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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117
성명
한자 全一
이명 全仁學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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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07 훈격 독립장
1915년 5월 간도지방에서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동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항(渡航)하여, 1918년 4월 한인사회당 창립에 동참하였고, 1919년 4월 이동휘를 도와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으며, 동년(同年) 12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서기를 지내고, 1920년 3월 상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고, 동월(同月) 신한촌에서 항일사상과 사회주의를 일본군대에 선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아 옥고 중 탈옥을 기도하다 다시 4년의 가형을 받았으며, 1928년 중국국민당.고려혁명당과 연락을 취한 일로 3년간 재류금지를 당하였는데 이를 위반하여 다시 1개월(個月)옥고를 치렀고, 1929년 7월 신간회(新幹會)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동년(同年)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 간부 김세연(金世淵)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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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기독교계통의 유력한 독립운동가로서 만주와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일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로 이주하였으며,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5년 5월까지 간도지방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같은 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도항(渡航)하여 1918년 4월 한인사회당 창립에 동참하였다. 1919년 4월 이동휘를 도와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으며, 8월에는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 서기로 취임하여 격렬한 항일기사를 게재하였다. 11월에는 남북 만주 각지와 연해주지역에 항일 비밀결사 소년단이 조직되자 니꼴스크 지부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전일은 1919년 12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서기를 지냈는데, 이 단체는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초까지 러시아지역, 만주지역 및 국내로부터 파견된 8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니콜리스크-우스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확대 개편된 한인 자치 단체였다.

1920년 3월 전일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항일사상과 사회주의를 일본군대 내에 선전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을 기도하다 다시 4년의 가형을 받기도 하였다.

1928년 전일은 중국국민당과 연락을 취한 일로 간도 일본영사관경찰에 의해 3년간 재류금지(在留禁止)를 당하였는데 이를 위반하여 다시 1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7월 신간회(新幹會) 복대표위원회(複代表委員會)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11월 제3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제3권 424, 425면, , 474면, 494면, 제5권 93면
  • 스탈린 시대(1934~38년)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모스크바, 2000) 1권 142면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십월혁명십주년 원동기념준비위원회 편찬, 1927) 46~47면
  • 동아일보(1921. 5. 8, 6. 6, 7. 9, 7. 26, 1927. 9. 17, 1928. 5. 5, 10. 15, 1929. 7. 1, 7. 6, 11. 24, 1930. 2. 19, 2. 27)
  • 騎驢隨筆 322~3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집 365면
  • 러시아 극동 및 만주지역 배일선인 유력자명부(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19 332면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6) 3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0권 102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전일 이명 전인학(全仁學) 함북 길주 한인사회당 조직, 러시아 내전, 연해주 일본 군대에 선전문 배포, 적유의용단의 탈옥 사건, 제3차 조선공산당(ML당) 사건, 신간회 복대표대회
본문
1893년 12월 25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덕산면(德山面)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서당과 공립농민학교(公立農民學校), 사립사범학교(私立師範學校) 등에서 면학했다. 1907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로 이주하여 기독길동학당에서 약 1년간 수학하였다. 1911년부터 국자가로부터 5㎞에 위치한 광성학교(光成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배일사상의 고취에 노력했다. 여기에서 광성학교의 교장 이동휘와 관계를 가지고 이후 활동을 같이 하게 된다. 1913년 광성학교 교사 장기영(張基永)이 대장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지혈맹결사대의 비서감 겸 재무로 활동하였다. 간민회(墾民會)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1914년 4월 이동휘를 비롯한 김립, 오영선 등이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해 광성학교의 일부 학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왕칭(汪淸)현 나자거우(羅子溝) 태평촌(太平村)에 설립한 나자거우사관학교(東林學校, 大甸學校)의 교사로 활동했다. 나자거우사관학교가 문을 닫은 후 1915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중국령 둥닝(東寧)현 등지에서 거주하며 기독교 전도사, 신문 기자 등이 되어 배일사상 고취에 애썼다.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개최된 한인 정치 망명자 회의에 참가하였다. 대회는 “볼세비키주의에 찬동하여 고려 혁명을 그 길로 촉진시키자”는 이동휘의 제안을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이동녕 등 이동휘의 제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순수한 독립운동만을 위해 ‘광의단(光義團)’이라는 무장 단체를 조직하되, 원동 소비에트 정부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결국 대회는 결렬되었다. 이동휘의 제안을 지지했던 김 알렉산드라·박애·유동열·김립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발기하였다. 1918년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참가하여 선전부원이 되었다. 6월 말 한인사회당 군사부장이자 사관학교 교장인 유동렬과 함께 한인 청년 100여 명으로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조직하여 지휘하였다.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의 봉기가 일어나 연해주 일대를 백군이 점령한 후, 우수리 카자크 아타만(지역 군정 장관) 칼미코프가 일본군의 원조를 받아 북진하여 하바롭스크를 공격하자, 유동렬과 함께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이끌고 원동 소비에트 정부의 요청에 따라 방어전에 참가했다. 뱌셈스크와 크라스나야 레츠카(Красная речка) 전투에서 백군에 맞서 격렬히 싸웠으나 패배하고 한인사회당 적위군 절반 이상이 전사하였다. 하바롭스크가 백군에 점령되자 아무르강을 따라 블라고베시첸스크로 퇴각하던 도중 백군에 체포되었다가 김 알렉산드라가 마련해 준 중국 여권을 이용해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김립·이인섭·유동렬 등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9월 16일 하바롭스크에서 처형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후 1919년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 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과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여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국내조선인대회(全露國內朝鮮人大會)’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내무부원으로 국민의회의 결사대 모집, 양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3월 17일 국내의 3.1운동에 영향을 받아 연해주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8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발행된 『한인신보(韓人新報)』의 총무 및 기자로 활동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장도정·김진·최성우·한용헌 등과 함께 일세당(一世黨)을 결성했다. 1920년 1월 31일 연해주에서 정변이 일어나 블라디보스토크 백파 정권이 무너지고 중간파와 혁명파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일세당은 이름을 한인사회당으로 바꾸었는데, 1920년 3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슬라브 정교 사원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총회에서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2월 14일 대한국민의회가 재건될 때 참가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의 적군 총사령관 안드레예프와 연락하여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 및 한국 내지와 일본에 있는 일본 군대에 항일 사상과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전문 5만 장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청진형무소에 재감 중 동지 14명과 함께 비밀 결사 적유의용단(赤油義勇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 8월 최용익·신대용·신예균 등 적유의용단원들과 함께 파옥(破獄), 도주를 결행하였다. 파옥, 도주 중 일본 간수들의 칼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다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도주·상해·불법 감금·공무 집행 방해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2차례에 걸쳐 감형을 받아 1927년 9월 16일 8년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12월 서울에서 김세연(金世淵)의 권유로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에 가입하였다. 북간도로 가서 조선공산당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지부를 설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민교육연구회(墾民敎育硏究會) 부회장이 되어 고려혁명당과 중국 국민당의 연계를 기도하였다. 1928년 4월 강현철, 윤철순 등 6명과 함께 용정(龍井)의 일본 영사관 경찰서에 체포되어 치안 방해라는 명목으로 3년간 재류 금지 처분을 받고 본적지인 길주로 송환되었다. 다시 북간도로 가서 활동하다가 9월 11일 재류 금지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개월을 받고 복역한 후 또다시 길주로 송환되었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서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본정(本町)경찰서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11월 2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2월 2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되어 복역하다 1934년 9월 30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소련으로 건너갔다. 소련으로 건너간 후 하바롭스크에서 주직업 동맹 인쇄소 교정원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3월 18일 내무 인민 위원부(НКВД) 국가 보안부에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원동 변강 내무 인민 위원 부 3인 위원회(트로이카)의 결정으로 최고형을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당하였다. 1957년 3월 13일자 원동 군관구 군사 재판소의 결정으로 혐의 사실 부재로 본 사건은 폐기되었으며 복권되었다.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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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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