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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高明秀
이명 高明守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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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14 훈격 애족장
1918년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독립을 목적으로 자금과 동지를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1921년 러시아 자유시(自由市)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제2중대(中隊) 중대장(中隊長)으로 활동했으며,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우르간의 한인분대 소속으로 참석하고, 1923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선전부장(宣傳部長)에 선임되고, 동년(同年) 1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의 무장해제 후 향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지방대회에 참석했으며, 2월 노령의병대(露領義兵隊) 부관(副官), 4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혁명중앙부(革命中央部) 군사부(軍事部) 산하의 특립군대(特立軍隊) 제1연대장(聯隊長), 7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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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2권(2016년 발간)

1918~1923년 러시아에서 니항군대 부관, 고려혁명군 중대장, 고려공산당 혁명중앙부 군사부 산하 특립군대 제1연대장, 공산청년회 재무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8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이흥삼(李興三) 등과 함께 독일의 후원으로 러시아 극동에 파병된 일본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1919년 10월 독립군 부대에 입대한 후 1921년 니항군대(泥港軍隊) 부관(副官)으로 극동공화국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일명 自由市)에 도착하여 고려혁명군 제2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우르간의 한인분대 소속으로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고려혁명군 본부의 명령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이후 소집된 지방대회에 고려혁명당 선전부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3월 러시아 적군(赤軍)으로 편입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당 혁명중앙부 군사부 산하의 특립군대(特立軍隊)가 편성되자 특립군대 제1연대장이 되었다. 6월에는 공산청년회(共産靑年會) 재무부장으로 고려공산당 간부 및 민회(民會)와 밀접한 연락을 갖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東亞日報(1923. 4. 19)
  • 露領 니콜리스크 附近의 排日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1918. 8. 28), 圖們江對岸 露領情況彙報(1918. 9. 4), 時局에 對한 在外 不良鮮人의 情況 續報(1918. 10. 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7)
  • 露領에 있어서 不逞鮮人團 武裝解除의 眞相(1923. 1. 12), 露支領 不逞鮮人의 義兵隊編成에 關한 件(1923. 2. 24), 鮮人 武裝團의 朝鮮國境 侵犯計劃 및 鮮人 軍隊編成에 關한 件(1923. 4. 2), 新韓村 一般狀況에 關한 件(1923. 7. 2), 러시아 側의 日露問題에 關한 共産黨 및 鮮人共産黨 取締에 關한 件(1923. 7. 1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4)
  •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의 送付에 關한 件(1923. 7.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4)
  • 獨立運動史料 러시아編(국가보훈처) 제5권 357~358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77) 35 러시아篇 ⅱ 43~44면
  • 초기사회주의자들의 군사활동-고려혁명군을 중심으로(임경석, 국사관논총 제75호, 1997) 36~6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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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명수 高明守, Го Мён-Су 황해도 황주(黃州) 자유시참변,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본문
1882년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미상이다. 이명으로는 고명수(高明守)·고명수(Го Мён-Су)가 있다. 망명하기 전까지의 유년 시절과 수학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1910년 이동휘(李東輝)의 지시로 ‘기독교 포교’라는 명목으로 이른바 이동휘의 ‘교육생’들을 탈출시킬 때 함께 북간도로 넘어갔다. 이때 함께 넘어온 이는 계봉우(桂奉瑀)와 오영선(吳永善)·남공선(南公善)·마진(馬晋) 등 30여 명이다. 황해도 황주 출신이지만 이른바 이동휘의 ‘교육생’들이라 불리는 추종자들과 함께 북간도로 넘어간 것을 고려한다면, 기독교나 서북학회(西北學會) 등 이동휘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함께 넘어온 이들이 1913년 옌지(延吉)와 허룽(和龍), 훈춘(琿春), 왕칭(汪淸)의 4현을 중심으로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여 북간도 한인들 간에 민족애와 항일 의식을 크게 고취하고 있던 것과 달리, 이 무렵 북간도를 떠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11년 권업회(勸業會)가 설립된 후 1912년 8월 권업회 주최로 개최된 만수절(萬壽節) 기념회에 의연금을 기부하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만수절은 고종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권업회는 1911년 11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다. 권업회는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표현으로, 외부적으로 실업과 교육의 권장·장려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일 구국 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적 조직으로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간행하고 각종 기념일에 행사와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민족 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의 단결과 지위 향상에 힘썼다. 1914년 5월 권업회 니콜라옙스크(николаевск, 니항(尼港)) 지회가 설립되자 검사원으로 임명되어 권업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여 1920년 2월 일본 제14사단 보병 2연대 3대대가 니콜라옙스크 항구를 점령하자 소련 적군(赤軍)이 포위 공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 협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본군이 3월 협정을 위반하고 기습에 나서자 한인들은 독립군을 박일리야(朴一, 박윤천) 중심으로 편성하여 소련 적군과 함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전투 후 박일리야가 이끄는 380명의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하였고,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였다. 박일리야가 니콜라옙스크에서 한인 독립군을 조직하였을 때 독립군에 합류하였다. 그해 5월 일본 구원 부대가 니콜라옙스크를 공격하자 러시아 적군과 박일리야의 독립군이 일본인 포로와 반혁명파 러시아인을 살해하고 후퇴한 니콜라옙스크 사건(니항사건, 尼港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사할린의용대는 아무르주 마자노프(Мазанов)로 이동하였다. 1921년 3월 마자노프에 주둔 중 사할린의용대는 한인 무장 부대를 통일하기 위해 극동공화국 치타주 공산당 한인부와 협력하여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를 열고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고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르쿠츠크에서는 전로고려공산단체 중앙위원회의 주도로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따로 구성하고 고려혁명군을 편성해 상해파의 전한군사위원회와 대립하였다. 곧이어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코민테른으로 이관되고, 극동공화국 한인부가 해체되자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에 부속된 모든 조선인 부대를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편입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편입에 반대하는 대한의용군이 만주 지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양자 간 타협이 이뤄져 자유시(自由市, Свободный)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두 군사력의 통합 과정에서 다시 결렬되어 고려혁명군 측이 극동공화국 수비대와 함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대한의용군을 공격하면서 이해 6월 자유시참변이 발발하였다. 이때 니항군대에서 임호(林虎)와 함께 사할린의용대로부터 이탈하였다. 이 시기 다른 부대에서도 많은 독립군이 사할린의용대에서 이탈하였다. 이탈한 주요 독립군들로는 이만 군대의 김표돌과 채영(蔡英), 홍범도(洪範圖) 부대와 안무(安武) 군대, 최진동(崔振東) 등이 있다. 이때부터 이르쿠츠크파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고려혁명군정의회와 고려혁명군은 1921년 8월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편제를 재편하였는데, 이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후보당원으로 입당하였고, 고려혁명군 제2중대 중대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우데Улан-Удэ)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우르간광산 한인분대원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르쿠츠크파로서 활동하였다.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는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로 일제강점기에 개최된 사회주의자들의 회합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회였다. 이 대회는 한국의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이 통일 공산당을 조직하려고 개최한 것이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923년 고려공산당 선전부장에 선임되고 그해 1월 고려혁명군의 무장 해제 후 향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지방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2월 노령의병대(露領義兵隊) 부관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고려공산당 혁명중앙부(革命中央部) 군사부(軍事部) 산하의 특립부대(特立軍隊) 제1연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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