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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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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蔡永
이명 蔡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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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2 훈격 독립장
1919년 9월 만주 훈춘(琿春)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산하의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여 국내 진공계획을 세웠고, 1920년 초 니꼴스크에서 강국모(姜國模), 한희진(韓熙鎭) 등과 대한국민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을 조직하여 그 사령관(司令官)으로 활동하였으며, 1921년 대한국민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의 일원으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여 1921년 6월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참변을 겪은 후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사관학교(士官學校)교관(敎官)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고 1924년 상해에서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의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노령 이만에 돌아와 활동하다가 뽀그라니치나야 역에서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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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용정(龍井)에서 북간도 최대 규모의 3·1운동 집회라 할 수 있는 '조선독립축하회(朝鮮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북간도 각 지방대표들은 '3·13운동'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를 결성하였다. 조선독립기성회의 주요 인맥은 1910년대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간민회(墾民會) 활동을 통해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교육,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추대하기로 하면서 회의 명칭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개칭하고 대한국민회 규칙에 "임시정부 법령 범위 내에서 독립사업 완성을 기도함을 목적"한다고 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북간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임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대한국민회는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에 본부를 두고 8개 지방회와 지방회 산하 130여개 지회를 두어 북간도 전역의 한인사회의 자치와 독립군 편성, 군자금 모집 등 폭넓은 항일운동을 추진하였다.

대한국민회 조직 후 대한국민회 총부(總部)에 배속되어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비위원(設備委員)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9월 만주 훈춘(琿春)에서 홍범도(洪範圖)·이용(李鏞)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 산하에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국내진공계획을 세웠다.

1920년 초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강국모(姜國模)·한희진(韓熙鎭) 등과 대한국민혈성단(大韓國民血誠團)을 조직하고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3월 하마탕(哈 塘)에서 북간도(北間島) 동부와 훈춘, 노령(露領)의 각 독립단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자, 홍범도·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황병길(黃丙吉) 등과 참석하여 각 독립단의 통일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21년 소련의 원조하에 한인연합부대인 고려혁명군단(高麗革命軍團)에 참여하여 고려혁명군사관학교(高麗革命軍士官學校)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6월 러시아 흑룡주(黑龍州) 스보보드니에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할 당시, 혈성단을 이끌고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여 참모부원으로 러시아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고, 1924년 상해에서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 우스리스크 연변의 이만에 돌아와 활동하다가 러시아와 중국 국경인 뽀그라니치나야 역에서 자객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102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분책 531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73·141·519·521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92面
  • 北間島地域 獨立軍團名簿(國家報勳處) 84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516面
  • 朝鮮日報(1926. 5. 22)
  • 朝鮮民族運動年鑑 150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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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채영 본명 : 채형묵(蔡亨黙), 이명 : 채영(蔡英)·채룡(蔡龍) 서울 한인의병대회,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 국민대표회의
본문
서울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채형묵(蔡亨黙)이고, 이명은 채영(蔡英)·채룡(蔡龍)이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소재 항저우무관학교(杭州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북로사령관(北路司令官)에 임명되어 만주(滿洲) 훈춘현(琿春縣) 회룡봉(回龍峯)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간도(間島) 옌지현(延吉縣)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21일과 3월 8일 훈춘현 합마당(哈螞塘)에서 홍범도(洪範圖)·구춘선(具春先)·이범윤(李範允)·김광국(金光國)·황병길(黃炳吉) 등 40여 명과 함께 독립군 부대 통합을 위해 대한국민회가 개최한 각 단체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노령(露領) 연해주(沿海洲)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무기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결의되었다. 연해주 니콜스크(현 우수리스크)로 이동하여 1920년 5월 혈성단(血誠團)에 참여하였다. 혈성단에서 중대장·외무부장·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고,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군사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수이푼(秋風)에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대원을 양성하면서 대한국민회에서 지시하면 즉시 간도로 출동하겠다는 내용을 대한국민회에 전하였다. 수이푼에서 중국 마적단으로부터 한인사회 보호에 노력하였다. 1921년 1월 16일 러시아령 치타에서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소속 한인부가 개최한 전한임시군사위원회의(全韓臨時軍事委員會議)에서 한창걸(韓昌傑)·김경천(金擎天)·최니콜라이 등 9명과 함께 독립군 부대 통합을 위한 협의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전한임시군사위원회에서는 통합 독립군 부대인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하였다. 안무(安武)·서일(徐一)·조욱(趙昱)·이청천(李靑天)·이용(李鏞) 등 14명과 함께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참모부 부원에 선임되었다. 3월 중순 크라스노야로보에서 개최된 한인의병대회에서 이용·한운용(韓雲用)·장기영(張基英)·박일리야와 함께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5월 이르쿠츠크 소재 사할린군사학교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7월 1일 수이푼에서 독립운동단체 대표자 약 70명과 함께 연합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는 향후 15개년 계획으로 노령과 중국에서 병력 15,000명 규모로 1개 사단을 구성하고 총 5개 사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0월 수이푼 솔밭관(松田關)에서 독립군 대원 100여 명과 함께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0월 28일 설립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수이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총단장 조맹선(趙孟善)과 만나 독립군 부대 편성에 관해 협의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독립운동단체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회의에서는 향후 독립운동 전개 방향, 독립운동단체 통합, 중국과 노령에서 독립군 대원 양성, 임시정부 운영 등에 관해 협의할 예정이었다. 이 회의에 이용·박크리브와 함께 노령 군사대표로 지명되었다. 9월경 고려혁명군 하바롭스크 총지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10월 19~28일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통합대회인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참가하여 재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경 수이푼 솔밭관에서 이중집(李仲執)·김경천·장도선(張道宣)·안무·조성환(趙聖煥) 등과 함께 약 2,000명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지휘하였다. 추풍 송전관과 하바롭스크 인근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노농신조선독립국(勞農新朝鮮獨立國)을 건설할 목적으로 조직된 노농독립정부에 참여하였다. 1923년 2월 28일 혈성단 대표로서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4월 20일 국민대표회의 대표 124명과 함께 “대동단결”한다는 내용으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5월 3일 국민대표회의 제59일차 회의에서 이청천·배천택(裵天澤)·김중훈(金重勳) 등 11명과 함께 “독립운동에 적합한 통일적 최고기관을 공고히 조직”하기로 한다는 내용으로 성명서를 배포하였다. 5월 하순 노령 이만에서 설립된 무관학교에서 이용·이동주(李東周)·조병주(趙秉周) 외 12명과 함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6월 김규식(金奎植)·신숙(申肅)·박용만(朴容萬)·최기연(崔基然)·윤해(尹海) 등과 함께 국민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8월 하순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기 위하여 윤해·강구우(姜九禹)·김정하(金鼎夏)·강무(姜武)·백낙현(白洛鉉)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중국 톈진(天津)으로 이동하였다. 11월경 고려공산당 아무르주 대흑하(大黑河) 중앙총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18일 남만주 싱징현(興京縣)에서 이승빈(李昇彬) 외 4명과 함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학무위원장 김동삼(金東三)을 만나 향후 활동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다음 사항이 의결되었다. ①경기도·충청남북도·경상남북도·강원도에는 흥사단(興士團)에서 단원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연락기관을 설치할 것, ②황해도·함경남북도·평안남북도는 대한통의부에서 관할하고 원정대(遠征隊)와 통신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도록 할 것, ③평안북도 일대의 국경지대에는 요소에 교통기관을 설치할 것, ④원정대와 통신대 대원을 무장시킬 것, ⑤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군용품을 확보하고 일제 활동을 조사할 것, ⑥군사비는 하와이와 남만주 현지사(縣知事), 남만주 거주 한인에게 모집할 것. 1924년 중반경 훈춘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대한혁신단(大韓革新團)을 조직하였다. 9월 13일 훈춘현 태평구(太平溝)에서 대한혁신단 위원장으로서 제1회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일제 기관 공격, 일제 고관 처단, 간도 각지 지부 설치에 관해 협의하였다. 같은 시기 장남환(張南煥)·김호석(金鎬錫)과 함께 적기단(赤旗團) 군정부(軍政部)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0월경 노령 니콜스크에서 오하묵(吳河黙)·이용·박두희(朴斗凞)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는 방안에 관해 협의하였다. 1930년대 하바롭스크에서 󰡔선봉󰡕 브리가다, <붉은별> 콜호즈 사회주의비기 참모부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 당시 유배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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