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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73737
성명
한자 柳一韓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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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1996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8년 박용만(朴容萬)미국(美國) 네브라스카(州)설립(設立)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서 군사 훈련(軍事訓練)을 받았으며, 1919년 3·1운동(運動)이 일어나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자유한인대회(自由韓人大會)’에 참석하여 결의안 작성 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1920년경 ‘한국의 친구들(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의 보스톤지부 서기로 미국인들이 가입과 기부금 제공 및 지원을 유도하였고, 1928년에는 보스턴에서 『한국(韓國)에서의 소년시절』, 1943. 11월 『한국(韓國)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등의 문헌을 영문으로 간행하여 한국(韓國)진상(眞相)을 알리는데 기여하였으며, 1942년. 8월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맹호군(孟虎軍) 결성에 참가하고 현기식(懸旗式)에서 조소앙(趙素昻), 이승만(李承晩) 등의 축사(祝辭)대독(代讀)하였고, 1943. 12월 재미한국연합회의 기획연구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국내진입을 위한 특수임무를 수행할 NAPKO계획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수시로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資金)을 제공하는 등 광복시(光復時)까지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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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평남 평양(平壤)에서 출생하여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부터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배웠으며, 1905년 2월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미국행을 결심하자, 이들의 제자였던 정순만(鄭淳萬)의 아들 정양필(鄭良弼)·이종철(李鍾澈)·정한경(鄭翰景)·유은상(柳殷相)·이희경(李熙景)·이종희(李鍾熙) 등 후일의 한인소년병학교 동반자들과 함께 도미길에 올랐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정한경·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지역인 네브라스카주 커니시에 이주한 그는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1911년 헤이스팅스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졸업하였다.

1916년 미시건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되자, 재미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동 대회에 참가하였다. 동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였다.

1919년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세계적인 전기회사(電氣會社)인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근무하면서 1920년 한국친구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국친구회(韓國親舊會)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친구회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 동회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 후 1922년 대학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La Choy)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하자, 1924년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柳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 구매차 중국 상해를 거쳐 북간도지역을 순회하며 21년만에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기도 하였다. 1925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은 그는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12월 서울 종로에서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창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사업을 다각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28년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 최초의 약품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 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에 전력하는 한편, 1941년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72면
  • KOREA REVIEW(국가보훈처) 230, 307면
  •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1989) 42면
  • 미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방선주)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292, 412, 417~426면
  • 한국지실정(한족연합회, 1943. 11)
  • 사진(현기식, 1942. 8. 29)
  • 사진(The Young Korea Military School Cadets, 1912)
  • The New York Times(1945. 1. 10) 및 당시 사진
  • Asia & the America(1944. 11월) 기고문
  • First Korean Congress(1919. 4. 14~16)
  • When I was a boy in Korea(1928)
  • WAR & KOREA(유일한, 1942. 10월) 비망록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80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546, 771, 835, 951면
  • 신한신보(1942. 7. 2, 9. 3, 9. 10, 10. 1, 12. 10, 1943. 1. 28, 2. 25, 6. 2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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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유일한 - 서울 제1차 한인회의, 냅코 작전
본문
1894년 (음)12월 13일(1895년 1월 15일) 아버지 유기연(柳基淵)과 어머니 김기복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이다. 부친 유기연은 상업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재봉틀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이었으며, 미국인 선교사에게 기독교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단발을 몸소 단행한 개화 인사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박용만(朴容萬)의 숙부 박장현(朴章鉉)이 평안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박용만으로부터 국어·일어·산술·중국고전 등을 배웠다.1905년 박장현과 박용만이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하자, 10살의 어린 나이로 정양필(鄭良弼)·이종철(李鍾澈)·정한경(鄭翰景)·유은상(柳殷相)·이희경(李熙景)·이종희(李鍾熙) 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3년간 캘리포니아 주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08년 가을 네브라스카 주 커니(Kearney)로 옮겼다.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신문 배당 등의 잡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1909년 6월 14살이 되던 해에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 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민족교육을 통해 자주독립정신을 무장하는 교육을 받았다.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는 박용만이 샌프란시스코로 가면서 문을 닫게 되었는데 1912년 9월 제1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1914년 헤이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변전소에 취직하였다, 취직 후 약간의 돈을 모은 뒤 1916년 가을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 상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중국인을 상대로 일용잡화를 파는 장사를 시작해 점차 사업 범위를 확장시켰다.학업과 상업을 병행하는 고된 시간을 보내던 1919년 국내로부터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였다. 미주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나아가 세계 각국에 한국 독립을 위한 선전·외교활동을 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때에 서재필(徐載弼)·이승만(李承晩)·정한경 등이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곳에 한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낭독하여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미국과 전 세계에 호소하였다.1919년 미시간주립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뒤 미시간 중앙철도회사 회계사로 근무하다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General Electric Company)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1920년 한국친구회(韓國親舊會, 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보스톤지부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국친구회에 운영자금을 기부하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본회의 가입을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후원 활동을 하였다.1922년 대학 동창생인 스미스와 함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여 능숙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1924년에는 국제무역회사인 유한주식회사(柳韓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서재필을 사장에 임명하였다.1925년 소아과 전문의인 중국계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하였다. 이후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 구매를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북간도에 들러 가족과 상봉하였다. 당시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북간도에 이주해 살고 있었다. 귀국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세브란스의전(醫專)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초청을 받아 회사를 정리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1926년 12월 10일 서울 종로2가 덕원빌딩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였다.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의약품·위생·화장품·농기구·염료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8년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한편,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라는 영문 책자를 간행해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하였다.뛰어난 사업 수단과 능력으로 유한양행은 나날이 번창하였다. 유한양행은 약품·화장지·비누·치약 등 위생화장품을 비롯해 껌·초콜릿·아이스크림 등 식품류, 농기구·염료·페인트 생활도구류 등 다양한 품목을 수입해 판매하였고, 한국의 전통 수예물인 화문석, 도자기, 대나무제품을 수출하였다. 1936년 한국 사회 최초로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라는 평소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주식을 분산하고 종업원에게 분배하였다.1938년 4월 수출과 수입선의 다변화와 시장조사를 위해 구미 시찰을 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한양행 출장소를 설치하였고 구미 각 지역에 토산품 수출과 의약품 수입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1941년 수출입 업무를 전담할 유한무역회사를 설립하고 남가주대학교(USC) 대학원에 입학해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국제 정세가 급변하자 미주지역 독립운동 아홉 개 단체 대표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 결과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후원할 것과 통일된 새로운 독립운동기관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미주 한인들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모든 역량을 결집하였고 독립금을 거둬들여 임시정부와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일원이 되어 캘리포니아 주 국방경위군의 협조를 얻어 한인경위대(일명 명호군) 설립에 앞장섰다.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1942년 8월 29일 병탄국치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 현기식(懸旗式)을 거행할 때 집행위원장 김호와 한인경위대장 김용성과 함께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 행사에서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과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축사를 대독하기도 하였다. 국치일에 거행된 현기식은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전을 기원하는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또한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은 10월경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에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였다. 이때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 위원장과 집필을 맡았고, 부위원장 김용성(金容成), 간사 김성락(金成樂), 이사 송헌주(宋憲澍), 김병연(金秉瓀) 등을 선임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과 태평양전쟁(Condensed referense KOREA & PACIFIC WAR)-한국지실정(韓國之實情)』이란 비망록을 작성, 간행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대한 정책 수립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한국의 정치·사회·경제 등의 실상을 조사해 엮은 책이다. 이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1943년 12월 2일 장차 독립될 신생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뉴욕에서 11명의 발기인과 함께 고려경제회(Korea Economy Society)를 설립하였다. 고려경제회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독립될 신생 한국의 근대적인 산업과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홍보하고 선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고려경제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고려경제회보(Korea Economy Digest)』라는 영문 잡지를 발간하였다. 또한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다.1945년 1월 1일부터 29일까지 미국 버지니아주 핫 스프링스에서 개최된 태평양관계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IPR) 대회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와 함께 한인 대표로 참석하였다.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가한 IPR 대회는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의로 일본이 약탈한 것에 대해서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전후 즉각 보상하고 환원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러한 국제회의에서 정한경·전경무와 함께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공론화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곧이어 미국 전략첩보국이 추진한 한반도 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프로젝트에 참가하였다. OSS는 1943년 6월 13일 정보조정처(COI)의 조직을 개편해서 설립된 것으로 한반도 침투를 위한 특수훈련을 위해 냅코 작전을 계획하고 한인 대원을 모집하였는데, 1945년 1월 6일 50세의 나이에 입대하였다. 2월 2일부터 장석윤(張錫潤)·이태모(李泰模)·김강(金剛)·변준호(卞俊鎬) 등과 함께 약 12명이 훈련을 받았다. 냅코작전은 한반도에 침투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에 대항하는 비밀파괴공작과 무장운동을 전개하는 목숨을 건 군사훈련이었다. 이초(李超)·차진주(車眞宙)·변일서(邊日瑞) 등 5명과 함께 훈련 1조의 조장으로 적의 정보를 수집하고 후방을 교란하는데 필요한 선전활동과 무전 및 무기취급 등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군사작전을 행동으로 옮기기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작전 수행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등으로 역임하며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는데 이바지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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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재 서울특별시 구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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