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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678
성명
한자 康蕙園
이명 金惠源, 金惠園, 金惠淑, 金惠媛, 金蕙瑗, 金蕙媛, 강세라, 세라강, Sarah Kang, Sarah Kim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관련정보


2020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 3. 2 미국(美國)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康元信) 외 3명과 함께 “신한부인회”를 조직하였고, 5월 18일 “한인부인회”와 “신한부인회”의 합동을 촉진하였으며 8월 2일 부인회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결성하는데 참여하고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1920. 2. 10 군자금 500달러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大韓人國民會中央總會)를 경유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때때로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이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에 관계하며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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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04년 후일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을 역임하는 남동생 강영승(康永昇) 등 가족과 함께 1905년 5월 도릭선편으로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였으며, 1912년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이듬해인 1913년 12월 9일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후일 흥사단(興士團) 이사장을 역임한 김성권(金聲權)과 결혼하였다.

그 뒤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으로 이주하여 강원신(康元信)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하면서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한성선·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여 다뉴바 지방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동년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한편, 8월 2일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내 각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회 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우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설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후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된 강혜원은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團費)를 수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1천 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백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3백 달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군축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식자기 값으로 5백 달러, 간도(間島) 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중국 송미령(宋美齡) 여사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하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맛단사스 지역 한인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은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出征軍人舞蹈會)에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집 송금하여 민족운동단체를 후원하였다.

1930년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1940년 다시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119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4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5면
  • 미주이민100년(민병용) 42∼4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25∼427면
  • 재미한인50년사(김원용) 225∼22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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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혜원 김혜원(金惠園, 金惠源, 金惠瑗, 金惠瑗), 김혜숙(金惠淑), 세라 김(Sarah Kim) 평남 평양(平壤) -
본문
1885년 1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平壤) 박석골에서 당시 세무주사였던 아버지 강익진(康翊晉)과 평양 오성 양반 출신의 어머니 황마리아 (1863~1937) 사이에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흥사단 제출 이력서에는 출생 일자가 11월 20일로 되어 있고, 『공훈록』에는 12월 21일로 되어 있다. 본명은 강혜원(康蕙園)이었으나, 문필가이자 한학자인 김성권(金聲權)과 결혼한 뒤 남편 성을 따라 김혜원(金蕙園)으로 바뀌었다. 이명으로는 김혜원(金惠園, 金惠源, 金惠瑗, 金惠媛), 김혜숙(金惠淑)이 있고, 영어명 세라 김Sarah Kim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황마리아는 하와이에서 1919년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大韓婦人救濟會)를 조직하고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큰동생 강영승(康永昇)은 어머니의 권유로 1904년 평양 영유골 출신의 강원신(康元信)과 결혼하였으며, 미국 시카고 해밀턴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총회장과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발행인 겸 편집인을 역임하였다. 강영승의 처 강원신(1995, 애족장)은 시누이 강혜원과 함께 신한부인회와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고 3대 총단장을 비롯하여 재무, 총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막냇동생 강영옥(康永玉)은 하와이 한인 최초의 무선전기사가 되었다. 미주에서 1911년 8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무와 흥사단(興士團) 이사장을 역임하며 ‘흥사단맨’으로 통하던 남편 김성권(金聲權, 2002년 애족장)과 사이에 김낙(金諾, 치과기공사), 김인(金人, 치과의사), 김을(金乙, 영어명 Earl Kim, 하버드대학 음대 교수, 작곡가)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김낙은 1941년 8월 윤응호(尹應浩)와 윤도연(尹道演, 본명 金道演)의 딸 윤 캐리와 약혼하였고, 김인은 1944년 당시 미국 군인으로 태평양전쟁이 참전하였다. 김을은 1983년 보스턴 심포니오케스트라가 수여하는 호블릿Mark M. Horblit 상을 수상하여 세계적 음악인으로 자리 잡았다. 강혜원의 부친은 한말 세무주사를 역임하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자필 이력서에 의하면 1893년까지 평양에 살다가 평남 증산(甑山)으로 이주하여 1902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어릴 적 서당에서 공부하고 이후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남편 몰래 하와이 노동 이민을 추진하였다. 하와이 이민 길에는 가족 5명과 공립학교 교사 출신 강명화(姜明化)와 그의 아들 강영소(姜永韶), 그리고 백일규(白一圭) 등이 함께하였다. 강명화는 국내에서도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강영소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냈다. 이들은 1905년 5월경 평양에서 화륜선을 타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백일규는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 강혜원 가족이 강명화 부자를 만나 청룡환을 타고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에 도착한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6월 13일 도릭Doric 선편으로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한 뒤 가족과 함께 가파올탕 농장에 배치되었다. 2개월 뒤 강명화의 부름으로 에와 농장으로 옮겨 어머니와 함께 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중 1912년 김성권과 결혼하기 위해 미 본토로 이주하였다.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온 뒤, 1913년 12월 이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김성권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바느질과 자수로 수건과 옷을 만들며 생활하였다. 그 뒤 다시 캘리포니아주 중부에 있는 다뉴바로 이주하여 남편과 올케 강원신과 함께 농장에서 포도 따는 일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각지를 순방하다 다뉴바를 방문한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만났다. 이때 안창호가 ‘여성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느냐’라고 조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19년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강원신, 한성선(韓成善, 본명 文成善), 한영숙(韓永淑), 한신애(韓信愛), 김경애 등과 1주일 동안 협의한 끝에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의 설립 목적은 자녀와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국민회 의무금 납부 등이었다. 한편, 이보다 며칠 앞선 3월 하순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 1914년 조직)와 맨티카 여자전도회(1917년 3월 조직)는 4월 하순에 부인애국단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婦人親愛會, 1917년 11월 조직)에 발기문을 보냈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자,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는 5월 18일 미주 각 지방에 흩어진 부인회의 통합을 촉구하는 통고문을 발표하였다. 8월 2일 신한부인회를 비롯하여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지방부인회 대표들이 다뉴바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합동결의안은 각 지방에 분립된 부인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역량을 집중하고, 미주 한인 여성의 통일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이 창립되고, 8월 5일 국민회 중앙총회의 인준을 받았다. 대한여자애국단(이하 애국단)은 설립 초기, 국민회 적극 협력, 독립운동 자금 후원, 구제 사업, 일화(日貨, 일본 상품) 배척, 부녀자들의 독립 사상 고취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후 이들은 각 지부를 총괄할 총부(總部)를 설립하고자 노력하다가 9월 말경 애국단 총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총단장과 함께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2월 애국단 총단장으로 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고, 3월 다시 총단장으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가 애국단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재정 후원을 부탁하자, 총단장 명의로 「대한 여자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4월 28일 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하였다. 당시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애국단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외교·선전·군사 활동 등에 후원금을 송금하였다. 이외에도 국민회, 자녀들의 국어 교육, 교회에 재정을 후원하는 한편, 국내에 한재(旱災)와 수재(水災)가 발생하면 구제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31일 속병으로 프레스노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1922년 애국단 총부 선거에서 임성실과 함께 총부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0월경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여 제155단우(團友)가 되었다. 1923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고, 1925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정착하면서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애국단 사업과 흥사단·국민회의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26년 2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이하 나성지부) 부단장으로 선임되었고, 3월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이하 나성지방회)에서 개최한 3·1절기념식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가를 독창하였고, 남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1927년 국민회 나성지방회의 3·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나성한인예수교회 사교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애국단 나성지부 부단장으로 선임되었고, 1929년 12월 한인 2세를 위한 국어 교육기관을 조직하고 국어 교육 실시를 위한 한인 아동 교육기관 기성발기위원이 되었다. 1930년 12월 나성한인여자청년회 회장이 되었고, 1931년 2월 애국단 나성지부 단장과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32년 1월 나성지방회에서 국민회 창립기념식 경축위원 중 연극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심장병이 발병하여 4~5개월간 투병 생활을 하였다. 1933년 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 뒤 총부 위원이 된 데 이어 1936년과 1937년에도 총부 위원을 지냈다. 1937년 8월 5일 하와이에 있는 어머니가 별세하는 아픔을 겪었다. 1937년 11월 나성한인여자청년회 구제원이 되었고, 1938년 4월 국민회총회관 낙성식에 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나성대한여자기독청년회 회장, 12월 애국단 나성지부 위원이 되었다. 1939년 10월경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재미 중국인에게 솜옷 의연을 모집케 하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애국단에서는 솜옷 의연을 모집하기로 하고 단원들과 함께 수전위원(收錢委員)이 되어 솜옷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여 쑹메이링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쑹메이링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국방과에서 미국적십자회 후원 공작을 위임하자, 12월 전체대회를 열고 전시특연금과 회원을 모집하였다. 1942년 1월 애국단 총부 위원이 되었고, 1944년 1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서 임시회의를 열고 군사 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민족혁명당 미주지부 5명, 학생회 5명, 애국단 5명을 대표로 선출하여 국민회 대표 10명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이때 애국단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외에도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애국단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등에 각종 구호금을 송금하였다. 그 밖에 신한민보新韓民報社 식자기 값, 간도(間島) 동포 기근 구제금, 중국 쑹메이링에게 보낸 군사위로금, 멕시코 한인 동포의 아바나 이주 비용 동정금, 쿠바 마탄사스 한인 구제금, 수재민 구제금, 본국 수재민의연금, 본국 소년갱생운동, 황은순고아원, 미군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 등에 총 4만 6,298달러를 후원하였다. 한편, 광복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과 흥사단에 헌신한 미주 여성운동가 1호로 통하는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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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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