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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趙應順
이명 王大方, 五周, 金閱, 趙一飛, 趙廷奎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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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17 훈격 독립장
1908년 5월 노령(露領)에서 전제익 의진(全濟益義陣)에 입대 후 부하 300여 명을 이끌고 함북(咸北) 회령군(會寧郡)으로 진격해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909년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 연추(煙秋) 근교에서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함.
이후 연해주(沿海州) 일대의 70여 곳에서 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1910년 6월 국민회(國民會) 수청신영지방회(水淸新英地方會) 평의원(評議員)으로 활동했으며, 1914년 6월경 수청(水淸)에서 합성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동월(同月) 연추(煙秋)에서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才亨)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함.
1917년 재중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에 대한 참간장(斬奸狀)을 제출하고 처단 실행자로 활동했으며,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한 뒤 김알렉산드라와 협의하여 노동회(勞動會)로 변경했고, 1919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 결성 후 부단장(副團長)으로 국내로 진격해 일본 관헌을 공격했으며, 1920년 12월 치타에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동아한인부(東亞韓人部)를 결성해 위원(委員)으로 활동함.
1921년 9월 합이빈(哈爾賓)에서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 결사대(決死隊) 결성 후 대장(隊長)으로 동지 규합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협력하고, 1920년 11월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측(臨時政府側)과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2년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았으며, 1926년 수청(水淸) 신영동(新英洞)에서 야학교 교사로 활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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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8년 5월 러시아령에서 전제익 의진에 입대한 후 부하 3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으로 진격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에는 연해주 노브키예포스크(煙秋) 근교에서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다. 이후 연해주 일대의 70여 곳에서 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1910년 6월에는 국민회 수청신영지방회(水淸新英地方會)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6월경 스찬(水淸)에서 합성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같은 달 노브키예포스크에서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才亨)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재중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 대한 참간장(斬奸狀)을 제출하고 처단 실행자로 활동했다.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한 뒤 김알렉산드라와 협의하여 노동회(勞動會)로 변경했고, 1919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을 결성한 후 부단장으로 국내로 진격해 일본 관헌을 공격한 바 있다. 1920년 12월 치타(知多)에서 고려공산당 동아한인부를 결성해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1년 9월 하얼빈(哈爾賓)에서 한국의용군 결사대 결성 후 대장으로 동지 규합 및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협력하였다. 1920년 11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2년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스찬에서 야학교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3),(5),(6),(11)
  •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만주(在滿洲)의 부(4)
  •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구미(在歐米)(7)
  • 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국사편찬위원회, 2001) 제37권 4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6집 1096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1권 384면, 제4권 231면, 제18권 262, 269면
  •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참가하던 빨치산 회상기(작성연대 미상, 독립기념관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응순 왕대방(王大方)·오주(五周)·김열(金閱)·조일비(趙一飛)·조정규(趙廷奎) 함남 갑산 -
본문
1885년 12월 4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회사면(會社面) 도화리(桃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왕대방(王大方)·오주(五周)·김열(金閱)·조일비(趙一飛)·조정규(趙廷奎)이다. 1905년 함남 원산에서 행상(行商)으로 상업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5월경 전제익(全濟益) 의병부대에 가입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로 이주하였다. 1908년 7월 동의회(同義會)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역 의병들은 대대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참전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부하 300여 명과 함께 함북 회령군(會寧郡)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의해 상황이 불리해졌고 후퇴하였다. 1909년 연추(煙秋)로 돌아온 이후에도 한인사회에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의병의 열기가 위축되고 식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방안을 타개하기 위해 안중근(安重根)·백규삼(白圭三)·김기룡(金起龍)·강순기(姜舜璣) 등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동의단지회는 통상적으로 단지동맹이라고 불린다.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기 위한 모임 날 왼손 약지를 끊고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뜻을 이루기를 천지에 맹세한 후 흩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제 경찰은 경계를 하고 지속적으로 상부에 보고를 하였다. 연해주 지역에서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연해주 일대 70여 곳에서 학교가 설립되는 데 앞장섰으며, 1910년 6월에는 국민회 수청신영지방회(水淸新英地方會)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6월경에는 수청에서 합성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1913년 10월 연해주로 온 이동휘(李東輝)의 주장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북간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일제와 전쟁을 해야 하고 이것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때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여, 1914년 6월 22일 연추에서 이동휘·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才亨)·김하석(金夏錫)·전제익 등과 회합하였고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을 협의하였다. 이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인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가 설립하는 데 관여하였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데 깊숙이 관여했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1917년 재중일본공사로 재직하게 된 것을 확인한 후 참간장(斬奸狀)을 제출하였으며 처단 실행자로 활동하였다. 1918년 이동휘·박애·박진순·이한업·김립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가입하였고, 한국인 최초 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김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와 협의하여 국민회를 노동회(勞動會)로 변경하였다. 1919년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 결성을 주도하였고, 부단장 직을 맡고 단원들과 함께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후 한인사회당에 가입하고 한국인 사회주의 운동에도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 29일 한인사회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대중조직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지게 된 ‘한인노동연합회’ 발기인 9명 중 한명으로 참여하였다. 이날 모스크바(Москва)에서 재러시아 한인들의 대표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대회를 열 것을 주장한 ‘전로 한인각단체연합조직 발기회’ 발기문이 발표되었는데, 발기문에 연사한 9명 중 한명이 되었다. 1920년 10월 3일부터 11일까지 러시아 옴스크(Омск)에서 17개 지방 24개 단체를 대표한 52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제1회 전로고려인대회’에 박진순과 함께 대회발기인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같은 달 3일에 개최된 예비회의에서 출석원 위원장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5일에 열린 예비회의에서는 임시회장 직을 맡아 회의가 진행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12월 2일 치타(Чита)에서 극동공화국 영토 내에 소재하는 한인 사회주의단체들의 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 연해주 대표 장도정, 아무르주 대표 권화순(權和順), 상하이(上海) 대표 박애·계봉우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날 ‘전한공산당 중앙총회’가 성립되기 전까지 각지의 한인공산당을 통일적으로 운영할 임시중앙기관을 조직한다는 사항이 합의되었고, 그 결과 ‘극동부 한인부’가 설립되었다. 박애·계봉우·김진·장도정·박창은 등 5명이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권화순과 함께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편집부원이 되어 조직부 서기 강세레브레니코프, 경리과장 박성오, 지도원 박군팔(朴君八) 등과 함께 ‘극동부 한인부’의 실무자로서 활동하였다. ‘극동부 한인부’의 기관지였던 󰡔노농신문󰡕의 출판원이 되었으며, 번역원 박윤해(朴允海)·이다물, 서기 정기현(鄭基鉉)·이종우(李鍾宇), 필경사 이종구, 기자 김마리야 등과 함께 신문 발간 사무를 이끌었다. 한인 사회주의 운동의 매개체 역할도 담당하였다. 1921년 이성실(李成實)을 중심으로 1920년 4월에 결성된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의 상급기관이 러시아 극동국 관할로 넘겨지게 되었다. 이때 러시아 극동국 산하기관으로서의 재편작업을 극동부 한인부 조직지도원 자격으로 주도하였다.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한인사회당 중앙간부가 소집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개최된 ‘전한공산당 대표회’에 참여하였다. 상하이에 머물면서 이동휘·박진순·김립·김하구·장민섭 등과 함께 노령 대표를 자임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나자 상해파에 속해 있었던 일부 인사들은 학살책임자들을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간도 11개 단체의 연명으로 발표된 「성토문」에 권중강과 함께 노동회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얼빈에서는 13명으로 구성된 한국의용군결사대(韓國義勇軍決死隊)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들이 저격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진짜 독립단원이 아니면서 독립단원의 가면을 쓰고 독립단을 팔아 자기 밥벌이를 하거나, 진짜 공산당원이 아니면서 공산당원이라고 자칭하며 공산당을 파는 자, 또는 표면으로는 열성을 가장하여 몰래 정부를 파는 자들”이었다. 또한 자유시참변으로 동지들을 구금하고 동포들을 참살했다는 명목으로 안병찬·유동열·조훈·이성 등을 암살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의용군결사대를 이끌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 1921년 11~12월경 상하이에서 계준호(桂埈昊)를 만났다. 1921년 치타에서 알게 되었던 계준호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로 된 군자금 모집 위임장을 발급받은 후였다. 이 자리에서 하얼빈(哈爾濱)까지의 여비를 제공해주기로 약속함과 동시에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는 김춘(金春)이 군자금을 내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개시켜 줄 것이며 편의를 제공받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모금 활동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게 되었고 협의 내용 역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다. 1922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항일활동을 지속하였다. 1926년 수청에서 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지역민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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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3년 경성지방법원 1922-04-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원판결취소, 징역 3년 경성복심법원 1922-06-26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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