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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5월 20일 러시아 연해주 하(下)연추(煙秋·延秋. 니즈네예 얀치헤(Нижнее Янчихе)) 마을에 원호인(原戶人. 러시아입적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그리고리 엘리세예비치, 한창걸(韓昌杰)이 있다.
러시아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주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수청(水淸. Сучан) 대표적인 러시아 입적 한인 마을인 신영동(新英洞, 石人洞, 니콜라예프카(Николаевка))에 거주하고 있었다. 1909년 9월 29일 수청 신영동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수청 지방총회, 이어 공립협회의 후신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지부 간부로 활약하였다. 1911년 12월 17일 권업회(勸業會) 수청 큰영(大營) 지방총회가 러시아당국의 승인을 받아 공식 출범하자 서기로 활약하였다.
중등교육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1915년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어 1916년 11월까지 서남부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1916년 11월부터 1917년 5월까지 키예프(Киев) 군사학교 부설 강습소로 파견되었다. 학습 과정을 마친 후 소위보로 임명되어 투르키스탄 제3시베리아 소총 예비연대에 배속되어 군인들 사이에서 혁명사업을 전개하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군대에서 선거제가 시행되자 속사포부대의 장교로 선출되어 복무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듬해인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Brest Litovsk Treaties)을 체결하여 독일제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1918년 2월 징집에서 해제되어 신영동으로 귀환하였다. 1918년 4월 신영동에 최초의 한인 노농군(勞農軍)소비에트를 조직하고 토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이 소비에트는 2개월 활동하다가 6월 말 체코군의 봉기로 볼셰비키 지방 정권이 무너지자 해산되었다.
소비에트의 해산 후에도 신영동 주민들은 10월경 러시아 붉은 의병대 일류호프(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Ильюхов) 군대에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하였다. 1919년 2월 신영동 주민 35명을 결집하여 연해주에서 최초의 한인의용대(빨치산군대)를 조직하고 군무와 외교를 겸하였다. 이때 참모 승훈, 교련관 박 세르게이, 참모부원 김병규, 강꼴랴, 최세묜, 박창하, 박창극 등이 한인의용대 간부로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에 수청지역의 빨치산부대들을 통제할 올긴스크(Ольгинский) 지역 임시혁명본부가 조직되자 민족부(한인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민족부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명칭의 신문을 발간하여 한인 촌락에 배포하였는데, 농민들 사이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렸다.
1919년 4월 일류호프 군대와 연합하여 쇠완재[중흥동. 페리치노(Перетино)]에서 백위군과 전투를 벌여 150여 명을 살상했다. 1919년 5월 한러연합 의병대는 카잔카(Казанка)마을에서 시베리아에 진출한 미군과 교전하여 적병 150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후 수청지역에서 미군,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백위군의 세력이 크게 강화되자 산중으로 퇴각하였고, 식량과 피복 부족 문제로 인해 하산 후 한인 농촌으로 잠입하였다.
191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로 가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연락을 취해 한인 군대를 재조직하였다. 1919년 11월 17~18일 러시아 사회혁명당(에스.엘, 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СР)과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의 지원을 받은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Rudolf Gaida)가 주도한 반(反)로자노프(Розанов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봉기에 열차기관총 소대장으로 참여했다. 이는 문창범(文昌範)·한명세(韓明世) 등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들이 군사 정변을 조직해 승리한 후, 한인 부대를 조직해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제안했던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로자노프의 방첩 특무기관에 체포되어 일본 군대에 넘겨져 3개월 동안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러시아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하기 하루 전인 1920년 1월 30일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석방된 후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하고 러시아 혁명군정의회 의장 라조(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와 협의한 후 1920년 2월 23일 침허우(Шкотово)에 근거를 둔 일류호프의 제1 원동소비에트연대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한인 노동자들로 군인을 모집하였는데, 1개월 만에 부대원이 300여 명에 달하였다. 얼마 후 ‘4월정변(4월참변)’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군정의회와 교섭한 결과, 러시아빨치산사령부의 명령으로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4월참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대를 재조직하고 연해주 수청·올가·아누치노(Анучино) 등 일대에서 백위군과 전투를 치렀다.
1920년 일본군이 자행한 4월참변 이후 수청 지방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홍호적(紅鬍賊)이라 불리던 마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직된 창해소년단(蒼海少年團)의 신영동 구역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홍호적 토벌에 참여한 후 1920년 여름 이후 수청지역 빨치산운동이 침체되자 아누치노로 퇴각하였다.
1920년 11월경 북간도 훈춘(琿春)으로부터 이동해 온 박경철(朴景喆)·이승조·고상준 등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군대와 수청의 가장 오지인 수주허(蘇子河)의 지방대와 통합하고 수주허 흥두동(興頭洞)에 본부를 둔 고려노농군회(高麗勞農軍會)를 조직하였다. 고려노농군회는 후일 ‘제1수청의병대’라 불렸는데 이때 군무위원에 선임되었다. 다른 간부로는 회장 박경철(朴景喆), 재무 이승조, 민사 강백우, 교육 강호여, 선전 우시하(禹時夏), 모연 고상준(高尙俊)이었다.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주허 지방 한인총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1921년 1월 치타의 러시아공산당 중앙위 원동부 소속의 한인부가 조직한 임시군사위원회 위원(군정위원 겸임)와 위원회 산하 군사전문단 단원에 선임되었지만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1년 4월 27일 고려노농군회는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수이푼(秋風)으로부터 다우비허(都兵河) 추구옙카(Чугуевка) 구역으로 이동해 온 혈성단(血誠團) 군대와 통합하여 연해주고려인통일의병대(‘제2수청의병대’)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으로 김경천(金擎天)을 임명하였다. 이와 동시에 통합군대인 제2수청의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혁명적 정치조직으로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연해주한인총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외교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통합 4개월 만인 1921년 9월 제2수청의병대는 연해주 빨치산부대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아누치노 마을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는 해산되었는데, 이때 강국모(姜國模)가 이끌던 혈성단은 원래 근거지였던 추풍으로 되돌아갔다.
아누치노에 도착하자 연해주 빨치산 군정의회 정치부에 임명되었고, 수청 지역의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연합하라는 지시를 받아 수청의병대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임시사령관에 선출되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는 신용걸(申用傑)이 지휘하는 1개 중대(35명)을 올가항으로 파견하여 800명의 백위군 군대와의 전투에서 올가항을 방어했으나 이때 22명의 한인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전투 후 중대장 임한준의 영솔하에 전투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아누치노의 본대로 귀환하였다.
1922년 1월 연해주 혁명군정의회가 창설되고 8개 군구가 편성되자, 연해주 혁명군정의회의 직속 부대가 되었다. 1922년 4월 연해주 혁명군정의회의 명령으로 참모장 박경철과 함께 2개 중대를 이끌고 올가항을 공격하여 백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1922년 7월 새영전투, 1922년 9월 야리채텐 전투 등에서 부대를 이끌고 백위군을 상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원동해방전쟁의 마지막 단계에 연해주 고려의병대들의 통합군대 고려혁명군을 지도할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되자 고려인의병대 대표로 의원에 선출되었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은 2개 본대와 3개 지대로 편성되었고 전체 인원은 1,542명이었다. 이때 고려혁명군 제2본대에 재편되었는데, 대원수는 510명에 달하였다. 고려혁명군 제1본대인 김규식 군대의 대원수는 677명, 제1지대 임병극 군대는 200명, 제2지대 김정하 군대는 120명, 제3지대 강알렉세이 군대는 35명이었다. 고려혁명군 제2본대를 이끌고 원동해방전쟁의 최후 전투인 1922년 10월 이바놉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스파스크 공략과 니콜스크 해방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우수리철도 모나스트리세역(驛)으로부터 라즈돌리노예역까지 행군하였다.
1922년 11월 10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의 명령으로 일본군의 철수 후인 11월 15일부터 24일에 걸쳐 무장해제하였다. 러시아 내전 종결 이후 대원들과 함께 침허우 지역에 정착하여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별)’라는 아르쩰리(Артель, 기초적 생산자료, 노동력, 토지이용, 기계화 기타 기구, 노동 가축, 경리건물을 공동화하는 농업 집단화 단계)를 조직하였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수청지구 혁명집행위원회 교관, 서기, 한인 전권대표, 전연방공산당 스파스크 군 고려부 부서장, 연해주 전연방공산당 포시예트 그로데고보 지역위원회 선동원 및 서기로 일했다. 1923년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9년~1937년 기간에 원동변강 통합국가정치보위부(체카) 내무인민위원부에서 제2방첩대 제1부(副)전권위원, 전권위원, 연해주 통합국가정치보위부 특립부대 및 해군 특립부대 수사관, 연해주 내무인민위원부 포시예트 지구국 국장, 유태인 자치주 내무인민위원부 스미도비치 지국 국장, 제34보병사단 내무인민위원부 특립부대 부(副)대장으로 활동했다. 1933년 당시 러시아공산당 포시예트 구역 당청결위원회(코미씨야) 회장을 맡기도 했다.
10월혁명 15주년인 1932년 한인빨치산운동과 내무인민위원부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소련 통합국가정치보위부대학 명예졸업장과 ‘전러시아 반혁명태업 단속 비상위원회(체카) 통합국가정치보위부(OGPU-NKVD) 1917~1932’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최소 10년 이상 근무자에게 주어지는 훈장인데 불과 3년 만에 수여받은 것이다. 한편 같은 해 외아들인 니콜라이가 병사했다. 1937년 7월 1일부터 9월 3일 ‘일본첩보요원’이란 명분으로 체포될 때까지 원동변강 유태인자치구 내무인민위원부 제3국(방첩사무국) 국장대리로 근무했다. 부인 조순진 역시 체포되었고, 부모를 잃은 딸 나제즈다 역시 행방불명되었다.
1938년 2월 5일 내무인민위원부 위원회, 소련검찰관,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 재판장의 결정에 의해 최고형인 총살형을 선고받고 4일 후인 2월 9일 집행되었다. 1958년 7월 7일 원동변강 군관구 군법회의 판결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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