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487
성명
한자 姜永韶
이명 姜永昭, 姜永召, 姜泳韶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2011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3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5년 5월 하와이에서 항일운동 등을 목적으로 에와친목회를 조직했으며, 1909년 1월 합성협회(合成協會)공립협회(共立協會)를 합하여 국민회(國民會)를 성립했고, 이후 1909년~1910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 총무, 1911년~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1912년~1914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학무 등을 각각 역임했으며, 1912년 3월 신한민보사 사무원으로 있었고,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과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고, 1914년~1915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를 맡았으며, 1916년과 1920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역임해 활동했고, 1918년과 1924년~1927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서기를, 1919년 4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로 있었으며, 1919년 5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특파원으로 황사용(黃士容)과 함께 하와이로 가 독립운동에 관한 총회를 열고, 하와이지방회와 독립단(獨立團)과의 합동을 알선하는 등 활동했으며, 1922년 신한민보사 편집장과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하와이 지국장을 맡았고, 1930년 2월 시카고 대한인공동회 재무를, 1930년 11월에는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을 지냈으며, 1911년부터 1931년까지 지속적으로 독립 의연금을 낸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강영소는 1905년 4월 1일 미국 하와이에 이주하여 6년여를 살았다. 1905년 윤병구,정원명과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에와친목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강영소는 에와친목회의 주도자들인 윤병구,이태수 등과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져만 갔다. 이에 하와이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진회, 자강회, 의성회, 국민동맹회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결성하였다. 하와이의 합성협회는 1909년 2월 미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합동하여 국민회(國民會)가 되었다. 두 단체가 합동할 때 강영소는 고석주,김성권,민찬호 등과 하와이 대표로 선출되어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 2월 국민회는 미주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분리되어 있던 미주지역 한인사회 단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단체였다. 조직의 목표는 미주 사회의 안녕과 자치 신장,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었다.

하와이 국민회의 총서기를 맡아 활동하던 강영소는 1910년 10월 미본토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미본토로 이주한 후에도 강영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지방 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나아갔다. 1913년 5월에는 안창호가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을 때 단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16년에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행동통일을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을 하와이에 파견하였다. 강영소는 하와이 한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원조하라고 설파하여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에 합의하여 1919년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영소와 황사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은 결렬되었다.

하와이에서의 특파 활동을 마친 강영소는 다시 미본토로 돌아와 1919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헌신하였다. 이 같은 강영소의 애국적인 활동과 동포사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22년 1월 국민회 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강영소는 시카고지방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共立新報(1909. 1. 13)
  • 新韓民報(1909. 2. 10, 1911. 3. 8, 8. 16, 1912. 1. 1, 3. 18, 1913. 6. 23, 1914. 8. 20, 9. 10, 1916. 2. 8, 1917. 2. 15, 1918. 12. 19, 1919. 4. 10, 5. 17, 11. 22, 1927. 11. 16, 1929. 10. 13, 1934. 8. 30)
  • 흥사단우 이력서(독립기념관)
  • 미주흥사단 자료(독립기념관)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486, 661~662면, 제9집 598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제6권 145면, 제11권 9~10, 115, 250, 283, 303면, 제12권 339~340, 384~385면, 제19권 439면, 제20권 17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영소 호 : 창해(滄海) 평남 증산(甑山) -
본문
1886년 2월 18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에서 부친 강명화(姜明化)와 모친 송씨 사이의 6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호는 창해(滄海)이다. 10대에 증산군 공립소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이전 결혼하였다. 1905년 4월 부친, 형 강영대 부부 등과 함께 하와이 이민을 결행하여 하와이 오아후 섬 에와농장에 배치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5년 하와이 에와농장에서 조직된 친목회와 1906년 호놀룰루에서 조직된 공진회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곧 미국 본토로 이주한 가족과 떨어져 1910년 10월까지 하와이에서 머무르며 교민 봉사와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06년 기독교의 학습인으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1907년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9월 하와이 각처의 한인 단체들이 국권 회복 후원과 교민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라는 새 단체로 통합되자, 총무와 서기 등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09년 2월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국민회로 통합될 때 하와이 측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로 헌신하였다. 또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발행한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의 사무 겸 재무 일과 한인식산흥업회사의 서기 등으로 활동하느라 호놀룰루에서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양하고 헌신적인 사회봉사로 건강을 해쳐 1910년 10월 미국 본토로 이주하였다. 1911년 5월부터 1912년 6월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총무(사무원)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도 함께 맡았다. 또 한인 교회의 청년회장과 권사직을 역임하였다.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페리가(街)의 셋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흥사단(興士團)이 창립되었는데, 2번 단우로 참여하였다. 1914년과 1915년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무로서 총회장 이대위(李大爲)를 보좌하였으며, 1916년에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30세에 총회장을 맡을 수 있던 것은 공공의식과 책임감이 있고 사무처리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집안의 우환도 적지 않았다. 총회장 재임 중 6세 딸이 사망하였고, 부인도 수술을 받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1917년도 총회장에 다시 선임되자 바로 사임하였다. 이후 시카고 부근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인과 아들은 1918년 초 부친의 귀국에 동행하였으나 부인은 귀국 도중 사망하였다.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원으로 선임되었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중앙총회의 재무 등을 맡았으나, 곧 하와이 특파위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한인 사회의 통일을 위해 진력하였다. 1920년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북미총회 재건에 앞장섰다. 국민회에서는 총회장 재임 시 공적을 기려 상여금과 국민회 훈장을 수여하였다. 1921년 6월부터 1년 6개월간 하와이에서 사업을 하다가 1923년 초 강혜순과 재혼하고 시카고에서 김경(金慶)의 도움을 받아 식당업에 진출하였다. 식당이 확장되면서 형제들과 함께 ‘강씨형제 카페테리아 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를 설립하여 1931년에는 3개의 식당을 운영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시카고에서도 한인 사회와 민족운동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와 시카고 한인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1928년 재만동포문제 대책강구회 위원과 국내 한인수재구제회 서기, 1929년 임시정부 임시재정후원회 위원, 1930년 국내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시카고공동회 발기인 겸 재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0년 11월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미국의 2대 도시인 시카고를 중심으로 동부 지역 한인들의 단결과 소식을 기대한 신한민보사의 지국 설치로, 이후 『신한민보(新韓民報)』에는 시카고와 뉴욕 등 동부 한인 관련 기사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단순한 사업가로 그치지 않고, 재정적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일찍부터 국민회를 비롯한 민족운동에 가능한 금액을 지원해왔는데, 사업이 성공하면서 더욱 많은 재정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시카고에서는 1930년 전후 대공황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경과 함께 각종 민족운동이나 한인 관련 행사를 지원하였다. 국민회의 각종 의무금과 지원금을 비롯하여 시카고 한인교회나 신한민보사 지국 등에 소요된 적지 않은 재원을 김경과 함께 부담하였다. 국민회의 실무자로, 지도자로 활동하여 국민회의 후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1931년 1월 11일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제22회 국민회 대의원회에 참가하여 송종익(宋鍾翊)·홍언(洪焉)·김동우(金東寓)와 함께 통일문제연구위원에 선임되어 미주 한인 통일 문제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단체나 당파를 넘어서 민중의 역량을 기초로 한 새로운 미주 한인의 통일을 주장하였는데, 흥사단의 일부에서 이를 문제로 삼기도 하였다. 1920년대부터 흥사단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고, 적어도 1930년 이전에 흥사단을 탈퇴하였던 것 같다. 통일운동에 적극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며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을 총괄하고 식당도 직접 운영하다가 1931년 8월 고혈압으로 뇌혈관이 터져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었다. 간호와 휴양 등으로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가 1934년 8월 26일 운명하였다. 8월 28일 어빙 파크(Irving Park)에 안장되었다. 사후 친구들은 그의 국민회에 대한 부단한 봉사를 기억한다는 비문을 만들어 세웠다. 그를 비롯해서 가족 6명도 모두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되었다. 부친 강명화는 애족장(2012), 형 강영대는 애족장(2013), 동생 강영문은 애족장(2012), 강영상은 대통령표창(2013), 강영각은 건국포장(1997)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외소재 미국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강영소(관리번호:7048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