소문이 돌자 한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인 독립의지를 천명하고 강제합병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8월 18일 신한촌(新韓村) 내의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약 150명의 한인들을 소집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유진률(俞鎭律)과 함께 성명회 선언서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어 이범윤(李範允)이 기초한 성명회 선언서를 다듬어 완성하였고, 이를 대동신보사에서 인쇄해 국내외 각지에 발송하였다. 연해주 독립운동가 8,624명이 서명한 성명회 선언서는 탄원서와 함께 세계 각국 정부로 배포되어 한인의 결연한 독립 결의를 천명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으며,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려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에도 박차를 가하였으나, 자금 문제로 기지개척 사업이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재미한인들의 투자를 받아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대인 지린성(吉林省) 밀산(密山) 부내에 위치한 봉밀산 토지를 구매했는데, 이는 재만한인사회와 재러한인사회를 연결할 수 있는 위치이며 넓은 평원의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 농업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강·김성무 등과 함께 봉밀산 개척 실무를 맡았다. 봉밀산의 개척사업은 거듭되는 흉년과 자금의 절대적 부족으로 계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실패하였다.
1910년 2월 10일 미주의 국민회(國民會)와 북미의 대동보국회가 조직 통합을 발표하고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확대 발전하게 되자, 시베리아 지방총회도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로 개편되었는데, 이강과 함께 러시아와 만주 일대를 순행하며 지방회 조직 구축에 노력하였다. 1909년 6월 4일 연해주지사에게 국민회를 합법적 조직으로 공인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 러시아 당국은 시베리아에 침투한 미국 기독교 세력이 공화주의를 전파하고 있다고 경계했기에 국민회 활동은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민회 조직과 재러 한인 거류민회와 연계해 민회대회를 개최하는 등 재러 한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베리아 지방에 국민회 지회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재러 한인 기독교청년회 찬성원으로 활약하며 세력 확대를 꾀했으나, 일찍이 러시아에 귀화한 귀화 한인들과 함북 출신의 의병파들과는 운동방법론 등의 차이로 갈등이 깊었다. 이에 1911년 10월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자바이칼주 치타로 옮겨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1912년 12월 19일 귀화 한인 세력이 중심이 되어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권업회 교육부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은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러시아 영내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러시아 당국이 전시계엄령을 발표하고 한인들의 단체 활동을 일체 금지시키는 와중에 대한인국민회 또한 해산되었다. 1914년 12월 초 이강과 함께 러시아헌병대에 붙잡혔으나, 1915년 1월 22일 석방되었다.
1915년 2월 8일 수청(蘇城·파르티잔스크)으로 이주해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귀화를 결심하였다. 일제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러시아 영내에서 추방시켜 조선총독부로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16년 2월 러시아군에 자원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군 복무를 마치고 1918년 3월 연해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18년 7월 일본 등은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해 동부 시베리아 요지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1만 2천명의 대군을 시베리아에 파견해 볼세비키 정권을 위협하였다. 이에 1918년 7월 21일 항일운동가 39명과 함께 니콜리스크에서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방해할 것을 결의하고 무기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이르쿠츠크에 있는 독일 첩보본부로 찾아갔다. 독일 및 볼세비키 정권과 제휴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면 일제를 패망시킬 수 있다는 전략을 가지고 교섭을 진행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918년 10월 신한촌에서 발간된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의 사장으로 취임해 신문사 사옥 건축과 활자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니콜리스크에서 전러한족중앙총회를 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논의했으며, 1919년 3월 미주·만주·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함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할 때 39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25일부터 3월 초까지 러시아 각 지역과 서간도·북간도로부터 온 주요 단체 대표 8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상설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연해주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조직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노인동맹단(大韓人老人同盟團) 강우규(姜宇奎)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1920년 만세운동 1주년을 맞이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기념식이 개최되었을 때, “오늘의 독립선언기념회는 우리가 최후의 선전을 하는 날이다. 일반 동포들이 총과 칼을 가지고 일어나서 날마다 오늘부터 무기를 준비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하자”라고 연설하였다. 1920년 4월 대한신민단 단장 김규면(金圭冕)·김경천(金警天)과 함께 마적 토벌을 위해 장정을 모집하고 병기를 준비해 1921년 창해소년단(滄海少年團)을 조직하였다. 창해소년단은 수청 지역을 3개 지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지휘관·참모·병사들을 배치했는데, 단장 김규면과 총지휘관 김경천과 함께 참모장으로서 러시아혁명군과의 합동 작전을 준비하였다. 창해소년단 수비지역 내에서 군정과 민정이 실시되었을 때, 민정 총책임을 맡아 치안을 담당하였다. 둔전병제를 실시하고 매년 매호마다 10원씩의 인두세를 거두어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민족교육을 실행하였다. 같은 해 7월 이만에서 한인 무장유격대 부대들의 지휘관회의가 열렸을 때,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같은 해 8월 한창걸(韓昌傑)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군사부위원으로서 빨치산 한인혁명군(韓人革命軍)을 조직하고, 치타정부 및 볼셰비키군이 일본군이나 백군과 전투할 때에 볼셰비키군을 원조하기로 하고, 치타정부는 한인혁명군에게 총기·탄약·군자금을 보조해 주기로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
수청에서 빨치산부대를 지도하면서 병을 얻어 1922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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