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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278
성명
한자 具哲成
이명 具哲錫, 具鐵石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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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06 훈격 건국포장
1920. 3월 도만(渡滿)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입 독립군(獨立軍)으로 활동하였고,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1920. 10)(後) 노영(露領)으로 이주(移住)한후 1929년 노영(露領)항일군(抗日軍)적군(赤軍)보병 중위(步兵中尉)가 되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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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러시아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항일전에 참여하였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다. 구철성은 1920년 3월 북간도(北間島)에서 북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모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고 1920년 말 노령(露領)에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편제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후 1923년 11월말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제군사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까지 다수의 한인들과 함께 군사학 등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라즈돌노예에 있는 제2네르친스키부대에서 근무하였으며, 1929년경에는 러시아령 연추(煙秋)에서 보병 중위로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1937년 구철성은 일본 경찰에 정보를 넘겼다는 혐의로 러시아 태평양함대 내무인민부 합동국가보안부에 체포되었다. 11월 17일 내무인민위원부 3인위원회에 의해 총살형을 선고받고 12월 26일에 형이 집행되었으나, 1957년 9월 27일 태평양함대 군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복권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外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123면
  • 스탈린 시대(1934~1938) 정치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 1권(삼일문화원, 2000) 91, 226, 227, 230, 231, 234~23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구철성 - 함경북도 온성(穩城) -
본문
1892년 2월 25일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동화동(東和洞)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어릴 적 이름은 철석(鐵石), 이명으로 철석(鐵錫)을 사용하였다. 29세 무렵인 1920년 3월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1920년 3월에 북간도로 건너가 무장 항일 단체인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가담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사관연성소(仕官鍊成所)를 설치해 장교를 양성하는 한편, 군자금 모금을 통해 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 대한군정서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는데 사관연성소에서 장교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 대첩 이후 무장 독립 단체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인 밀산(密山)에 집결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 역시 밀산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대한군정서를 따라 다른 독립군단과 함께 20만의 한인 사회가 형성된 연해주 이만(현재의 달레네첸스크) 일대로 이동하였다. 이만에 도착 후 북상하여 자유시(自由市,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다. 1920년 말 자유시 도착 후 대부분의 독립군과 함께 한인 부대인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사할린의용대)에 편제되었다. 1921년 6월 28일 한인 부대인 대한의용군은 상급 기구인 고려군정의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러시아 군대의 공격을 받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원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게 되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러시아에 정착하였다. 1923년 11월 말 레닌그라드(현 상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제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다시금 무장 항일 투쟁 의지를 불태우며 공부한 끝에 1926년에 다수의 한인과 함께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하였다. 이후 연해주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하마탕)에 있는 제2네르친스키부대에서 근무하였다. 이어서 1929년 무렵에는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 거주 지역인 얀치헤(煙秋, 시모노보Симоново)에서 보병 중위로 복무하였다. 얀치헤는 두만강을 건너면 한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국경의 요충지이자 북간도 일대인 훈춘과 가까운 접경지였다. 한때 한인이 2,000명 이상 거주하였던 곳이고 연해주 의병 단체인 동의회(同義會)의 본부가 자리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곳의 한인 마을은 폐쇄되고 한인들은 강제 이주당하였다. 얀치헤의 러시아 부대에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37년 일본 경찰에 정보를 넘겼다는 억울한 혐의를 받아 러시아 태평양함대 내무인민부 합동국가보안부에 붙잡혔다. 11월 17일 내무인민위원부 3인위원회에 의해 총살형을 선고받고 12월 26일에 총살당하였다. 1937년은 스탈린이 소수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한인을 강제 이주시킨 해였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洪範圖), 김한(金翰) 등 많은 한인 지도자가 일제의 밀정 역할을 하였다는 억울한 죄목을 받고 처형되거나 축출된 점을 고려하면 그의 정보 유출 행위도 조작된 것이었다. 실제로 스탈린 사망 후에 많은 한인이 복권되었는데 그 역시 1957년 9월 27일 복권되어 그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밝혔다. 딸인 구 스웨틀라나(Ku (Degay), Svetlana)가 저술, 발간한 3권의 책인 『스탈린 시대(1934~38년) 정치 탄압 한인(고려인) 희생자들』의 영향으로 그동안 억울하게 러시아에서 처벌당한 많은 애국지사가 한국에서 재조명되고, 공훈을 추서받을 수 있었다. 2008년 구 스웨틀라나는 러시아 거주 후손으로서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 행사 방문차 모국에 방문하기도 하였다. 201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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