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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774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張景
이명 張鴻法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03.9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親睦會)를 조직하였으며, 1905. 12월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서 이병호(李秉湖)와 함께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한 후 1907.3.2 이 (會)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확대 개편하고 중앙총무(中央總務)활동(活動)하면서 동년(同年) 9월 상해(上海)에 도항하여 11월 24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상해지부(上海支部)설립(設立)하였으며, 1907.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공보(大東公報)'를 창간하여 1909. 1월까지 주필(主筆)민족정신(民族精神)고취(鼓吹)하는 등 독립운동(獨立運動)헌신(獻身)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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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1903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이대위(李大爲) 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親睦會)를 결성하고 환난상부(患難相扶)를 목적으로 내세워 동포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11월 일제가 한국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 체결하자, 동년 12월 안정수(安定洙)·방사겸(方四兼) 등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서 해외 유학생의 양성, 서적의 출간, 신문의 간행을 목적으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하여 총무로 선임되었다. 총무로 선임된 그는 실질적으로 회를 이끌면서 한인들의 유학 주선과 교포들의 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일규(白一圭)·문양목(文讓穆)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창립하고 중앙총무로 선임된 그는 그 해 7월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정미7조약(丁未7條約)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한편, 동년 11월에는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조직하고 청(淸)나라 보황회(保皇會)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미국내 청나라 보황회 계열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10월에는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하여 민족정신과 국권회복운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를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2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50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87·89·90면
  • 매천야록(국사편찬위원회) 42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475·485·659·661·758면
  • 박영석 교수 화갑논총(1992) 구한말 미주의 대동보국회에 관한 일고찰(최기영)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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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장경 장홍법(張鴻法) - -
본문
1900년대 미주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생년월일과 출신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장홍법(張鴻法)으로도 불렸다. 1903년 9월 22일 안창호·이대위와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 샌프란시스코 친목회)를 조직한 9명 중 한 명으로, 동포 간 긴밀한 연락과 권익보호를 담당하였는데, 주로 로스앤젤레스 근교 한인 간의 연락과 알선을 담당하였다. 1904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Pasadena)의 그린 호텔에 한인 10명을 취직시켰다. 한인 동포들이 기숙할 곳을 마련하러 집을 보러 다니기도 하는 등 동포들의 생활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중에는 유학생 방사겸(方四兼)도 있었는데, 그를 로스앤젤레스로 직접 데려와 단체 조직과 활동을 함께하며 조력자로 삼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12월 9일 패서디나에 대동교육회(大東敎育會)를 조직하고, 총무직을 맡아 한인의 민족교육에 힘썼다.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한인의 수가 늘어나자 패서디나에 두었던 대동교육회 중앙회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한인 이민자들의 접근성을 높여주었다. 한인 유학생들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실질적으로 회(會)를 이끌었다. 부인 또한 부인회 서기로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한인들을 집에 거두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남편과 함께 동포들의 생활을 도왔다. 1907년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하여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활동을 정치운동으로 확장하였다. 초대 중앙총무에 선임되어 총회장 이병호(李秉浩) 등 24명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 주필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시카고·뉴욕 등지를 다니며 한인의 상황을 살피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동보국회 회원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농사일·철로일 등 일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1907년 9월 상항청년회 연설에서는 “학교를 가지 못할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웅 연설의 사업을 본받으라”면서 청년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강조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11월 24일 상하이 애이근로(愛以近路) 균익리(均益里) 5가 114호에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조직하였고, 청(淸)나라 보황회(保皇會) 계열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동포들과 순한문 월간 잡지 󰡔태동신보(泰東新報)󰡕(1909년)를 창간하였다. 1910년 2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모색하여 대동보국회를 국민회(國民會)와 통합,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출범하였다. 이후 시카고에 주택을 얻어 부인과 딸과 생활하다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로 건너가 삼(蔘)장사를 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미국 각지·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싱가포르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동포들을 격려·지원하였다. 1918년 1월 31일 싱가포르 여행 중 사망하였다. 󰡔신한민보󰡕는 1918년 3월 28일자 기사를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약력을 소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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