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412
성명
한자 南萬春
이명 南바베르, 南滿聰, 파벨 니키포로비치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10 훈격 애족장
1920년 1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공산당 산하 한인부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집행위원, 동년 7월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고려공산당의 보고’ 연설, 1922년 10월 치타민족성 소수민족부장으로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 참석, 1924년 고려공산당준비위원회 결성 등의 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남만춘은 1920년 1월 22일 결성된 러시아공산당 산하 이르쿠츠크위원회 한인부 회장으로 한인무장부대인 고려특립중대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발의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그 해 가을 북경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동년(同年) 7월,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겸 코민테른 파견대표자로 선출되어 코민테른 제3차 대회(1921. 6. 22~7. 12)에 참석, 한국대표단을 대신하여 '고려공산당의 보고' 연설을 하였다.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항일 신문 경세종(警世鐘)을 발간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2년 6월 경, 치타에 본부를 둔 암살단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석하여 상해파와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경, 독립당 측의 문창범·이동녕 등과 연립하여 노농독립정부를 조직하려고 시도하였다. 1923년 9월 25일, 일본 관동대지진을 독립의 기회로 여겨 블라디보스토크 노농정청으로부터 무기를 지급받고, 니콜리스크 등지의 한인을 소집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1924년 1월 중,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부근에 거주하는 한인을 기반으로 고려공화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출석하여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회 국제공산당대회에 '재러시아한인자치제실시안'이 제출되자 고려부(高麗部)에서는 제반의 준비를 정비하였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핍박받는 조선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일제의 무력 지배를 통계 자료를 이용해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1926년 중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의부와 제휴를 위해 협의하였고, 1927년에는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해 서울에 파괴·암살단을 파견하려고 폭탄 등을 준비했다고 한다.

1929년 소련 공산당 숙청 때 출당 처분을 당한 남만춘은 1938년 5월 일제의 첩자 행위를 했다는 누명으로 체포되어 동년(同年) 10월 총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上海에서 國民代表會議에 關한 件(機密 第388號 : 1922. 11.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上海地方(4)
  • 知多地方 不逞鮮人暗殺團 狀況에 關한 件(密公 第12號 : 1922. 9.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3)
  • 歐露 各地에서의 過激派 朝鮮人의 動靜(高警 第5283號 : 1921. 2. 26) 조선소요관계서류(3)
  • 시대일보(1925. 9. 2)
  • 高麗共産黨員의 行動에 關한 件(機密 第324號 : 1922. 12. 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鮮人 共産黨大會에 關한 件(機密公 第17號 : 1922. 11. 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知多鮮人共産黨 聯合大會 情況 報告의 件(機密 第93號 : 1922. 11. 3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上海國民大會 및 勞農政府의 新朝鮮國 後援에 關한 件(機密公 第18號 : 1923. 2.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4)
  • 日露條約 成立에 따른 在露高麗部의 行動에 關한 件(機密 第75號 : 1925. 3. 1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8)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 성대경 편, 1996) 158~159면
  • 1920년대 초 연해주에서의 고려인의 민족운동-김승빈과 남만춘의 자료를 중심으로-(전 뷔또르, 1993) 194~195면
  • 露領에 있는 武裝 不逞鮮人團의 整理에 關한 件(高警 第3934號 : 1922. 12.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京濱地方震災에 關한 國外情報(高警 第3093號의 18 : 1923. 10. 11)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4)
  • 大陸通信(第2217號, 1927. 9. 1) 彼處分 國文新聞紙 記事要項
  • 朝鮮思想家總觀(삼천리, 1933) 3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9집 851~85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787~788면
  • 極東 露領에서의 不逞鮮人의 狀況 報告의 件(機密 公第11號 : 1922. 9. 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鮮人과 過激派(3)
  • 치타에서 共産黨 不逞鮮人 會議 狀況에 關한 件(高警 第3306號 : 1922. 10. 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13)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만춘 남 파벨 니키로로비치 러시아 러시아내전,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
본문
1892년 8월 20일 러시아 원동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남창석(南昌錫)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인들이 1871년 개척해 사만리(四萬里)라고 불렀던 블라고슬로벤노예는 아무르강변에 위치한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었다. 여동생은 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와 마리야(Мария)였으며, 남동생은 표도르(Федор)였다. 아내 타이시야 마르코브나 남(Таисия Марковна Нам)과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한인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고려공산당의 대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한 혁명가였다. 또한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소수민족부장으로 1920~19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법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사업과 문화계몽사업을 전개한 연해주 한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러시아정교 세례명은 파벨 니키포로비치(Павел Никифорович)이다.1901년 학교를 가기 위해 블라고베센스크로 갔으나 학비가 없어 곧 학교를 그만두었다. 블라고베센스크 신학교 총장 디오니시의 도움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1908년 치타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군대에 채소를 납품하였다. 1910년 러시아 김나지움 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으로 입학하였다. 재학 중 『사상(Идея)』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차르 러시아에 반대하는 비밀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마르크스주의 동아리를 만들어 네르친스크 볼셰비키인 실로프, 브로체킨 등과 관계를 맺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치타역 철도 창고 파업 실행안을 작성하였다. 파업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잠시 감옥에 갇혔다. 1914년 5월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키예프에 도착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좌절되었다. 10월 5일 차르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어 키예프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단기 사관양성 교육을 받고 1915년 2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임관되어 옴스크 제20 시베리아 비상대대로 발령받았다. 1916년 소위로 진급하였다.1917년 2월혁명 이후 연대소비에트 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5월 러시아 제536연대의 5중대 중대장으로 서부전선으로 출정하여 중대를 지휘하다가 7월 전투 중 다리 부상을 입고 예카테린부르크로 후송되었다. 10월 카잔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평생 동안 다리를 절었다. 퇴원 뒤 장교식당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1918년 1월 의가사제대 판정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비밀리에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콜차크군에 동원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고 가족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도망쳤다.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와 계속 관계를 가지면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0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이르쿠츠크현위원회 고려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등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전투부대인 합동민족연대(인테르나치오날 군대)를 만들어 정치위원과 참모장으로 콜차크군에 맞섰다. 합동민족연대 안에는 한인 35명으로 구성된 고려특립중대가 있었다. 고려특립중대는 이르쿠츠크현위원회 고려부의 지도를 받았다. 합동민족연대는 이르쿠츠크 공방전에 참가하였으며, 승리한 후 3월 소비에트적군 제5군이 이르쿠츠크에 입성하자 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1920년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3월에는 이르쿠츠크현 당대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현위원회 소수민족부장이 되었다.1920년 7월 7일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공산당 제1차 대표원회의에 참석하여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축사를 하였다. 회의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선출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제1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5명의 중앙위원 중 1인이 되었다. 동시에 교통연락과장을 겸임하여 “해외와 러시아 각 지방 한인 단체와 연계를 수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1년 5월 4일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 「민족단체와 부르주아단체에 대한 태도」 의안을 보고하였으며, 마지막 날인 5월 15일 선출된 위원장 한명세 등 11명의 중앙위원회 위원 중 1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과 함께 그 해 6월에 열릴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참가할 대표자로 선출되었다.1921년 6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고려공산당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한명세와 함께 의결권을 가진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대회 석상에서 한국대표단을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대회가 종료된 후 의결권을 갖는 34명의 위원, 심의권을 가진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이 확정되었는데 심의권을 가진 위원에 포함되었다. 그 해 가을 코민테른이 부여한 임무를 받아 베이징대학(北京大學) 학생으로 가장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파견되어 공산주의 비밀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경찰의 추적을 받아 위험에 처하게 되자, 검거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치타로 귀환하였다.1922년 10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두 고려공산당을 통합하여 통일된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소수파로 몰린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장에서 퇴장하고 치타에서 별도의 당대회를 개최했을 때, 이에 가담하였다.1922년 10월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연해주로 돌아와 1923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극동국 소수민족부장이 되어 1924년까지 근무하였다.1924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출석하여 고려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 결성에 참여하고 러시아 원동 대표 자격으로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초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으나 준비위원회와 연계를 단절하고 코민테른 원동부장 보이틴스키와 함께 독자적인 공산당 결성에 나서 그 해 4월 17일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조선공산당의 모스크바 파견 대표 조봉암을 도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잠정 가입을 실현시켰다.1925년 말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부 현지기관에서 조선담당관으로 일하였다. 1926년 말까지 조선공산당 중앙기관지 『불꽃이스크라, Искра』의 편집에 종사하고, 국내에서 중국으로 오는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였다. 1927년 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출석하여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 관한 정치테제를 보고하였다.192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여 소련공산당 연해주 집행위원 겸 혁명자후원회 회장이 되었으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평양미곡토지개량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에 소련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하였다가 복당하였지만, 1934년 다시 출당을 당하였다.1937년 가을 강제 이주 당시 가족과 함께 카자흐스탄 쿠스타나이로 이주당해 처음에는 가축 수매를 관리하는 지방사무소에서 일하였고, 이후에는 쿠스타나이 지방 인민교육부서에서 경제전문가이자 통계원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5월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10월 12일 내무인민위원부의 판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하였다. 1959년 4월 23일 투르케스탄군관구 군법회의에 의해 복권되었다.러시아어로 된 정치논설 「오늘날의 조선」, 「조선농민의 상태와 농민운동」 등을 발표하였고, 『압박받는 고려(Угнетенная Корея)』(극동도서출판사, 1925년)를 저술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남만춘(관리번호:71412)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