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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669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潤培
이명 金允倍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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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7 훈격 건국포장
1921. 8. 2 하와이에서 이승만파(李承晩波)에 속하는 동지회(同志會)한인(韓人)박용만파(朴容萬派)에 속하는 독립단측(獨立團側) 한인(韓人)과의 투쟁에 의하여 다수의 부상자와 피 구인자(被狗引者)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비난의 통지서를 양기준(梁基俊)과 함께 작성하여 8월 11일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신석근(辛石根) 등에게 배포하였고, 1920년대에 상해(上海)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에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34. 8월에 임시정부 재무부(財務部) 주미 제(駐美第)5행서위원(行署委員)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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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대한독립단, 대한인국민회 등 미주지역 한인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지역 여건 속에서, 김윤배는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 주석 김구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부족으로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하였다는 편지를 받고 하와이 동포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는 한편 자금모집에 앞장섰다. 당시 임시정부는 본국 뿐만 아니라 만주와의 연락이 모두 끊겨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지자 주석인 김구가 독립자금 지원을 바란다는 편지를 미주와 하와이에 발송한 것이었다. 그는 1934년 6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총회장에 선임되어 분열된 한인사회의 결속과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힘썼으며, 같은 해 8월 임시정부 재무부 주미제5행서(駐美第5行署) 위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미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509面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2輯 294面
  •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732·733面
  • 白凡逸志(金九, 敎文社) 23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633·634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770·773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國會圖書館) 345·346·348·349·84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554·70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윤배 김윤배(金允培) 미상 -
본문
출신지는 미상이다. 이명으로 김윤배(金允倍)를 사용하였다. 도미한 시기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활동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였다. 1913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오하우 호놀룰루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14년까지 국민보사 인쇄부에 근무하는 등, 1910~194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유지 인사로 활발히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1919년 박용만(朴容萬)의 주도로 설립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독립단) 단원으로 군자금과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1920년대는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李承晩)파와 박용만파로 분열되어 다툼과 혼란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파의 투쟁으로 부상자와 피구인자(被狗引者)가 발생하자 1921년 8월 2일 「조선인의 쟁투와 이승만의 불인망」 이라는 글을 작성하여 국내와 해외 각 처에 배포하였다. 1923년에는 대조선독립단 단장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차관문제에 대한 항의서를 뉴욕 은행에 보내는 등 해외 곳곳에 민족독립 염원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후반기까지 대조선독립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통일노선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大韓民族統一促成會, 촉성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단, 교민단(僑民團), 중립자 측으로 구성된 촉성회의 선전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적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독립운동의 촉진을 위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임시정부에 집중시키고자 1930년 한인협회(韓人協會)를 결성,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로 『한인협회공보(韓人協會公報)』를 발간하였다. 1931년 호항(호놀룰루, Honolulu)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시국문제에 대하여 웅변하고, 4월에는 독립단 하와이지부 총부단장 취임식 사회를 맡는 등 지역 인사로서 한인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 시기 한인들의 모일 수 있는 하나의 장(場)이었던 한인교회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한인사회의 불화와 분열을 조정하는데 대표자로서 앞장섰다. 1931년 5월 1일 한인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이용직 목사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 목사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며 충고하기도 하였다.1934년 당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국민회) 총회장이었던 이정건(李正健) 및 여러 임원들이 경제난으로 사퇴하자 그 해 6월 15일 이정건의 후임으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국민회 총회장으로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운동에 노력을 기하며 하와이 한인의 장래와 민족운동 결집에 힘썼다. 같은 해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재무부 주미제5행서(駐美第五行署)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5년과 1936년 하와이 국민회 총선거에서 참의원으로, 1937년 1월 21일 하와이 국민회 학무부원으로 당선되었다. 1940년대에는 한인상업회(韓人商業會)를 조직하였으며 호상금, 유지금, 특연 등으로 한인사회 여러 곳에 도움을 주었다.1945년 8월 17일, 광복을 맞은 직후 사망하여 8월 20일 하와이 국민회관에서 장례를 치루고 다이아몬드 묘지에 안장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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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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