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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4월 15일 러시아 연해주 올긴스크군 니콜라예프카(Николаевка)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러시아 이름은 박 이반 표도로비치(Пак Иван Федорович)이고, 필명은 이반 고젠스키(Иван Гоженский·춘우(春宇)·Чуну)이다. 이명은 한자가 다른 박진순(朴鎭淳), 그리고 박치순(朴致順)을 사용하였다. 니콜라예프카는 마을을 개척한 김 니콜라이(한국명 김공심)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지명으로, 한인들은 신영동(新營洞)으로 불렀다.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의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초기 한인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현실 운동과 함께 저술 작업을 통해 한국에 혁명 운동을 전파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어려서는 양반 가문 출신의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1년 블라디미로-알렉산드로프카의 러시아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진보적인 교사 야로멘코(Yaromenko)로부터 사상적 감화를 받고 혁명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1916년 졸업 후 시지미 마을의 한인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회 비서, 한인병사동맹 비서 등을 지냈다. 그 해 6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에서 소비에트 권력과 볼세비즘을 지지하는 소수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1월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여호인(餘戶人, 비귀화 한인)과 망명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개최된 ‘아령한인회 대표자 대회’에 참가하였다.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참가하여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6월 13일부터 24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제2회 전로한족 대표자 대회에 참가하여 한용헌(韓容憲)과 함께 하바롭스크 소재 원동 인민 위원회 외교부 파송 대표로 선정되었다. 6월 29일 체코군의 봉기가 일어나 연해주 일대를 백군(白軍)이 점령한 후, 올가(Olga) 지역에서 빨치산 운동에 가담하였다.1919년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부근 삼림(森林)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회는 한인사회당과 김규면(金圭冕)이 조직한 반일 민족주의 단체 신민단(新民團)의 통합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연해주의 한인 무장 투쟁을 발전시킬 것을 결정하고, 곧 조직될 예정인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한영(李翰榮)·박애(朴愛)와 함께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로 선출되었다. 대회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7월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1919년 11월 말 혼자서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박애와 이한영은 중도에 옴스크(Омск)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당지의 적군(赤軍) 5군 야전 병원에 입원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출석하여 한인사회당의 조직 배경과 4월 당대회 결과를 밝힌 보고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е движение в Корее)」을 제출하고 코민테른 가입 의사를 밝혔다. 요청은 수락되었다. 보고서는 코민테른의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날(Коммуниситическ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에 게재되었다.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7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와 한국 독립운동 사이의 연대를 표명하였다.1921년 1월 중에 러시아 정부 외무 인민 위원부에 편지를 보내 러시아 혁명과 아시아 피압박 민족들과의 국제적 제휴에 관한 원칙적, 이론적 문제들을 논하고, 동아시아에 사회주의 문헌 출판사와 사회주의 선전 사무국을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요청하였다. 외무 인민 위원부는 그 요청을 수용하여 400만 루블을 제공하였다. 뒤늦게 모스크바에 도착했던 박애와 이한영이 4월 중순 이 자금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한편 1920년 5월 말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 한형권(韓馨權)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한형권을 도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6개조로 이루어진 비밀 군사 협정인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이 체결되었고, 금화 200만 루블을 제공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7월 19일부터 8월 7일까지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의결권을 가진 정식 대의원으로 참가하였다. 민족·식민지 문제 위원회에 배속되어 그 문제에 대해 연설하였다. 대회 마지막 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코민테른 재외 전권 위원(Заграничный уполномоченный Коминтерна)’으로서 동양 혁명을 촉진할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혁명가들의 연합 기관인 ‘동양공산당’ 결성 임무를 부여받고 9월 초 한형권과 함께 귀환 길에 올랐다. 또한 러시아 정부가 원조하기로 한 금화 200만 루블 중 40만 루블을 받아 운송하였다. 귀환 도중 10월 3일부터 11일까지 옴스크에서 개최된 ‘제1회 전로고려인대회’에 발기 회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베르흐네우진스크(Верхнеўдинск, 현 울란우데)에서 한형권을 모스크바로 돌려보내고 김립(金立)과 함께 모스크바 자금을 가지고 상하이로 출발, 몽골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12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1921년 4월 1일 이동휘(李東輝)·김립·김규면과 함께 ‘제3회 한인사회당 대표회’ 소집 통지서를 공표하였다. 이에 따라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대표회가 소집되었다. 대표회에는 한인사회당 세력과 국내의 사회혁명당 세력을 중심으로 기타 공산당, 노동자 단체 대표들이 참여하였다. 대표회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할 최고 기관인 고려공산당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고 중앙 집행 기관인 중앙총감부 위원을 선임하였다. 이동휘(위원장)·김립(비서부장)·김철수(金錣洙, 재무)·최팔용(崔八鏞)·이봉수(李鳳洙)·장덕수(張德秀)·홍도(洪濤, 본명 홍진의)·주종건(朱種建)·김하구(金河球)·한형권·김규면·이용(李溶) 등과 함께 중앙총감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외에도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위해 이동휘·홍도와 함께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참여할 전권 대표로 선정되었다. 대회가 끝난 지 약 1달이 지난 6월 18일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파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시베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이동휘·이극로(李克魯)와 함께 해로로 유럽을 통해 모스크바로 향하였다.한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 전권 위원으로서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21년 5월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을 포괄하는 동아총국(동아공산당 연맹)의 조직을 추진하였다.상하이를 떠난 지 석달이 지난 1921년 9월 16일 러시아에 입국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방문하고 민족혁명당과 고려공산당 창립에 관한 보고문을 제출하였다. 대표단의 노력으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내에 자유시 참변을 비롯한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분쟁 문제를 다룰 한국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1월 28일 대표단의 일원인 이동휘·홍도 그리고 이동휘의 비서 겸 통역인 김 아파나시 아르세녜비치(Афанасий Арсеньевич Ким, 본명 김성우)와 함께 크레믈린에서 레닌(V. Lenin)과 회견하였다.1921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 민족 대회에 상해파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참가하고자 하였으나 이르쿠츠크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22년 4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 한국위원회의 결정으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두 고려공산당의 당내 투쟁에 개입한 책임을 지고 박애·최고려(崔高麗)·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양당 연합이 달성될 때까지 3개월간 당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1922년부터 1925년까지 모스크바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간도에서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 활동에 관여하였다. 이때 김철산(金鐵山)을 통해 천도교와 관계를 맺고 『개벽』에 춘우(春宇)라는 필명으로 다수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1926년 조선농민사의 위임을 받아 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가입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보고자로 일하였다. 3월 조선공산당 2차 당대회를 마치고 코민테른에 파견된 김철수를 맞아 러시아어 통역으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의 교섭에 임하였다.1927년부터 1928년까지 아카데미철학연구소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모스크바의 여러 고등 교육 기관들에서 철학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의하였다. 1929년에 간도에서 조선공산당재건 준비위원회 기관지 『볼세비키』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1936년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외국인노동자출판사 조선과에서 교정 편집자로 일하였다. 1937년 테러 단체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12월 15일 체포되어 1938년 소련 최고 재판소 군사 협의회에서 최고형을 받고 그해 3월 19일 총살되었다.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 재판소 군사 협의회에 의해 복권되었다.저술로는 코민테른 기관지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실린 두 논문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1919)과 「혁명적 동방과 코민테른의 다음 과제(Следующая задача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Востока и Коминтерна)」(1920)가 있고, 1923년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원동에서의 혁명(Революция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에 이반 고젠스키(Гоженский)라는 필명으로 수록된 「원동 혁명 운동에서 한인 이주민들의 참여(Участие корейской эмиграции в революционном движении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가 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개벽』에 다음 5편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세계농민운동의 과거와 현재」(63호, 1925. 11), 「소위 ‘지식계급의 신운동(新運動)’」(64호, 1925. 12), 「일본제국의 현재 경제정책과 조선」(65호, 1926. 1), 「조선사상운동자들의 계급적 조성을 추구하면서, 조선의 숙려」(71호, 1926. 7),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제농촌학원」(72호, 1926. 8). 1926년에 크레스틴테른의 기관지 『크레스틴테른(Крестинтерн)』에 「조선혁명 7주년에 즈음하여(К 7-й годовщи́не революции в Корее)」를 게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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