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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048
성명
한자 金擎天
이명 金光瑞, 金應天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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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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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8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3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19년 도만(渡滿)하여 중국(中國) 서간도(西間島)에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부속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교관(敎官)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1920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동년 3월 각처 독립군(獨立軍)적군(赤軍)과 연합, 니항전투(尼港戰鬪)에 참가하여 일본군(日本軍) 및 러시아 백군(白軍)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수청(水淸)에서 동포(同胞)들을 괴롭히는 고산(告山) 마적배(馬賊輩) 240여명을 몰살시켜 동포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였고 1921년 (初)에는 소성(蘇城)에서 창해독립단(滄海獨立團)을 결성하고 그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만에서 열린 한인무장유격대의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였다. 1922년 1월 노령 시부라고에 설치된 무관학교(武官學校)에서 사관생도를 교육하였고, 적군(赤軍)과 함께 이만에서 백군(白軍) 수백명을 사살하고 이만(市)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동년 10월에는 소성(蘇城)(스챤)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동부사령관(東部司令官)으로 대백군(對白軍) 및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포조(浦潮)에서 윤해(尹海), 김규식(金奎植) 등과 민족당(民族黨) 주비회(籌備會)를 조직한 바 있으며, 이후 블라디보스톡의 사범학교 등에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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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수청지역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적토벌에 성공한 후 그는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군정(軍政)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은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21년 초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그는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는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의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그는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으로 이동한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그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그는 뽀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그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秋風)이었는데,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그가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그는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실망한 그는 1923년 4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리스크에 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은 그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소련정부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69面
  •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102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5卷 514~516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9卷 48面
  • 素昻先生文集(三均學會) 上卷 491面
  • 金日成正傳(林隱, 沃村文化社) 43~52面
  • 소련韓族史(鄭泰秀) 100·103·122·280·284·285·287面
  • 일제하극동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역사비평사, 1990) 159~161面
  • 정치적탄압 피해자 인정에 관한 증명서(모스크바 군관구 군사검찰부 부장, 1995. 11. 8)
  •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김블라지미로) 48~75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255·256·39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293·420·683·68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826面
  • 東亞日報(1921. 11. 27, 1922. 4. 28, 6. 2, 9. 10, 9. 26, 11. 19, 1923. 1. 27, 4. 26, 7. 29)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496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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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경천 본명 : 김광서(金光瑞), 이명 : 김경천(金警天·金敬天), 김응천(金應天), 김현충(金顯忠) 함남 북청(北靑) -
본문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서문외(西門外)에서 사족 출신인 아버지 김정우(金鼎禹)와 어머니 윤옥연(尹玉蓮) 사이에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다른 이름으로 김경천(金警天·金敬天)·김응천(金應天)·김현충(金顯忠)이 있으며,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포병 장교였고, 형 성은(成殷)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대한제국 군대의 공병대를 만들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경기 광주군(廣州郡)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와 형은 곧 일본으로 유학하러 갔으므로, 홀로 어머니를 모시며 한문을 배웠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살았다. 1900년 여름 아버지와 형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형은 공병대 창설에 분주하고, 아버지는 육군 군기청장으로 근무함에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일본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5세 때인 1903년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시도하였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일본 유학생 파견자를 모집하였다. 최린(崔麟)·조용은(趙鏞殷, 조소앙)·김진용(金晉鏞) 등 50명의 유학생과 함께 1904년 8월 인천에서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므로 다른 유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사이 정규 예비학교의 보통과를 이수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군인이 될 결심을 하였으며,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할 길을 찾아보았다. 1905년 9월 1일 일본 육군대신의 추천을 받고 일왕의 허락을 얻어 자격시험을 본 결과, 학력 수준이 예과 2학년에 해당한다 하여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6년 겨울에 형이 사망함에 따라 6대 독자가 되었다. 연이어 1907년 봄 아버지까지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1907년 9월 1일 본과에 입학하여 1908년 7월 졸업하였다. 이후 기병(騎兵) 상등병(上等兵) 자격으로 도쿄의 기병 제1연대 제1중대에 입대하였다. 1909년 10월 도쿄 근교에서 부대 대항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하고 속으로 외쳤다. 1909년 12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졸업하였다. 그해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초대 총독으로 부임 예정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불러서 일본군 장교로 임관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해 12월 일본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제국의 유학생에서 일본군 장교로 처지가 바뀌었다. 1911년 8월 귀국해 혼인을 약속한 유정화(柳貞和)와 결혼하고 서울 사직동에 신혼집을 장만하여 할아버지, 누이 옥진(玉振)과 함께 거주하였다. 1913년 1월 가족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하였다. 1915년 6월 11일 장녀 지리(智理)가 태어났다. 그해 9월 기병 소위에서 중위로 승진하였고, 그해 육군 도야마학교(戶山學校), 1917년 육군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12월 육사 제26·27기생인 홍사익(洪思翊)·이응준(李應俊) 등과 제1사단에 근무하는 한국인 장교만의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17년 2월 8일 둘째 지혜(智慧)가 태어났다. 1918년 6월 9일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해 12월 도쿄의 기병연대로 복귀하여 재직하였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개조의 흐름과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보았다. 때마침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도 통지받아 알고 있었다. 몸도 추스르고 정세도 판단할 겸 다시 기병연대에 휴가를 신청하였다. 1919년 2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아내, 누이,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요양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준비도 통지를 받아 항일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화창한 3월 1일 오전 서울 시내에 있는 청년회관에 들려 윤치호(尹致昊)를 만났고, 이후 종로 일대에서 만세 시위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때 주변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받았다. 국외에서 여러 해 동안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서간도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9년 6월 6일, 31세 되던 때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이 되는 일본 육사의 3년 후배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수원까지 내려가 밤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으로 갔다. 6월 9일 서간도를 향해 출발하여 약 보름 만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의 대두자(大肚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하였다.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출신으로 며칠 먼저 와 있던 신팔균(申八均)을 만났다. 세 사람은 ‘천(天)’자가 붙은 호칭을 서로 붙여주기로 하고 신팔균은 동천(東天), 본명이 지석규(池錫奎)인 지청천은 청천(靑天), 그리고 자신은 경천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세 사람을 가리켜 ‘남만주 3천’이라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당시 200명 정도의 학생이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9월 중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결정에 따라 신팔균과 함께 무기를 구입하려고 러시아의 니콜스크를 향해 출발하여 가는 도중, 신팔균은 지린(吉林)에 남고, 몇몇 동지와 함께 창춘(長春)과 하얼빈을 거처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1920년 들어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이용(李鏞)·김하석(金河錫)·유동열(柳東說)·정재관(鄭在寬) 등 여러 독립운동가와 의견을 교환하며 한인 무장대를 편성하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비록 “북도(北道), 남도(南道), 서도(西道), 서울…자기들끼리도 당파가 있다. 아아, 이것이 대한이 망한 이유가 아닌가”라며 실망하였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중립이라며 “나는 생각한다. 군인은 군사행동의 실전지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가고, 삶과 죽음의 굴을 넘나들어도 좋으리라 한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실제 이후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공산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우수리스크의 파르티잔스크(수찬, Suchan, 水淸)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면서 한인 청년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볼셰비키 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러시아인 민병대와 합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마적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가을 외수청(外水淸) 일대에서 마적이 사라졌다. 1920년 9월 28일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교육을 실시하자는 북간도 독립운동 세력의 요청을 받고 출발하였다. 북간도에 가까이 갔을 즈음, 일본이 사주한 마적이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고 이를 명분으로 일본군이 북간도를 침입하자 독립군이 모두 흩어졌다는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머무는 곳 50리 밖까지 와 있던 일본군이 한인의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인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10월 19일 발길을 돌려 수이푼(秋風, Suifun)의 솔밭관 고려혁명군 본부로 돌아갔다. 솔밭관 고려혁명군은 1920년 7월 15일 결성된 조직으로 일본군·러시아 백군·마적 등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을 알렸던 한인 빨치산 부대이다. 이때 인근에 있던 혈성단(血誠團)의 김규면(金圭冕)을 만나 그가 이끄는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수이푼 일대의 마적을 소탕하였다. 한편에서는 군정의 책임자로서 살인사건과 같은 형사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도 벌였다. 1921년 4월 24일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총사령관이 되었고, 5월 아누치노(都兵河, Anuchino)에 있던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군용품을 나누어 사용하면서 마적 소탕에 집중하였다. 9월 들어 적군과의 공동 작전을 강화하며 백군과 여러 곳에서 싸웠다. 이즈음부터 1922년 가을까지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의 후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 사이에 벌어진 시베리아 내전에서 적군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1921년 11월 자신을 후원하던 적군 대장이 백군과 내통하는 바람에 러시아 백군에게 다우비허를 빼앗겨 수청 고려의병대를 이끌고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1922년 1월 말 이만에 있던 군비단(軍備團) 군인 40~50명이 백군에게 살해당한 데 대한 반격으로 이만을 점령하였으나, 병력이 모자라 퇴각하였다. 1922년 5월 이념을 묻지 않고 일본군 및 백군과 싸우며 독립 역량을 키우고자 이중집(李仲執)을 총재로 하는 고려혁명군이 결성되었을 때 수청에 본부를 둔 고려혁명군 동부사령부의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2년 6월 아누치노를 떠나 백군과 일본군의 허리를 끊고자 수이푼으로 이동하였지만, 한인의 일부 부대와 적군의 충돌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였다. 이에 적군 사령관이 한인 빨치산부대의 해산을 명령하자 자신의 부대를 해산시킴으로써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전투 지휘는 끝이 났다. 이즈음부터 적군 사령관에게 부탁받은 일본군의 군사학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는 데 한동안 몰두하였다. 한편에서 ‘나제즈다(희망)’ 또는 ‘앞으로’라는 이름의 한국인 협동농장을 만들어 동포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군인 위원으로 추천받아 회의에 참석하고자 2월 11일 니콜스크를 떠나 하얼빈·창춘·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처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 민족적 항일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기대와 달리 창조파와 개조파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9월에 스위스인이 운영하는 기선(汽船)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24년 3월 고려구락부를 조직하여 여러 곳과 연락을 취하며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검토하며 독립 방안을 논의하였지만, 사실상 민족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한촌(新韓村)과 니콜스크에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꽃을 가꾸는 등 한가로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1925년 2월 21일 서울에서 아내가 홀로 찾아와 7년 만에 만났다. 아내는 3월 11일 서울을 향해 떠났다. 7월 5일 아내와 자녀들이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 자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갈 작정으로 아내가 경찰에 여행권을 신청하였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자 세 자녀와 함께 사라졌는데 종로경찰서에서 행방을 조사 중이라는 기사가 있다. 니콜스크시에서 일시 거주하다 1926년 봄 수청의 다우지미 서개척(西開拓)에 집을 지어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1927년 개척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수청의 난채시(蘭採市)에 위치한 일명 한성동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29년 1월 31일 넷째 지희(智姬)가 태어났다. 1932년 봄부터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여 변강 합동국가보안국의 소수민족 부서에서 한국어·일본어·중국어 통역으로 일하였다. 7월 24일 다섯째 기범(奇凡)이 태어났다. 1934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사범대학의 초청으로 이주하였다. 대학에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1936년 가을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9월 29일 연해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인 자유박탈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가족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라간다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1939년 2월 4일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되자, 3월 가족이 있는 까라간다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독일인 농장인 코민테른 콜호스에서 작업부로 일하였다. 1939년 4월 5일 가족을 만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12월 17일 모스크바의 재판에서 간첩죄로 강제노동수용소 8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0년 1월 17일 러시아 북부에 있는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 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수용소의 부설 병원에서 비타민 결핍에 의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서는 그의 사망 날짜가 1월 2일·14일·26일 등으로 되어 있다. 1956년 재심에서 3년형 선고를 받은 1936년의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무죄를 선고받았고, 8년 수감을 내린 1939년의 재판도 1959년 2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93년 4월 14일 선포된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저술로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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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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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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