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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77
성명
한자 鄭斗玉
이명 Doo Ok Chung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14년 대한인국민회 와일엘누아 지방총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박용만이 주도하던 대조선(大朝鮮) 국민군(國民軍) 사관학교(士官學校)의 운영에 관여하였으며, 1919년 미국(美國) 하와이에서 박용만(朴容萬) 등이 창립(創立)대조선(大朝鮮) 독립단(獨立團) 단장(團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21년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후원(後援)목적(目的)으로 대조선(大朝鮮) 국민대표(國民代表) 기성회(期成會)조직(組織)하였고,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자 국민회 조직 내에서 공동회(共同會)를 소집하여 공동회(共同會) 내에 선전부(宣傳部)를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후 하와이의 중국인(中國人)들과 연계하여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지부(支部) 집행위원장(執行委員長)을 맡아 원동(遠東)특무공작(特務工作)후원(後援)하였고, 1941년 워싱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결성(結成)되자 의사부(議事部) 위원(委員)을 맡아 조국(祖國) 독립운동(獨立運動)헌신(獻身)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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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1903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간 후 일찍부터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부상하여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14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지방총회 와이엘누아지방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동년 6월 하와이 지방총회 연무부(演武部) 사업의 일환으로 박용만(朴容萬)이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창립하자, 적극 후원하였다.

1918년 7월 박용만이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한 갈리히연합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여 박용만의 정치노선을 지지하였으며, 1919년 3월 박용만이 국내와 원동(遠東)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결성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총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 박용만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 원동의 군사단체들과 연락하여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자, 같은 해 10월 하와이 대조선국민대표기성회(大朝鮮國民代表期成會) 위원으로 최고의 독립운동기관을 설립하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군사통일회의 운동노선과 자금 후원을 적극 조달·지원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내에 공동회(共同會)를 소집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촉진하는 선전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공동회 내에 선전부(宣傳部)를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기관지인 「국민보(國民報)」의 주필로도 활동하면서 동포의 문맹퇴치와 자녀들의 교육 장려, 조국의 독립운동 선전 등에 힘썼다.

1939년 로스엔젤레스에서 김창순·이창의 등의 발기로 국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한미문화협회가 발족되고 이어 미국 워싱턴에 문화회관 건립이 추진되자 문화회관 건설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와 동시에 1940년 5월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후원할 목적으로 하와이 오아후지방에서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원동의 특무공작과 한국 광복군 편성의 경제적 후원을 담당하였다.

한편,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였는데, 동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를 설치하자, 의사부 위원 및 선전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 시기 하와이 지역 중국사람들과 연대하여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을 결성하고 단장에 취임하여 중국과 연대한 항일투쟁 전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후 1943년 9월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인 동지회(同志會)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역시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워싱턴에 개설하고 그를 외교원으로 선임하자 이에 부임하여 외교사무를 전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을 돕기 위해 정보수집 임무 등을 자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어 그 해 10월 조국의 재건 후원을 목적으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이 구성되자, 하와이 한국독립당 총지부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1946년 1월 하와이를 출발하여 2월 고국에 도착하였다. 고국에 도착 후 김구 등과 접촉하고 중도노선을 추구하며 온건 좌우파의 합작운동에 주력하였으나 당시 해방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1969년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在美韓族獨立運動實記)』란 저서를 발간하여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공헌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69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72면
  • 한국학연구(인하대, 1991) 제3집 별집,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 해제(윤병석) 28·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571·718·734·761·835·851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187∼190·219·269·41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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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정두옥 Doo Ok Chung - -
본문
1889년 11월 21일 태어났다. 자료 부족으로 출신지는 알 수 없다. 하와이지역에서 교민총단·국민회·한국독립당·중한민중동맹 등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1903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이엘누아지방 대의원에 선임되어, 같은 해 6월 박용만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을 적극 후원하였다. 1917년 하와이 지방총회 군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18년 7월에는 박용만 등 반국민회 세력이 조직한 갈리히 연합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박용만이 호놀룰루 거주 한인 350명을 규합하여 조직한 대조선독립단 총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10월 하와이 대조선국민대표기성회 위원 자격으로 ‘최고의 독립운동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군사통일주비회의 노선을 지지하는 한편 자금을 후원하였다. 1928년 5월 20일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제1차 대회에서 “민족통일을 위하여 먼저 하되, 한인 사회단체를 무조건 통합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1931년 8월 󰡔국민보󰡕 주필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이를 규탄하며 선전부 설립을 의결하면서 선전부장에 선임되어 1931년 11월 3일자 『호놀룰루 스타 블레틴』지에 호소문을 게재해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였다. 1932년 1월 4일 하와이교민총단 선거에서 와일루아 의사원에 선임되었고, 의사회에서 선출한 총단장 후보자 2인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에도 하와이교민총단의 총회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하와이 국민회 한인홍보국 국장을 맡기도 했다. 이때 하와이국민회 회장 이정근과 공동명의로 하와이 육군당국에 ‘하와이 일본인 여론조사’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보고서에서는 ‘하와이에 일본인의 첩보공작조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하와이 당국이 연방수사국에 하와이 상주요원 파견을 요청하여,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길수·이용직·최영기 등과 13~15명으로 구성된 동생회(同生會)라는 단체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5년 하와이국민회 산하 참의부의 참의원으로 선정되었다. 1936년 6월 󰡔국민보󰡕 주필을 그만두었다. 1939년 11월 로스앤젤레스 한미문화협회에서 재미 한인들의 번역 출판과 장학을 목적으로 워싱턴에 설립하려는 문화회관의 건설위원장을 맡았다. 1940년 5월 9일 하와이애국단이 한국독립당 하와이지부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하자고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하였다. 1941년 4월 21일부터 5월 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부가 수립되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되었다. 의사부 위원 및 선전부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하와이 거주 중국인들과도연대하여 결성된 중한민중동맹단 단장을 맡았다. 1943년 9월 이승만과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고, 1944년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하면서 외교원으로 선임되었다. 특히 미군을 위한 정보수집 등에 나섰다. 1944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사부 지행서기로 선임되어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지출은 미국의 원동군사정책 방침을 따른다는 등을 논의하였다. 1946년 하와이 한국독립당 총지부 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하여, 중도노선을 추구하며 합작운동에 힘을 쏟다가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재미한족 독립운동 실기󰡕라는 책을 발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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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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