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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9월 14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사슬, 어머니는 강씨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본명은 이용연이다. ‘이인섭’은 연해주로 망명한 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중국인 마적 두목의 도움으로 석방될 때 사용했던 여권에 게재된 이름이었다. 호는 옥천(沃川), 러시아혁명가들 사이에서는 리 이반 세르게예비치라고 불리었으며, 강보국(姜保國)·심만장·김상필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맹산(孟山)으로 피난을 가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길진사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이후 평양에 있는 친척집에서 대성소학교에 입학·졸업하였다. 기독교인으로 평양 장대제교회에 다녔다.
1905년 맹산으로 돌아와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07년 부친이 유생 김관수가 이끄는 의병부대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일제헌병대에 체포되어 지방구류처분을 받았으며,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08년 2월 평남 양덕(陽德) 오강능에 근거를 둔 김관수 의병부대를 찾아가 서기 직책을 맡고, 맹산·양덕·영흥(永興)·요덕(耀德) 일대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1910년 10월 일제헌병대의 검거를 피해 중국 린장현(臨江縣) 지역으로 망명하였여, 이후 신변 보호를 위해 어머니의 성을 따고 ‘애국’의 의미를 가진 강보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일본 당국의 압력을 받은 중국 지방 관리에게 체포되어 축출됨에 따라 1911년 10월경 두만강을 건너 훈춘(琿春)으로 와서 황병길·안성재·한규선 등이 주도하던 강서당(講書堂)에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함께 반일 애국교육에 앞장섰다.
1913년 장기영과 김성무의 권유로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지신허 마을로 이주하였으나, 임시거주증이 없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연추·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니콜스크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3개월간 복역 후 중국인 왕덕림(王德林)의 도움으로 중국 여권을 발급받아 석방되었다. 이때부터 여권상의 이름인 이인섭을 사용하였다. 석방된 후 니콜스크에서 이갑·홍범도·유동열·안공근·김이직(金理直) 등과 교류하였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주진수(朱鎭洙)의 권유와 이갑·유동열·장기영(張基永)의 소개로 추풍 소재 한인마을 협피구(夾皮溝)의 한인학교에서 무보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4년 추풍 일대 한인학교들이 러시아의 지방행정기관에 의해 폐지되고, 교사들이 일본 밀정 혐의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김립 등과 권업신문(勸業新聞) 발간에 앞장섰고, 한국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 설립활동을 펼쳤다.
1915년 민스크 전선에서 일할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 5,000여 명을 모집하는데 지원하여 같은 해 10월경 1,200여 명을 실은 50량의 화물차에 실려 중동철도를 경유하여 이송되었다. 수송열차 안에서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로 잡혀다 옴스크에 거주하던 김봉준과 러시아혁명가 이바노프를 만났다. 김봉준의 권유로 민스크 전선으로 가지 않고 옴스크에 남아 국민회에 가입하여 서기직을 맡았다. 평양대성학교 출신 안경억(安京億)·최영훈,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오성묵·맹훈 등과 국민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는 부회장 오성묵이 원동지역으로 떠나게 되자 국민회 부회장 겸 서기직을 맡았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후 옴스크에서 한인청년 30여 명과 청년회 ‘드루즈바’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 말에는 예카테린부르크 볼셰비크 당 기관에서 러시아 원동지역으로 파견되어 가는 김 알렉산드라를 만났으며, 그녀와 상담하여 청년회 ‘드루즈바’를 ‘우랄노동자동맹’으로 개칭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김 알렉산드라와 러시아 원동 한인사회에서의 혁명 활동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이한영·김립·오성묵·오 와실리 등 직업적 혁명가들을 만났으며, 러시아 10월 혁명에 참가하였다.
1918년 4월 28일 이동휘·김 알렉산드라·김립·박애(朴愛)·이한영 등과 한인사회당 창립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위원 및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적위대를 조직하고 우수리 전선의 이만·와젬스크역 전투에 참전하여 러시아 백위군과 싸웠다. 10월 말에는 원동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각지에 연락기관을 조직하는 임무를 띠고 옴스크로 파견되었다. 1919년 4월 대한국민의회의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이 백파전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6월에는 한인사회당 국제공산당 파견대표인 박진순(朴鎭淳)·박애·이한영이 백파전선을 넘어 모스크파로 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같은 해 11월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하여 시베리아부 고려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에서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부 시베리아사업단 산하 한·중·몽·일 혁명위원회 부회장을 맡았다. 1921년에는 치타로 파견되어 원동공화국 외무인민위원부 정보과 요원이 되었으며, 인민혁명군 참모부에 근무하며 정치군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볼로차예프카 전투, 하바로프스크 전투 등 원동해방전투에 참가하였고, 중국인 빨치산부대와 한인 빨치산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되고 11월 원동공화국이 소비에트러시아에 통합되면서 군에서 제대하였으며, 소련공민증을 받았다. 1925년부터 1930년에는 소련공산당 연해주 당 간부 선동선전부에 소속되었다. 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구역위원회 한인 담당 순회선전위원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농촌에 순회당학교를 조직하고 농민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만주군벌 장쉐량(張學良)의 도발로 ‘중동철도사변’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장쉐량 군대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1936년 ‘일본정탐’이라는 정치적 혐의를 받아 카자흐스탄으로 5년간 유배형을 받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41년 공식적으로 유배가 해제되었다.
1939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정책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최계립·계봉우(桂奉瑀)와 모임을 가진 뒤 회상기 집필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레닌기치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홍범도 일지’ 필사본을 바탕으로 홍범도 일기를 저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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