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3658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康元信
이명 康瑗信, 朴瑗信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 3. 2 미국(美國)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지방에서 한성선, 김혜원, 한시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부녀자들의 조국애 고취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후원 등의 활동을 하였고 5월 18일 새크라멘트 한인부인회와 신한부인회의 연합 발기로 부인회의 합동에 노력하여 8월 2일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결성하는데 참여하고 1920년 말 당시 동단(同團)재무(財務)를 1920년대 초에는 제 3(代) 총단장(總團長)담당(擔當)하여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보내고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보내며 일본제품의 사용을 금하는 등의 활동(活動)을 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1904년 후일 미주(美洲)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을 역임하는 강영승(康永昇)과 결혼한 뒤, 1905년 5월 도릭선편으로 남편을 비롯한 그의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였으며, 1913년경 남편이 미본토 시카고로 건너가 법학박사과정을 밟게 됨에 따라 시누이 강혜원(康蕙園)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역으로 이주하여 포도농장에서 시간당 15센트의 노임을 받으며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함과 동시에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혜원·한성선·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동년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한편, 8월 2일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내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월로우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설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후 재무 및 제3대 총단장을 역임한 강원신은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團費)를 수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활동을 후원하였으며,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1천 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백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3백 달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군축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식자기 값으로 5백 달러, 간도(間島)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중국 송미령(宋美齡) 여사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하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맛단사스 지역 한인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은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出征軍人舞蹈會)에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집 송금하여 민족운동단체를 후원하였다.

이러한 활동 외에도 미주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적극 전개하는 등 조국의 독립운동에 일평생을 바쳤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연감 119면
  • 미주이민100년(민병용) 46∼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74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25∼42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원신 박원신(朴瑗信) 평안남도 평양(平壤) -
본문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영유골 출신이다. 1905년 이민 당시 19세였으므로 188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성은 박씨였고, 1904년 18세의 나이에 한 살 어린 강영승(康永昇)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남 강준성(康準成), 차남 제임스, 딸 에스더 등 2남 1녀를 두었다. 1905년 5월경 남편을 포함한 시어머니 황마리아, 손위 시누이 강혜원(康蕙園), 막내 시동생 강영옥(康永玉)과 함께 하와이 이민길에 올랐다. 평양 대동강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였다. 고베에서 다시 이민을 위한 신체검사와 자격 심사를 받은 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하와이에 갈 수 있었다. 1905년 6월 13일 도릭호(Doric)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시댁 식구와 함께 키파훌루(Kipahulu)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되었다. 도착 4일 후부터 사탕수수 농장에 나가 힘든 노동을 하였다. 4개월 뒤 시댁 식구와 함께 호놀룰루 에와농장으로 이주하였다. 호놀룰루에서 시누이는 바느질을 하고 자신은 시어머니와 빨래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던 중 남편은 학업을 위해 1912년 12월에, 시누이는 결혼을 위해 1913년 12월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 이후 시어머니와 둘이 하와이에 남아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였다. 1918년 7월경 시어머니를 홀로 두고 시누이가 있는 중부 캘리포니아주 디누바(Dinuba)로 이주하였다. 다뉴바에서 시누이 부부와 함께 농장에서 포도 따는 일을 하며 하루 10달러를 벌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남편과 10년간 떨어져 살면서도 뒷바라지한 끝에 남편을 미주 이주 한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남편 강영승은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미주3박(美洲三博)’으로 불렸다. 1919년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디누바를 방문하였다. 이때 안창호의 권유를 계기로 시누이 강혜원을 중심으로 한성선(韓成善)·한영숙(韓永淑)·한신애(韓信愛) 등과 3월 25일부터 1주일간 협의한 끝에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한부인회 설립을 즈음해 새크라멘토와 맨티카·로스앤젤레스 등지의 부인회가 ‘부인애국단’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발기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5월 18일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회장 양제현(梁齊賢)과 함께 미주 각지 부인회의 통합을 촉구하는 통고문을 발표하였다. 이 통고문에 따라 그해 8월 각지 부인회와 디누바에서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합동을 의결하였다. 그 결과 미주 한인 여성의 통일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이하 애국단)이 창립되었다. 이어 각지에 설치된 애국단 지부를 총괄하기 위한 총부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그해 9월 말경 애국단 총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총부위원 5인 중 한 명이자 총재무(총회계)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힘든 노동과 애국단 활동을 하면서도 대한인국민회를 후원하기 위해 21예금(국민회 창립기념일 의연금), 국민의무금, 적십자회비 등을 기부하였다. 1920년 2월 애국단 총단장인 시누이 강혜원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0년 4월 애국단 총부 총재무로서 순행위원이 되어 캘리포니아주 북부 지역을 순행하며 맥스웰과 윌로스에 애국단 지부를 조직하는 성과를 이뤘다. 같은 달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姜永韶)가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위해 의연금 모집을 위임하자, 애국단 명의로 「대한여자에게 고함」이란 글을 올려 의연금 모집을 총괄하였다. 1922년 8월 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에서 애국단 창립 3주년 기념식과 1923년 8월 창립기념 경축식에서 「애국단 역사」를 진술하였다. 애국단에서는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매주 고기와 설탕 없이 먹는 절식(節食) 운동, 양말과 신발을 기워 신는 절용(節用) 운동 등을 실천하며 모은 돈으로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1924년 2월, 5인의 애국단 총부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총단장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4월 총단장 취임식을 시작으로 일본 간장(일명 왜간장)을 먹지 말라는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한인의 집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검사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해 애국단 총부 본부가 디누바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하자,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2월 한국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애국단 총단장으로서 각 지부를 통해 기근 구제 의연금을 모집하여 국내로 송금하였다. 같은 해 3월 애국단 총부 투표에서 다시 5인의 총부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총단장으로 재선되었다. 그해 8월 본국에서 이른바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로 수재가 발생하자, 샌프란시스코지부를 비롯해 각 지부에 구제의연금을 모집하도록 지시하였다. 구제의연금은 모집 후 국민회를 통해 국내로 송금하였다. 1926년 3월 애국단 총단위원 선거에서 다시 총부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8월에는 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으로 8월 애국단 8주년 창립기념식을 거행하였고, 1927년 3월에도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면서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단장으로 선출되어 부단장으로 선출된 시누이 강혜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해 3월 재만동포(在滿同胞) 동정금 명목으로 로스앤젤레스지부에 50달러를 기부하였고, 8월에는 지부 단장으로 애국단 창립기념식에서 취지와 역사에 대해 강연하였다. 1929년 7월 나성(羅城) 국어학교를 후원하였다. 1931년 2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으로 강혜원과 함께 5인의 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임원 선거에서 부단장으로 선출되어 단장에 선출된 시누이를 보좌하였다. 1933년 12월에는 시카고에서 사업하는 남편의 요청으로 차남과 딸을 데리고 시카고로 이주하였다. 이후 애국단 활동은 뜸해지면서 1937년과 1938년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국민부담금 등을 기부하였다. 1943년 3월 당시에는 시카고한인부인회 대표로 3·1절 기념 축사를 『신한민보』에 게재하였다. 1943~1944년에도 국민회를 통해 인구세와 충칭(重慶)동포위문금 등을 후원하였고, 1945년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이주하였다. 이처럼 평생 애국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적으로 원조하는 한편, 미주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 교육 운동을 실시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강원신(관리번호:73658)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