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평안도 사람이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가담하여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11월 북간도의 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의 대표들이 모여 조직하였다. 본부는 연길현 춘양향(春陽鄕)에 두었다. 주요 간부는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서상용(徐相庸), 참사 최노륜(崔老侖)․이봉우(李鳳雨)․한상우(韓相雨)․정병호(鄭秉浩)․김규찬(金奎燦)․김병호(金秉浩)․진석오(陳錫五), 서무부장 김승국(金昇國), 재무부장 유찬희(柳讚熙), 총무․재정검사위원 김윤덕(金允德)․김치도(金致道)․박용극(朴容極) 등을 들 수 있다.
임병극이 참여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4개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단체로서 그 지회만도 80여 개소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한국민회는 백초구(百草溝)․국자가(局子街)․용정촌(龍井村)․두도구(頭道溝) 등의 상업 지역과 주요 도시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아울러 대다수 구성원이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기독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등지에 기본 조직을 갖고 있었다.
한편 대한국민회에서는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따로 군사회를 두었는데 임병극은 제2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주요 간부로는 사령관 안무(安武), 부관 최익룡(崔翊龍), 제1중대장 조권식(曺權植), 향관 허동규(許東奎), 김석두(金石斗), 군무위원 이원(李園)․마룡하(馬龍河)․최기학(崔起鶴)․마천룡(馬天龍) 등이었다.
1920년 5월 15일 대한국민회에서는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각 지회의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장정을 독립군으로 양성할 것, 국내와 연락을 긴밀히 하여 국민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러시아 과격파로부터 무기를 다수 구입할 것, 중국 혁명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 등 여러 사항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사항들을 실행할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이 때 임병극은 이진(李鎭)․김강(金强)․강구우(姜九禹)․박만홍(朴萬弘)․황일보(黃一甫)․황병길(黃丙吉)․한대진(韓大振)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또한 1920년 5월 대한국민회와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조직하자 여기서 피복과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崔振東), 부관 안무, 북로제1군사령부 군무과장 이원, 군무과 구자익(具子益), 회계과장 최종하(崔鍾夏), 검사과장 박시원(朴施源), 통신과장 박영(朴英) 등을 들 수 있다.
1921년 10월에 안도현(安圖縣)에 근거지를 두고 의용대장(義勇隊長)이 되어 부하 400명을 거느리고,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개최 이전에 국내로 침공할 것과 무기 모집을 목적으로 간도영사관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1921년 11월 임병극은 장백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 본부를 둔 군비총단(軍備總團)에서 경호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총단장은 윤덕보(尹德甫), 총무장(總務長) 한기호(韓基鎬), 비서부장 한동초(韓東礎), 재무부장 이광춘(李光春), 통신부장 이현인(李顯寅), 향군(餉軍)부장 이재화(李在華), 소집부장 장기선(張基善), 의용부장 임경열(林京烈) 등이었다.
한편 임병극은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서 러시아에 무기구입을 위해 부대를 파견할 때 제8회 인솔자로 75명의 부하를 이끌고 러시아에 갔다. 임병극은 1922년 6월경 연해주에서 조직된 고려혁명군 연해주(沿海州) 총지부(總支部)의 남부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총지부 총재인 이중집(李仲執), 서부사령관 신우여(申禹汝), 총사령관 김규식(金奎植), 동부사령관 김응천(金應天), 북부사령관 이용(李鏞) 등과 함께 일하였다.
그 후 임병극은 군비단 별동대장이 되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 가을부터 1923년 봄까지 패주하는 러시아 백파군을 바리바쉬(현재의 노부끼예프까)방면에서 추풍(秋豊),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녹동(鹿洞)까지 추격전을 전개하여 승리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임병극은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였으며, 창조파의 주장에 따라 블라디보스톡에 운동기관을 설치하고 자신과 이청천(李靑天), 김세혁(金世爀) 등이 중심이 되어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창조파에서 조직하고자 한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병극 등 창조파의 이러한 계획은 신생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4년 5월부터 임병극은 다시 북간도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부하 5명과 함께 연길현(延吉縣)에서 중국군대에 체포되어 국자가(局子街) 진수사공서(鎭守使公署)에 구금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임병극의 인도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임병극은 동지들의 도움으로 러시아로 탈출하여, 어업꼴호즈 등에서 일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134·13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20·108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170·323·391·39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9·316·396·501면
- 독립군의 수기(국가보훈처) 251·271면
- 일제하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역사비평사, 1990) 194·19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313·421·44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82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32면
- 동아일보(1923. 11. 13, 1924. 10. 8, 1925. 8.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