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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學萬
이명 金學滿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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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년도 2012 훈격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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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8년 경 함경도(咸鏡道) 일대에서 의병부대에 자금을 지원하고, 동년 4월 경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계동학교(啓東學校) 교장(校長)을 지내는 등 민족교육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10∼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민회(韓民會) 회장(會長)으로 활동하고, 1910년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 등과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1년 3월 이후 중국(中國) 길림성(吉林省) 밀산현(密山縣) 봉밀산(蜂密山) 일대에서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한인정착촌(한흥동(韓興洞)) 건설계획을 추진하고, 1911∼1912년 권업회(勸業會) 총재(總裁)로 활동하였으며, 1917년 5월 일본(日本) 주북경공사(駐北京公使) 임권조(林權助) 처단계획에 참여하여 자금을 제공하고, 동년 6월 신한촌(新韓村)에서 민족신문 간행을 준비하였으며,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고, 1921년 12월 경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 단장(團長)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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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1907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계동학교 교장으로 활동하였고, 1910~1914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거류민회 회장, 성명회 조직, 권업회 총재로 활동하였고, 1911~18년 중국 밀산현 봉밀산 일대의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한 한인촌 건설에 매진하였고, 1921년에는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계동학교(啓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활동한 데 이어 1908년 명동학교(明東學校)·동흥학교(東興學校)·선흥의숙(鮮興義塾) 등 학교 설립과 운영을 적극 후원하였다. 1908년 1월경에는 함북에서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10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191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신한촌에서 이상설(李相卨)·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 등 6명과 함께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발표하면서 이른바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각국에 호소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범윤(李範允)의 독립군부대 편성에 필요한 자금을 적극 후원하였다. 1911년 5월 항일운동단체인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그해 12월 총재로 선임되었으며,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중국 밀산현(密山縣) 봉밀산(蜂密山) 일대에 독립군기지 개척의 일환으로 한인정착촌인 한흥동(韓興洞)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17년 9월 대동단결선언서(大同團結宣言書)와 찬동통지서를 받고도 봉밀산에 있던 탓에 서명하지 못하였다.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이른바 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1921년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林公使 암살음모에 관한 건(1917. 5. 4), 要注意鮮人表 進達의 건(1917. 5. 17), 조선인의 近狀에 관한 보고의 건(1917. 6. 20), 不逞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17. 10. 6), 排日鮮人의 大同團結의 宣言에 관한 건(1917. 11. 10), 排日鮮人의 林公使 암살음모 기획에 관한 건(1918. 3. 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6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19. 4. 1), 鮮人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1919. 4.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19. 6. 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 普通報 제9호(1919. 11.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3
  •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20. 8.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0
  • 排日 朝鮮人의 動靜에 관한 건(1910. 11.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
  • 12월 16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방 조선인의 동정(1911. 1. 11), 開拓里에서 조선인의 제2회 演藝會에 관한 건(1911. 2. 5), 2월 24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방 在留 조선인 동정(1911. 3. 9), 蜂密山에 관한 정보 진달의 건(1911. 3. 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 安重根資料集(국가보훈처, 1995) 제ⅲ권 542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78) 제7집 142~143·333~335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87) 제18집 410·419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97) 제34집 83~85·95~96면
  • 統監府文書(國史編纂委員會, 1999) 제5권 430~431면
  • 주된 不逞鮮人에 관한 조사보고 건(재만 민족운동가의 경력과 주소)(1921. 12. 10), 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1921. 12. 2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 러시아 極東 및 北滿洲지역 排日鮮人 有力者名簿(國家報勳處, 1997) 256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66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권 694, 747, 77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4권 117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권 200, 203면
  • 東亞日報(1936. 4. 1)
  • 皇城新聞(1907. 5. 29, 1908. 4. 23)
  • 海朝新聞(1908. 3. 12. 3. 24, 4. 5, 4. 7, 4. 22, 4. 30)
  • 勸業新聞(1912. 9. 8, 12. 19)
  • 獨立新聞(1920. 3. 30)
  •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1. 12. 19)(독립기념관 소장)
  • 10월 25일 이후 浦潮斯德지방 조선인에 관한 정보(1911. 11. 15), 조선인 근황 보고의 건(1911년 11월 이후 4개월간의 정보를 종합한 보고)(1912. 2.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 1912년 11월 調 在外 不良鮮人의 언동(1913. 3. 7), 浦潮地方 在住鮮人상황(1914. 1. 2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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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학만 金鶴萬 함남 단천(端川)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암살계획사건
본문
188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학만(金鶴萬)이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1910년 전후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鳳俊)과 함께 러시아 한인사회의 “영웅삼걸(英雄三傑)”로 인망이 높았다. 1908년 4월경 블라디보스토크 구개척리에 계동학교(啓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의병운동이 한인들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폐해를 절감하여, 1908년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의 국내진공작전에 반대하였다. 최봉준과 함께 동의회 총장인 최재형을 찾아가 의병운동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910년 이전 한인들의 경제적 안정과 민족운동근거지 개척에 힘썼다. 중국 미산(密山) 지역에 한인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을 전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미산 지역은 1909년 말 이승희(李承熙)가 미국의 국민회에서 ‘원동전권대표’로 파견한 이상설(李相卨)의 위탁을 받아 한인농민 100호를 이주시켜 “한국을 부흥시키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한흥동(韓興洞)(현 (臨湖村))이라 명명하였다. 이어 안창호(安昌浩)의 미주 국민회는 김성무(金成武)를 파견하여 미산 십리와(十里窪)에 토지를 매입하였고, 1911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류민회장을 맡고 있던 중 이상설로부터 남백포우자(南白泡子)에 토지를 구입해줄 것을 부탁받고 이를 수락하여 중국과 러시아지역의 한인 농민들을 이주시켜 한인 마을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지역은 이후 신민회(新民會)의 간부들의 독립운동기지의 유력한 후보지로서 적극 발전시키기로 하였던 곳이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1910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는 의거가 일어났다. 의거가 발생하자 일제 당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안중근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가 있고 배일사상을 가진 인물로 지목받았다.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상설·홍범도(洪範圖) 등 한인지도자들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자 편성한 13도의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연해주 각지의 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였다. 경술국치를 앞둔 1910년 8월 유인석·이범윤 등과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경술국치 후 연해주 한인사회는 내홍을 겪고 있었다. 특히 국내로부터 망명해온 인사들이 기호파(경기, 충청)·서도파(평안, 황해)·북파(함경)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하였다. 기호파의 일원으로 알려졌고 심지어는 기호파를 주도적으로 조직한 인물로 알려졌다. 특히 기호파와 서도파 간의 지방 파쟁의 대표적인 사례인 정순만(鄭淳萬)의 양성춘(梁成春) 살해 사건에서 기호파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파쟁의 문제점을 절감하여 거류민회장으로서 이를 중재·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911년 1월 16일 저녁 3파의 주요인물들인 이상설·안창호·차석보(車錫甫)·고상준(高尙俊)·김규섭(金奎涉)·유진율(兪鎭律)·김치보·신채호(申采浩) 등을 초청하여 작게나마 연회를 열고 고국의 독립만세를 3창하는 등 단합을 모색하였다.러시아 당국의 명령으로 구개척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새로 조성된 신개척리(신한촌)로 한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그 직후인 1911년 6월 22일 거류민회장을 사임하고 새롭게 조직된 신한촌민 회장으로 선출된 김병학(金炳學)에게 민회 관련 장부 일체를 넘겨주었다. 1911년 12월 19일 한민학교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아 출범한 권업회(勸業會) 조직총회에서 유인석에 이어 이범윤·최재형과 함께 3인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2년 당시 신한촌민회장으로서 한민학교(교장 포드스타빈) 찬무회에 참석하여 학감을 더 두기로 하고 이상설을 선임하였다.권업회는 1912년 12월 31일 연설부장 김립(金立)의 주선으로 개최된 연설회에서 권업회의 설립 취지와 목적을 설명하고 동포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김립은 식산흥업과 교육에 대하여 개괄하고 한국의 독립부흥을 설파하였다. 참석인원은 100여 명이었다.1914년 신병으로 고통받고 있던 애국지사 이갑(李甲)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연청구서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는데, 최병숙(崔秉淑)·최재형·이상설·김도여(金道汝)·이동녕(李東寧)·이동휘·이종호·정재관(鄭在寬)·안정근(安定根)·윤해(尹海)·문창범(文昌範) 등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1917년 5월 을사늑약 당시의 일본의 주한공사였으며 당시 주중공사(駐中公使)로 베이징(北京)에서 재직 중이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최병숙·서상구(徐相矩)와 함께 거사를 발기하였고 실행담당자로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응순(趙應順), 치타의 이강(李剛)·백원보(白元甫)·박영갑(朴永甲)이 참여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비 등 거사 자금을 기부한 인물로 최병숙·서상구(徐相矩)·김치보(金致寶) 등과 함께 거사의 중요인물로 지목되고 있었다.1917년 7월 러시아혁명 이후 최병숙·김치보·최재형·차석보·최만학(崔萬學)·윤능효(尹能孝) 등과 한글신문을 발간할 계획으로 서간도에 머물고 있는 양기탁(梁起鐸)을 주필로 내정하고 초청하고자 했으며 발간취지서 발송에 착수하였다. 1917년 7월초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발간된 『한인신보(韓人新報)』는 그 성과였다.박용만(朴容晩)과 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 상하이(上海)지역의 한인 지도자 13명이 연서(連書)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이 각지로 배포되었다. 대동단결선언은 1917년 9월 초순경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송부되어 왔다. 이때 그와 함께 이규풍(李圭豊), 한인신보사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받았다.1910년 후반 중국 만주 미산 지역으로 이주하였지만,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체류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중국 만주 지린(吉林)의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계열 인사들이 주도하여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1919년 12월에는 노인단(老人團) 단장으로 활약했다.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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