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강영소는 1905년 4월 1일 미국 하와이에 이주하여 6년여를 살았다. 1905년 윤병구,정원명과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에와친목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강영소는 에와친목회의 주도자들인 윤병구,이태수 등과 1906년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를 결성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져만 갔다. 이에 하와이의 대표적인 단체인 공진회, 자강회, 의성회, 국민동맹회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결성하였다. 하와이의 합성협회는 1909년 2월 미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합동하여 국민회(國民會)가 되었다. 두 단체가 합동할 때 강영소는 고석주,김성권,민찬호 등과 하와이 대표로 선출되어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하였다. 1910년 2월 국민회는 미주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분리되어 있던 미주지역 한인사회 단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묶어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단체였다. 조직의 목표는 미주 사회의 안녕과 자치 신장,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었다.
하와이 국민회의 총서기를 맡아 활동하던 강영소는 1910년 10월 미본토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미본토로 이주한 후에도 강영소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샌프란시스코지방 대의원, 신한민보사 사무원 등을 역임하면서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나아갔다. 1913년 5월에는 안창호가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을 때 단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16년에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행동통일을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을 하와이에 파견하였다. 강영소는 하와이 한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원조하라고 설파하여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에 합의하여 1919년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영소와 황사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은 결렬되었다.
하와이에서의 특파 활동을 마친 강영소는 다시 미본토로 돌아와 1919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헌신하였다. 이 같은 강영소의 애국적인 활동과 동포사회를 위한 노력에 대해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22년 1월 국민회 훈장을 수여하였다.
이후 강영소는 시카고지방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共立新報(1909. 1. 13)
- 新韓民報(1909. 2. 10, 1911. 3. 8, 8. 16, 1912. 1. 1, 3. 18, 1913. 6. 23, 1914. 8. 20, 9. 10, 1916. 2. 8, 1917. 2. 15, 1918. 12. 19, 1919. 4. 10, 5. 17, 11. 22, 1927. 11. 16, 1929. 10. 13, 1934. 8. 30)
- 흥사단우 이력서(독립기념관)
- 미주흥사단 자료(독립기념관)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486, 661~662면, 제9집 598면
- 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제6권 145면, 제11권 9~10, 115, 250, 283, 303면, 제12권 339~340, 384~385면, 제19권 439면, 제20권 17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