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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0047
성명
한자 金萬謙
이명 金萬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5 훈격 애국장
1910년 성명회(聲明會)의 회원, 1911년 블라디보스톡 한족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7년 우스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고, 1919년 2월 동회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발전하자 여기에 참여하는 한편, 3·1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의 번역·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고, 동년 11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재형(崔才亨)·김좌두(金佐斗)·김규면(金奎冕)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였고, 1920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부회장(副會長)에 피선되어 활동하다 4월참변후인 5월 중국 상해로 이동하여 이동휘(李東輝)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동휘와 결별하고 1921년 7월 경 이르크츠프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책임비서로 활동하면서 『공산(共産)』, 『신생활(新生活)』등의 잡지를 발간하였고, 1921년 5월 국민대표기성회 위원, 1922년 7월 時事策進會(시사책진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고려혁명군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2년 말부터 1924년 초까지 꼬르뷰로의 위원으로 1927년 1월 러시아공산당 블라디보스톡 집행위원회 고려부의 수석위원으로 재러한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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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그는 어려서 한국 전통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조선인 소학교를 마친 뒤, 블라디보스토크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에 참가한 바 있는 그는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여 성명회(聲明會)가 발표한 선언에 서명하는 등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한 러시아신문『달료까야오끄라이나[邊境]』서울 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조선침략정책 비판 기사를 쓰다가 강제 추방당했다.

1916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17년 5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대표자회(全露韓族代表者會)가 열릴 때 참가했으며,『청구신보』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을 적극 지지·옹호하는 글을 다수 발표하는 한편「기미독립선언서」를 러시아로 번역하여 3·1운동을 알리는데 노력했다.

1919년 4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이르쿠츠크파)을 조직했으며, 동년 1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좌두(金佐斗)·김규만(金奎冕) 등과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했다. 1920년 3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부의장으로 선출된 후 5월 중국 상해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20년 11월 상해에서『공산(共産)』, 1921년에는『신생활(新生活)』등의 잡지를 발행했으며, 동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총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5월 12일 국민대표기성회(國民代表期成會)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 19일 상해민단(上海民團)의 의사원(議事員)개선 때 본구(本區)에서 선출되었다.

1922년 초에는 고려공산당으로 형성된 무장군대에 참가하였고, 동년 7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 그는 1927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현(浦鹽縣) 집행위원회 고려부 수석위원으로『고려농민(高麗農民)과 당사업(黨事業)의 개황(槪況)』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고려인(한인)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연해주소비에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9년 소련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在浦鹽露國新聞의 通信員(鮮人) 京城派遣의 件(朝憲機 第2264號, 1911. 10. 1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3)
  • 東亞日報(1922. 6. 19·6. 23)
  • 韓國民族運動年鑑(東文社, 1946) 167면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 騎驢隨筆(宋相燾, 1955) 243·245·247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2권 144·148∼149·430·440·447·452·471면,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6) 제3권 456·474·487·494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1971) 제27권 167면
  • 韓國民族運動史料(국회도서관, 1976) 中國篇, 275·289∼290·330·338·354·356∼357·363·500면
  •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4권 4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1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만겸 러시아명 : 세레브랴코프 이반 스테파노비치(Серебряков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이명 : 세울로프(Сеулов) 노령 연해주 포세트구 브루시마을 성명회 선언, 연해주 3.1운동, 연해주 4월참변
본문
러시아정교 세례명은 세레브랴코프 이반 스테파노비치Серебряков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이며, 이명은 세울로프Сеулов로 서울의 러시아어 발음에서 따왔다. 러시아령 연해주 포세트구 브루시 마을에서 태어났다.단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86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는 의견이 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뒤, 마을의 한인 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 시립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내 지나이다 그리고리예브나 김-세레브랴코바Знаида Григорьевна Ким-Серебрякова와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립중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5-1906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러시아 원동의 한인들 사이에서 전개되던 항일운동에 가담해 항일 문화계몽단체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1906년 하반기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여 발표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1년 10월 초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진보적 신문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Далекая Окрайна』의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912년 4월까지 15회에 걸쳐 「조선으로부터의 편지Письма из Кореи」를 연재하며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을 비판하다가 7개월 만에 추방당하였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권업회(勸業會)’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14년 거행될 예정이던 ‘한인의 노령 이주 50주년 기념행사’의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우수리스크주 국경위원회에서 통역으로 일하였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이후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아지미읍 농민대회에서 읍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5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두고 기관지로 『청구신보(靑邱新報)』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신문의 편집인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와 신한촌의 한민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12월 29일 실시된 블라디보스토크 시의회 의원선거에서 한용헌과 함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한인들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반일 시위를 일으켰다. 박은식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의 러시아어 번역본 교정을 맡았으며, 독립선언서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공사관에 배포하였다. 그해 겨울 이용·김좌두·김하석·김규면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 ‘독립단’을 조직했고, 신한촌의 한인민회를 재편한 한인지방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1920년 2월 장도정·전일 등의 일세당이 이름을 바꾼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러시아 혁명정부 당국자들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공사 그리고 각 신문사 대표를 초청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기념식 후 연회에서는 한인들을 대표하여 3·1운동의 의의와 한인의 혁명운동을 소개하고 러시아 정부의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0년 4월 4일 일제가 ‘연해주 4월참변’을 일으키자 지하에서 한인 빨치산부대를 러시아 빨치산부대 및 지하조직과 연결시키고, 선전선동문을 작성하여 일본 군대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부랴트혁명운동의 지도자인 사히야노바М.М. Сахьянова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제국주의간섭군과 백군들이 점령한 엄혹한 환경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동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김만겸 동무를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한인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위임받은 모든 일들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점차 나와 좋은 동지적 관계를 맺어나갔다.” 1920년 5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 원동전권위원 빌렌스키의 지령에 따라 보이틴스키와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에서 보이틴스키와 함께 코민테른 동아비서부를 결성하고 산하 고려부의 사업을 총괄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던 이동휘 등의 한인사회당 성원들과 협력하여 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상하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여운형·조동호·안병찬·최창식 등도 참여했다. 한인공산당은 잡지 『신생활』과 『공산』을 출판하고,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또한 상하이의 한인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기도하여 노동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대회에 한인공산당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상하이에 ‘고려공산당 상해지방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다. 1922년 3월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의 다나카 대장 암살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될 위험에 처했으나, 자신의 집 2층에서 뛰어내려 도피하였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했으나, 이르쿠츠크파 대의원들과 함께 집단으로 퇴장하였다. 이후 치타에서 별도의 당대회를 개최하고, 당대회에서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12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이르쿠츠크파의 입장에서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을 정리한 문건인 “Краткий очерк о корейском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м движении (История образования Иркутской и Щанхайской групп, 「조선공산주의운동 약사(이르쿠츠크그룹과 상해그룹 형성의 역사)」)”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직후 한국 문제를 토론하고자 조직된 조선문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제위원회는 국내외에 소재하는 모든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지휘하여 통일된 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해 코민테른 동방부 산하에 ‘고려총국(코르뷰로)’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924년 2월까지 1년 동안 존속했던 고려총국의 회의에 연해주지방정부 한인문제전권위원의 자격으로 출석하여 한인의 단일혁명전선과 단일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러시아에서 내전이 종결된 후 1923년부터 연해주 지방정부에서 한인문제전권위원으로 활동하며 연해주 한인들의 입적 문제, 토지 문제와 여러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과 문화계몽에 힘써 1924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도시와 농촌의 한인 마을에 많은 초중등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연해주 일대 즉,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이만, 하바롭스크, 수찬, 올가 그리고 포시예트 등지에 한인문제전권위원직을 설치하였다. 1929년부터는 당사업과 함께 극동국립대학 교수직을 겸임하였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사범대학을 설립하는 데 관계했으며, 사범대학 교수로 한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2년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조선극장에도 관계하였다. 1935년 11월 22일 ‘외국 정보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라는 혐의로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에 붙잡혔다. 1936년 7월 10일 내무인민위원회 산하 특별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사범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블라디보스토크 7년제 중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가족과 함께 카자흐스탄 악튜빈스크주로 옮겨갔다. 카자흐스탄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8년 5월 28일 다시 카자흐스탄 내무인민위원회에 붙잡혔다. ‘소련에 반대하는 첩보 파괴 활동에 대한’ 1938년 10월 7일자 알마타주 내무인민위원회 트로이카Тройка의 결정에 따라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고는 다음 날인 10월 8일 집행되었다.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8년 6월 9일 투르크스탄군관구 군사법정에 의해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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