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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70142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昌均
이명 金東允, 金三厚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가족관계창설일 2023-02-17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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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24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22년 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소속의 의용군(義勇軍)으로 평북(平北) 위원(渭原)에 들어와 적정(敵偵)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강계군(江界郡) 소재(所在)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였고, 1923. 1월 (음) 통의부(統義府) 의용군(義勇軍)에 가입하였으며 1923.8월 참의부(參議府)에 참여한 후 1924. 5.19 참의부(參議府) 2중대(中隊) 제2분대장(分隊長)으로 조선총독(朝鮮總督) 재등실(齋藤實)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국경을 순찰할 때 강계군(江界郡) 마시탄(馬嘶灘)에서 이를 저격하였고 동년 8월 화창경찰관(和昌警察官)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926. 9.13 참의부(參議府) 1중대(中隊) 소대장(小隊長)으로 국내에 들어오다 위원(渭原)에서 피체(被逮)되어 1928.11.6 사형(死刑)을 언도받았다가 감형(減刑)되어 무기징역(無期懲役)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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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안북도 창성(昌城) 사람이다.

김창균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김창균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한독립단 창립총회에서는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黙)·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

김창균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에서는 이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김창균은 1922년 봄 대한독립단 백광운(白狂雲)의 부하로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江界) 청풍동(淸風洞)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하였으며, 동지 신영숙(申永淑)·현성희(玄成熙)·김종호(金宗浩) 등과 함께 위원군 송면(松面) 석포동(石浦洞)에서 밀정 송의봉(宋義鳳)을 사살 처단하였다.

1923년 음력 정월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8월 23일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와 그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이루어진 1920년대 전반기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재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12월에 조직을 개편하여 보다 군사적인 면에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개편된 조직을 보면, 총장 김동삼, 비서과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의용군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부관 김창훈(金昌勳), 군수국장 맹철호(孟喆鎬), 군무국장 이종건(李鍾乾), 호위국장 문학빈(文學彬), 재무부장 오동진, 학무부장 이병기(李炳基), 법무부 검무국장 김신택(金信澤), 사법국장 현정경, 교통부 교통국장 황동호, 실업부장 변창근 등이었다.

김창균이 소속된 통의부 의용군은 이 때 대대,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간부 명단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1소대장 김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

김창균은 이 대한통의부의 소대장 참위(參尉) 전세웅(田世雄)의 부하가 되어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 경찰부 수색대를 저격하기도 하였다.

김창균은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 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였다. 이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으며, 창설 당시의 주요 부서와 주요 간부는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 제2중대장 최석순,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대(金蒼大),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등이다.

1924년 8월 1일에는 이두성(李斗星)의 지휘하에 단원 6명과 함께 제2중대 제2분대장으로 위원군 화창면(和昌面)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그 후 각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김창균은 1926년 9월 13일 참의부 제1중대 소대장으로서 변장을 하고 중국 유수림자 강구(江口)로부터 평북 위원군 서태면(西泰面) 신천동(新川洞)으로 건너오다 위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7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이 개정되어 1928년 3월 14일 사형이 구형되었고, 동년 9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제1심대로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리고 동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유인(裕仁) 즉위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9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70·473·4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7권 470~4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1집 415·418~421·423면
  • 동아일보(1926. 9. 17, 1927. 12. 21, 1928. 3. 4, 9. 15)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2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254·647·768·913·928·931면
  •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341·34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2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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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창균 김동윤(金東允) 평안북도 위원(渭原) 사이토저격사건, 강계주재소습격사건, 화창주재소습격사건
본문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서태면(西泰面) 신천리(新川里) 출신이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1892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동윤(金東允)을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주소는 만주 지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樹林子)이다.1922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백광운(白狂雲)의 부하로 의용군에 가입하였다. 이 해 봄 의용군 1중대 제2소대 제3분대장인 김종호(金宗浩)와 신영숙(申永淑)·현성희(玄成熙) 등과 국내로 들어와 강계군(江界郡) 청풍동(淸風洞) 주재소를 습격하여 교전을 벌였다. 위원군 송면(松面) 석포동(石浦洞)에서는 밀정 송의봉(宋義鳳)을 사살하고, 강계별하(江界別河)에 있는 장명준(張明俊)의 가옥을 소각시키는 등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1923년 (음)1월 이희준(李義俊)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에 가담했다. 소대장인 참위(參尉) 전세웅(田世雄)의 부하가 되어 만주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들어와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경찰부 수색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1924년 5월 19일 당시 참의부(參議府) 제2중대 1소대 소속으로 소대장인 참위 한웅권(韓雄權), 오장(伍長) 이춘화(李春和), 같은 일등병인 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려하(金呂河)·전창근(田昌根) 등 50여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제3소대장인 장창헌(張昌憲)의 지휘 하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이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중류를 따라 국경을 순찰하면서 강계군 마시탄(馬嘶灘)을 통과할 때 저격하고자 하였다. 19일 오전 지안현(集安縣)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에 잠복하고 있던 중 강안에서 프로펠러가 지나는 것을 보고 돌격하였다. 총독은 뒤에 오는 배에 타고 있어 성공하지 못했고 경호선에 탄 경비원들과 몇 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다.7월 12일에는 2중대 소속인 김창옥(金昌玉)·이기섭(李基涉)·한영환(韓永煥)·김영하(金永河)·신용섭(申龍涉) 등과 평북 위원군(渭源郡)의 화창면(和昌面) 주재소를 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지 신용섭이 사망하였다. 8월 1일에는 이두성(李斗星)의 지휘 하에 대원 6명과 함께 화창주재소의 뒷산에 올라가 폭탄 3개를 던지며 공격했으며, 이후 황희운(黃稀雲)에게 30원, 황윤하(黃允河)·박기룡(朴枝龍)에게 20원씩, 배응도(裵應道)에게 50원, 이지수(李枝洙)에게 10원, 진군팔(泰君八)에게 20원의 군자금을 징수해 이의준(李義俊)과 만주로 건너갔다.1926년 9월 13일 참의부 1중대 소대장으로 변장하고 유수림자 강 어귀에서 평북 위원군 서진면 신천동(新川洞)으로 건너오다 위원경찰서에 붙잡혔다. 1927년 12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1928년 3월 14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강도·방화·주거침입·통신방해·전신법위반 등으로 이의준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그 해 9월 15일 1심대로 사형이 구형되자 재판장에게 “나는 죽기를 싫어함도 아니오, 죽음을 회피하려는 구구한 변명도 아니니 사형을 당하거나 와석종신(臥席終身)을 하거나 죽기는 일반이오. 결국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오. 그러나 3·1운동 이후로 많은 동지가 죽었으되, 오늘날 나에게 사형을 구형함은 나의 행동에 비추어 너무 지나친 구형이 아닌가 생각하나 다만 내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사형을 준다면 사양할 바도 아니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1928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이미 각오한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퇴정하였다. 이후 히로히토(裕仁)의 일왕 즉위에 맞춰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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