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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7
성명
한자 安武
이명 安秉鎬, 李安武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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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80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1994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0년 만주로 망명한 이래 독립운동단체의 중요한 간부를 역임하면서 봉오동전투와 자유시 등지에서 활약을 하였으며 일경교전하다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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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에 입대하여 해산될 때까지 교련관으로서 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에는 북간도에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國民會軍) 3백여명을 편성하여 무장시키고 부사령관이 되어 무장항일 투쟁을 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하고 최진동(崔振東) 사령관의 부관으로서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독립군 부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한 일제(日帝)의 반격이 있자 동년 12월에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정비하였다.

1921년 2월에는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세력 만회를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국민회군을 일단 한인보병자유대대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배반으로 1921년 6월에 자유시참변을 당하게 되자 이르크츠크를 거쳐 이청천(李靑天) 등에 이어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3년 2월에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국민회군 대표로서 참여하여 동년 6월 10인의 국민위원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용정(龍井)에 돌아와 계속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24년 9월 6일 용정(龍井)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교전중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며 중상으로 용정(龍井)에 위치한 자혜(慈惠)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7일 아침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무장독립운동비사 72·10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9·310·51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323·383·391·403·508·516·519·52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05·319·320·321·328·392·394면
  • 동아일보(1924. 9. 1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7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46·348·360·374·383·406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126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83·115·118·15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9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안무 본명 : 안병호(安秉鎬), 이명 : 이안무(李安武) 함북 종성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자유시참변
본문
1883년 6월 29일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 고읍면(古邑面)(현 회령시 행영면)에서 구한말 경찰 관직에 속하는 총순(總巡) 출신의 아버지 안수익(安壽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병호(安秉鎬)이고 호(號)는 청전(靑田)이며, 이명으로 안무(安武)·이안무(李安武) 등을 사용하였다.17세까지 고향에서 성장하였으며, 1899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한 후 경성(京城) 교련관양성소(敎鍊官養成所)를 거쳐 종성군(鍾城郡) 진위대 교련관으로 근무하였다. 교련관은 대한제국 군관직의 하나로 출신(出身), 전함(前銜) 등을 막론하고 사법(射法)·병서강(兵書講)·진법(陳法)의 3기(三技)의 시험을 치러 선발하였다.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군대를 나왔으며, 잠시 무산군(茂山郡) 동면(東面) 학루산(鶴樓山)에 은거했다고 한다. 1908년 4월에는 경성군 함일학교(咸一學校)에서 체육교사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 4월에는 무산군의 보성학교(普成學校)로 옮겨 근무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북간도 허룽현(和龍縣)으로 망명하였으며, 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와 교육활동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9년 간도 3·13만세운동이 촉발되고 김약연(金躍淵)·구춘선(具春先)·김영학(金永學)·마진(馬晋)·김내범(金迺範)·유찬희(柳瓚熙)·강백규(姜百奎)·정재면(鄭載冕) 등 간민회(墾民會) 계열의 인사들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하자 이들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대한국민회는 회장 구춘선의 지휘 아래 북간도의 엔지(延吉)·왕칭(汪淸)·허롱(和龍)·훈춘(渾春) 4개현의 한인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산하에 약 80여 개의 지회를 두고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보호·육성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대한국민회는 그 규칙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령 내에서의 독립 사업 기도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힐 정도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관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고 있었다.1920년 봄 대한국민회가 산하에 독립군 부대로 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을 조직하자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제1중대장 조권식(曺權植), 제2중대장 임병극(林炳極), 향관(餉官) 허동규(許東奎)·김석두(金石斗), 군무위원 이원(李園)·마룡하(馬龍河)·최기학(崔起鶴)·마천룡(馬天龍) 등이 주요 간부였고 중요 근거지는 엔지현 즈런향(志仁鄕) 이란구(依蘭溝)였다.국민회군은 대한국민회 지회에 소속된 각 호에서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1명을 차출하여 지방총회에 보내면 사령부에서 약 2개월 간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으로 양성하였다. 교육 내용은 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과 집총교련·집총 야외 교련 및 일본의 보병조전(步兵操典) 등의 훈련이 실시되었다.이 시기를 전후하여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병사들의 훈련에 힘을 기울였으며, 대한국민회의 도움을 받아 니콜리크 등지에서의 무기 구입을 위해 힘썼다. 또한 국민회군은 대한국민회의 관할 지역을 순회하며 한인들을 보호하는 경찰군으로서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1920년 5월에는 대한국민회와 임시정부의 주도로 북간도지역 독립군 조직의 통합논의가 본격화되자 대한국민회 군무위원회의 위원장의 자격으로 대한군무독군부(大韓軍務督軍府) 부장 최진동(崔振東)과의 연합을 주도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성립시켰다. 5월 하순에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일제1군사령부((征日第)1(軍司令部))]이 이에 합류하였으며, 이로써 대한국민회는 북간도지역 중요 군단을 통합하는 삼단연합(三團聯合)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19년 7월 구춘선과의 논의를 통해 대한국민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기로 협의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통합 제의를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범도부대의 지휘권이 대한국민회나 북로독군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상당한 수준의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이후 통합 군단은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깝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이 있는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조직을 개편하여 사령관에 최진동, 연대장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조권식이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사령관 최진동을 보좌하는 부관(副官)에 임명되었다.이 무렵 연합부대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대한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1천 2백여 명이었으며, 기관총 2문, 장총 약 900정, 권총 약 2백정, 폭탄(수류탄) 1백여 개, 탄환 군총 1정당 150발, 망원경 7개 등의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다.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가 발발하자 통합 독립군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고 있던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나남(羅南) 주둔 19사단 소속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 휘하의 보병대대와 기관총 1개 대대 등의 병력을 동원하여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고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월강추격대는 보병 37연대 제10중대[신곡(神谷) 대위 이하 70명의 혼성중대]와 같은 연대의 기관총 소대[자산(紫山) 준위 이하 27명] 및 보병 75연대 제2중대[삼(森) 대위 이하 123명]와 헌병대 소원(小原) 대위 이하 11명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여기에 경찰대 갈성(葛城) 경시 이하 11명과 이미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독립군에게 패한 바 있는 신미(新美)중대의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에 연합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정황을 보도했던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에서는 독립군 부대의 배치상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사령관 최진동과 부관 안무는 동북산(東北山) 서간(西間)에 재(在)하여 지휘(指揮)케 했다”라고 하여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부각하고 있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백여 명, 경상 백여 명에 달하는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1920년 10월 21일 이후에는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부대를 지휘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확정하고 만주지역 독립군단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독립군부대는 초기에는 중국 당국과의 협의 하에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는 ‘피전책(避戰策)’으로 대응하였다. 산세가 험하여 일본군의 접근이 어려운 백두산 산록으로 이동하여 우선 일본군의 예봉을 피하고 새로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결빙(結氷)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다 효율적으로 국내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일제와 중국당국의 이중의 압박을 차단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따라서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에 있었던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회의에서도 계화(桂和)·이범석(李範奭)·박영희(朴英熙)·현천묵(玄天默)·홍범도 등 독립군 간부들과 함께 현천묵의 의견에 따라 피전책을 유지하기로 하였다.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에서 국민회군과 함께 대한국민회의 지시에 따라 이란구 근거지를 떠나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 말경에 이도구(二道溝) 부근에 도착하였다. 당시 일제도 국민회군의 이동 경로에 대해 “안무가 인솔한 무장부대 약 200여 명은 음력 8월 상순 북왈류구(北曰流溝)에 왔으나, 8월 17일 경 다시 구세동(救世洞)으로 이동하였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도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이도구와 삼도구(三道溝)의 밀림지대로 이동해 왔으며, 집결한 독립군 병력은 약 2천여 명에 달하였다.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에 대한 학살과 방화 및 약탈이 계속되자 일본군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김좌진·홍범도·최진동 등과 함께 10월 16일 경 기존의 방침을 변경하여 일본군과의 일전(一戰)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작전회의를 개최하였다.회의에서 독립군단은 청산리 부근의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되, 독립군부대를 3개 연대로 편성하여 적을 섬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1연대는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6개 중대로 편성되어 완루구(完褸溝)(일명 : 만록구) 중앙 산록에 배치되었으며, 제2연대는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2개 대대로 편성되어 이도구 왼편 고지에, 제3연대는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6개 중대로 편성되어 이도구 오른편 고지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부대 배치 현황으로 보아 국민회군은 대체로 홍범도 연합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완루구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국민회군을 이끌고 여타 독립군단의 이동 경로를 따라 북만의 밀산(密山)을 거쳐 1921년 2월 초 노령 연해주의 이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원조를 기대하면 3월 자유시에 이르렀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단들은 현재 독립군의 처지에서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곳은 러시아가 유일하며, 일본이 러시아 백군(白軍)을 돕고 있는 상황에서 적군(赤軍)을 도와 러시아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향후의 독립운동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에 자유시에 도착한 대한국민회군은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라는 통합군단에 참여하여 홍범도·서일(徐一)·조성환(曺成煥)·지청천(池靑天)·이용(李鏞)·채영(蔡英)·오하묵(吳夏默)·강국모(姜國模)·이계(李繼) 등과 함께 부대를 정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새로운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의 기대와 달리 연해주에서는 사할린의용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가 한인 항일부대 전체의 지휘권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발하자 부하들과 함께 연해주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돌아왔다.이후 북간도에서 옛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의 재건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1922년 9월 14일자에서는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 근거를 둔 독립단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사령관 안무의 활동에 대해 보도하기도 하였다. 즉 명령에 따라 북로사령부 부원 윤필주(尹必柱)와 김춘봉(金春逢)이 장백현(長白縣) 16도구(道溝)에 있는 남부선정단(南部先正團)의 윤덕보(尹德甫)와 협의하여 17도구 동차곡(東岔谷)의 민가에서 대소(大小) 수백 개의 폭탄을 만들어 각처의 동지들에게 보내고 대부분은 선정단 사무소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1923년 2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의 주도하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10인의 국민위원(國民委員) 중 1인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그러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4년 9월 6일 오후 3시경 용정촌(龍井村)에서 서쪽으로 30리쯤 떨어진 마안산록(馬鞍山麓)의 한 가옥에 잠복하고 있던 중에 이를 탐지한 용정 일본영사관경찰서 관헌의 습격을 받았다. 같이 있던 2명의 대원들과 함께 격렬한 총격전을 전개하며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 과정에서 복부에 탄환을 맞는 중상을 입었으며, 근처 자혜의원으로 이송되었으나 9월 7일 아침, 사망하였다. 교전 중 함께 있던 동지 이목(李穆)은 체포되었으며, 현장에서는 모젤권총 2정과 자동권총 1정 이외에 다수의 탄약이 압수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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