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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97
성명
한자 韓始大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6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2년 하와이로 이주 신민회(新民會)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1919년 이후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으로 송금하였으며, 1936년 미국(美國) 로스엔젤레스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관(總會館) 건축위원(建築委員), 1937년 광복진선(光復陳線)미주(美洲) 애국단(愛國團) 간부(幹部)참여(參與),1940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집행위원장(執行委員長),1941년 해외(海外) 한족대회(韓族大會) 부의장(副議長),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집행부(執行部) 위원장(委員長), 1944년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부위원장(副委員長) 등으로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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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황해도 해주(海州)사람이다.

1902년 유년시절 하와이로 이주하여 중학교를 마친 뒤 미 본토로 도항(渡航)하여 캘리포니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농촌생활을 동경하여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지방에서 한인 60여명과 함께 1300에이커의 농지를 조차(組借)하여 그 중 150에이커의 땅에 사탕무우 농사를 시작한 뒤 30여년간 노력하여 1950년 중반경 약 40만불에 상당하는 한가기업회사(韓家企業會社)를 설립하여 재미한인사업가로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재력을 바탕으로 그는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연합국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를 개최하자 동 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호소하였으며 같은 해에 중국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36년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代表者會議)에 참석하여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재건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이때 대한인국민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데 헌신하였다. 또한 미주에서 애국단(愛國團)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을 기회로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주 등지에서 산재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등 6개 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진강(鎭江)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활동하면서 8년간 적극적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이듬해인 1940년 1월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된 그는 임원들과 상의하여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 한족대회(韓族大會)를 개최하자,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 부의장(副議長)으로 선출되어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결의안을 작성하는 한편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로스엔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가 설치되자, 집행부위원 및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 일본인과 동일시 취급되는 한국인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 뱃지 착용제를 실시하여 한인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해 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동 대회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개조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그해 조국의 재건 후원을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의 단장으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42년만에 조국의 땅을 밟았으나 당시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미국에서 예전부터 활동해 오던 흥사단(興士團)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일평생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3권 530·782·81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66·671·67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49·3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하권 29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6권 1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671·102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한시대 - 황해 해주(海州) -
본문
1889년 9월 18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에서 한준상(韓俊相)과 문성선(文聖善)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9월 4일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박영숙(朴瑛淑)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동생 한영대(韓永大)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1906년 한인기숙학교가 개교할 때 입학하였다. 한인기숙학교는 하와이 한인과 하와이 감리사의 도움으로 개교하였다. 1909년 9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밀스(Mills)학교로 전학하였다. 밀스학교는 1892년 중국인 남학생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한인들도 다수 수학하였다. 1913년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로웰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한 다음, 동생과 함께 졸업하였다. 박영숙과 혼인한 후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Mantica) 지방에서 한인 60여 명과 사탕무 농사를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50에이커 규모의 농장으로 멘티카 한인 농장 중에서 두 번째로 컸다. 다뉴바(Dinuba)와 딜레노(Delano)에서 포도농사와 채소 농장 등으로 확대하는 등 30여 년간 농장 사업을 지속하여 한가기업회사(韓家企業會社)를 설립하는 등 성공한 한인 농업인이 되었다. 1916년 4월 부친 한준상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멘티카지방회에서 부친이 초대 회장에 선임되면서 법무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 다뉴바로 이주하여 10월 7일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에는 다뉴바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였다. 1918년에는 홍언(洪焉)과 의안존발위원으로 북미지방총회에 관여하였다. 또한 새해 사업인 󰡔신한민보󰡕 신식 식자기계 변경과 재미한인의 유학 장려, 한글 사용을 장려하고 버클리(Berkeley)에 한인학생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민족교육 강화를 위해 힘썼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맞춰 대표자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또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의연금 등 모금활동을 전개하자, 이때 가족 전체가 큰 금액을 납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의 지원으로도 이어졌다. 1921년 2월 27일 사병순(史秉淳)과 함께 구미위원부 다뉴바지방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1,750달러를 모금해 구미위원부에 전달하였다. 이 외에도 부모형제 및 배우자 명의로 특별외교비를 지원하였다. 1921년 11월 25일 국민대표회기성회 결성에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지지하였다. 1924년에는 다뉴바한인국어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한인 2세대들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1930년 7월 14일 부친 한준상이 국어학교인 태극학교를 설립할 때 재정지원과 더불어 자신의 집을 학교 건물로 제공하였다. 1931년 6월 13일에는 교감이 되었다. 1930년 9월 21일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1932년까지 회장으로 3·1운동 기념식과 국치일 기념식을 거행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만주사변 발발 이후에는 만주의 한인과 중국의 항일전쟁을 후원하였다. 1935년부터 딜레노 대의원으로 대한인국민회 총회 본부와 교류하며 한인사회의 현안을 해결하였다. 1936년 5월 김정진·송태은과 발전책실행위원에 선임되었고, 딜레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인사회의 통일과 국민회 중심의 합동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김호(金乎)가 추대될 때 송종익(宋鍾翊)과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1·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차 대표대회에서 대회 의장으로 9개 조의 의안을 의결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신축 당시 건축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황사용(黃思溶)과 검사원이 되어 신축에 도움을 주었다. 별도로 200달러의 신축자금을 기부하였다. 1939년 4월 6일 대한인국민회 국어교과서 편찬위원장에 선임되어 교과서 편찬경비 모금 등에 노력하였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동생인 한영대는 구제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한민보󰡕의 새로운 식자기계 구입을 통해 신문 발간을 원활하게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을 후원하였다. 1940년 4월 20일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재미한인사회를 결집시키고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미주 9개 단체 대표가 모였다. 부의장에 선출되어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이 결의안에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주미위원부 설치, 미국 국방공작의 원조, 독립자금으로 재정통일, 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이 담겨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1일 미국이 일본에 승리하여 한국 광복의 기회가 올 수 있도록 미국을 돕자는 내용의 특별포고를 발표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 및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에 다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44년과 1945년에는 집행부 위원장에 선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1944년 10월 28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인전체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주석으로 전체대표대회를 주관하여 주미외교위원부의 새로운 집행부를 조직하였다. 새로운 집행부에 김원용(金元容)이 위원장으로 선임 될 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대회 결과를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받아들지 않자 1944년 6월 개별적으로 워싱턴사무소를 설치해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4월 국제연합창설대회가 개최되자 집행부 위원장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연합 창설대회에 대응하는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대표단과 통합하여 한인대표단을 만들어 이승만과 공동으로 “식민지 민족의 자유와 국권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조직의 창설을 지지한다”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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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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