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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607
성명
한자 柳震九
이명 柳海史, 柳觀海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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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6 훈격 애국장
1914년 4월 간민회(墾民會)의 부속단체인 동제회(同濟會)의 총무로 활동하였고, 동년 8월 연길현(延吉縣)에서 국치기념일(國恥紀念日) 행사를 치렀으며, 1916년 12월부터 1918년까지 만주 연길현(延吉縣)에서 교향학교(敎鄕學校) 교사로 활동하였고, 1918년 노령 시베창으로 이동하여 교사로 활동하다 1920년 초 솔밭관 한족공산당에 가입하여 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22년 초 동양사회주의자대회(東洋社會主義者大會)에 참석하기 위하여 가다가 추풍(秋風) 솔밭관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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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만주와 러시아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일제에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희생당했다. 유진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 4월 만주에서 간민회(墾民會)의 부속단체 동제회(同濟會)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간민회는 1913년 2월 이동춘(李同春), 김약연(金躍淵) 등이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설립한 한인자치기관으로 한인들의 민족교육을 추진함과 동시에 한인들의 법적지위 향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함으로서 간도지역 한인사회의 형성을 가속화하였다. 또한 동년 8월에는 연길현(延吉縣)에서 국치기념일(國恥紀念日) 행사를 주도하였다. 유진구는 1916년 12월부터 1918년까지 만주 연길현 용지사(勇智社) 육도구(六道溝)에 건립된 교향학교(敎鄕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노령 시베창으로 건너가 민족교육에 종사하였다. 1920년 초 유진구는 솔밭관[松田關] 한족공산당의 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솔밭관 한족공산당은 러시아 내전의 와중에서 연해주 주둔 일본군과 러시아 백위군과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 공산당과 적군을 지지하였다. 이후 유진구는 1922년 초 추풍(秋風)에서 솔밭관 한족공산당원을 탄압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군 정찰대에 체포되어 피살(被殺)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豆滿江方面 中國領 狀況彙報(1914. 9.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4) ·排日思想을 抱持한 朝鮮人 發着郵便物 取締의 件(1918. 6.13) ·獨立新聞(1923. 3. 14) ·現代史資料(강덕상) 제27권 147면 ·朝鮮獨立運動(金正明) 제3권 423면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姜萬吉·成大慶, 1996) 30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유진구 유해사(柳海史), 유관해(柳觀海) 강원 김화(金化) 러시아 내전
본문
1886년 6월 22일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금성면(金城面) 초서리(初西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유해사(柳海史)·유관해(柳觀海)를 사용하였다. 전선산(全善山)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13년 이흥삼(李興三)과 광성학교(光成學校) 학생인 이만수(李萬洙)의 주도로 설립된 단지혈맹결사대(斷指血盟決死隊)에 대원으로 참가하였다. 결사대의 대장은 광성학교 교사인 장기영(張基永)이었다.1914년 4월 15일 국자가(局子街)에서 간민회(墾民會)의 부속 조직인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와 재간도조선인단체청년친목회(在間島朝鮮人團體靑年親睦會)가 통합한 동제회(同濟會)의 총무로 활동하였다. 회장은 조희림(曹喜林), 부회장은 남공선(南公善)이었고, 장기영(張基永)·계봉우(桂奉瑀)·조문백(趙文伯)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1915년 4월 초순 둥닝현(東寧縣) 삼차구(三岔口)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해주의 대한광복군정부 대표 이종호(李鍾浩)에게 급파되어 한·중 연합을 통한 거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5월 9일 중·일 간에 ‘21개조’가 타결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1916년 12월부터 옌지현(延吉縣) 용지사(勇智社) 육도구(六道溝)에서 교향학교(敎鄕學校)교사로 근무하였다.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시베창(西比廠)·(西北倉)(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남쪽 10리)으로 건너가 민족 교육에 종사하였다.1918년 6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 적위군에 가담하여, 8월 칼미코프(Камыков) 백군에 맞선 하바롭스크 방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투에 패하여 한인사회당 적위군이 흩어지자 연해주 수이푼(秋風) 다어재골(唐於子洞) 솔밭관(松田關)으로 옮겼다. 1918년 말 최추송(崔秋松) 등 여호인 청년 7명이 조직한 지방대를 지도하여 ‘우리동무군’으로 발전시키고, 『군성(群聲)』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1919년 초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허성환(許成煥)을 불러들여 우리동무군을 1개 대대 3개 중대로 재편하여 공산주의 조직과 교육 활동을 전개하고 항일 빨치산을 모집하였다.1920년 간도에서 이중집(李中執)·이영호 등과 7월 5일 고려공산당 연해주지방연합총회(일명 ‘솔밭관 한족공산당’)를 조직하고, 집행위원 및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기존의 우리동무군은 ‘솔밭관 공산당 군대’ 또는 ‘고려혁명군’으로 불렸다. 솔밭관 공산당 군대의 정치위원으로 부대 내에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정치 사업을 전개하였다.1921년 황운정을 비롯한 대원들을 러시아 공산당(볼세비키)에 입당시켰다. 솔밭관 공산당 군대는 7월 한경서(韓京瑞)·신우여(申禹汝)·윤형 등이 이끄는 신민단 부대와 최경천(崔慶天)·최성삼(崔成三)·신광호(申光浩) 등이 이끄는 한민회 부대를 받아들여 대대 규모로 재편됨으로써 수이푼(秋風) 지역의 대표적인 한인 빨치산 부대가 되었다.1921년 말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솔밭관으로부터 약 30km 떨어진 마을에 3개월간 은신해 있던 중 원호인 부농들의 밀고로 푸틸로프카(육성촌)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고문 끝에 1922년 1월 29일 사망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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