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1867년 함경북도 이원군(利原郡)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송현이다.
1901년경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고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1914년 10월 당시 부인 우씨(47세)와 아들 김병윤(15세), 딸(7세)과 함께 생활했으며, 직업은 화물수송업이었다. 1911년 12월 18일에 러시아 연흑룡주총독부의 공식인가로 설립된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권업회(勸業會)에서 활동하였다. 권업회 창립 당시 참여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창립 직후인 1912년 4월 14일에 개최된 권업회 제1회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면서 권업회 활동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5월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창간호가 발간된 이후 8월 25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권업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총무에 선출되었다. 1912년 11월 24일에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의장을 회장으로 개칭하면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10월 이동휘(李東輝)의 연해주 도착을 계기로 한인 사회의 단합을 위해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원로 최재형(崔在亨)이 회장, 정재관(鄭在寬)이 총무, 권업신문 사장겸 주필로 이상설(李相卨)이 선출되었지만, 파쟁이 재연되었다. 회장 대리로서 1913년 12월 18일 권업회 창립 2주년 기념축하회를 주관하였다. 이후 1914년 2월 1일에 개최된 권업회 총회에서 의사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권업회의 총무 및 실업부장·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러시아 한인 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진력하며, 오랫동안 권업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일본 당국이 “권업회 실력자”로 파악하고 있었다. 1914년 1월 18일에는 최문경(崔文敬)에 이어 신한촌민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3월 15일 개최된 신한촌민회 총회에서 러시아 당국의 요구로 신한촌민회가 담당해왔던 청결사업을 권업회로 이관하면서 민회 해산과 권업회로의 통합을 결정하였다. 곧이어 개최된 권업회 특별총회에서 한인이주50주년기념사업회 회장 최재형이 업무 과다를 이유로 사임하자 후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권업회 총회는 청결사업을 담당할 위생부를 신설하고, 심사부를 민사부로 개칭하는 한편, 위생부장에 김태봉(金泰奉), 교육부장에 김병흡(金秉洽), 민사부장에 채성하(蔡成河)를 선출하였다.
민회를 흡수하여 조직력이 한층 강화된 권업회 회장으로서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 정부의 교섭을 받은 러시아 당국은 권업회, 합성회사 등 한인 단체들을 해산하고 『권업신문』을 폐간시켰다. 이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애국지사들의 명단을 러시아 정부에 넘겨 주며 러시아에서의 추방과 일본 정부로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관계로 들어간 상황에서 러시아 당국의 체포를 피해 신한촌을 떠나 오지로 도피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 예상되는 제2의 러일전쟁을 기회로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1913년 말 이동휘·이동춘(李同春)·황병길(黃炳吉)·김영학(金永學)·황보정걸(皇甫正杰)등과 애국저금단(愛國貯金團)을 발기하였다. 이형욱(李亨郁)이 단장이었고, 김인령이 총무인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동포들로부터 의금(義金)을 모아 독립전쟁을 위한 무기 구입이었다. 또한 이종호(李鍾浩)가 주도해서 1915년 봄에 조직한 북빈의용단(北濱義勇團)에도 협력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항일독립전쟁을 주도할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활동의 일환으로서 1915년 6월, 북간도 왕칭현 나자거우(羅子溝)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양성과 무기 구입 등을 추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러시아 당국의 정치적 탄압과 불안정한 도피생활 탓에 병을 얻었다. 1917년 2월 4일 사망하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16년 12월 27일 오전 8시 뇌일혈로 쓰러져 인사불성에 빠져 다음 날 28일 오후 2시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휘·이상설·이종호, 김치보(金致寶) 등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호상인으로서 내외 각지에 부고하였다. 한인 사회의 신망이 두터워 한인 유력인사 40명이 추도기를 만들어 장례식에 바쳤다. 부고를 받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는 「부고」와 함께 「해삼위 거류민장의 장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였는데, “극동 동포의 모두가 의지하는 만리장성”이라고 평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