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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계립(崔溪立·崔系笠·崔桂立), 최봉설(崔鳳雪·崔鳳卨·崔鳳舌·崔鳳說), 최일륜(崔一崙), 최이붕(崔二鵬·崔伊鵬), 최웅렬(崔雄烈)이다. 아버지는 최문약(崔文若), 어머니는 오숙경(吳淑京)이다. 1916년 10월 간도(間島) 명동촌(明東村) 김하규(金河奎)의 딸 김신희(金信姬)와 결혼하였다. 1917년 장남 최동현(崔東鉉)을 낳았다. 1904년 4월부터 1912년 3월까지 간도 옌지현(延吉縣) 지인향(志仁鄉) 와룡동(臥龍洞) 창동학교(昌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1월 김중훈(金重勳)·이호반(李鎬班)·박두하(朴斗夏) 등과 함께 간도청년단에 참여하여 의사부원(議事部員) 겸 운동부원(運動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창동학교에서 간도청년단 단장 서성권(徐成權), 단원 김강(金剛)·윤준희(尹駿熙) 등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제 조선인 관리와 회사원에게 동맹사직(同盟辭職)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같은 달 25일 옌지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독립운동가 각 지역위원 20여 명이 비밀회의를 열어 독립운동계획을 수립하였다. 정기영(鄭基英)·정기선(鄭基善)과 함께 와룡동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5월 26일에는 국자가 적암평(赤岩坪)에서 임호(林虎)·이완호(李完鎬) 등과 함께 국민회(國民會) 결사대 대원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강백규(姜伯奎)와 함께 국자가 이남 지방에서 결사대 대원 모집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만세운동 직후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회의에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구매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임국정(林國楨)·박웅세(朴雄世)·한상호(韓相浩)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간도로 돌아와 윤준희와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1919년 9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군무부장(軍務部長)이면서 철혈광복단 단원이었던 김하석(金河錫)으로부터 “이른 시일 안에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윤준희·임국정과 만나 협의하여 일제 은행을 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같은 달 용정 제창병원(濟昌病院) 뒤 공동묘지에서 윤준희와 함께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書記) 전홍섭(全弘燮)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12월 초 전홍섭의 집에서 윤준희·전홍섭을 만났다. 이 회합에서 전홍섭은 일제 은행을 공격하기보다는 일제가 길회철도(吉會鐵道, 일제가 만주(滿洲) 침략을 목적으로 지린(吉林)과 함경북도 회령(會寧) 사이에 부설한 철도) 부설에 필요한 자금을 회령에서 간도로 수송하고 있으니 그 호송대를 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자고 제안하였다.
1920년 1월 2일 전홍섭으로부터 조선은행 자금 이송계획이 기재된 편지가 도착하였다. 1월 3일 명동 향교동(鄕校洞) 김계하(金桂河)의 집에서 윤준희·임국정·한상호·박웅세(朴雄世)·김준(金俊)과 함께 현금 호송대 공격 계획에 관해 협의하였다. 1월 4일 오후 5시경 간도 동량(東良) 상리사(上里社) 동량어구(東良於口)에서 호송대를 공격하였다. 조선은행 발행 10원권 5만 원, 5원권 10만 원, 합계 15만 원을 확보하였다. 이를 “간도 15만 원 사건”이라고 한다. 1920년 1월 5일 오후 8시 의란구(依蘭溝) 유채구(有菜溝)에서 윤준희·한상호와 함께 김하석을 만나 확보한 자금 사용 방안을 협의하였다. 1월 10일 임국정·한상호·윤준희와 함께 자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하였다. 훈춘(琿春)을 거쳐 1월 22일 노령(露領) 포세트에서 배를 타고 1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 28일 일제가 임국정이 무기구입을 추진하던 상황을 탐지하였다. 1월 31일 오전 3시경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숙소에서 일제 헌병대의 공격을 받았다. 헌병 3명을 제압하고 탈출하였으나 탈출 도중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탈출한 후 채성하(蔡聖河)의 집으로 이동하여 채계복(蔡啓福)과 우봉운(禹鳳雲)에게 20여 일간 치료를 받았다. 일제 감시를 피해 수청(水淸)으로 이동하였다. 이 일로 1920년 11월 4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진행된 “간도 15만 원 사건”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받았다.
1921년 1월 8일 훈춘에서 나운규(羅雲奎)·한용호(韓用鎬) 등과 함께 일제 철도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2월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여 독일 비행학교에 다녔다. 같은 해 말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였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10월 28일까지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참가하였다. 12월 간도 신선두륵(神仙頭勒)에서 황돈(黃燉)을 만나 일제 고위관료와 기관을 공격한다는 등의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후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황돈을 무장시켜 서울로 파견하였다.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4월 둔화현(敦化縣)에서 적기단 기관지 『벽력(霹靂)』을 발간하였다. 같은 달 하순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태평구(太平溝)에서 오성륜(吳成崙) 등 적기단원 십수 명과 함께 간도와 한반도에서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단원 양성, 독립운동자금 모집, 일중관헌(日中官憲) 경비 상황 조사 등 활동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액목현(額穆縣)에서 고려공산당 간도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간도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고려공산당 하부기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7월 적기단 비서부(祕書部)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9월 30일에는 고려혁명 제3군단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군정위원장 장남환(張南煥), 사령장(司令長) 김우범(金禹範), 비서장 최금성(崔金聲)과 함께 연서한 경고문을 작성하였다. 이를 백초구일본영사분관(百草溝日本領事分館) 경찰서 순사 나기환(羅禨煥)·장국환(張國煥) 등 십 수 명에게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였다. 10월 12일 적기단원 황하열(黃河烈)·이춘(李春)·이동영(李東榮)을 무장시켜 둔화현에서 서울로 파견하였다. 이들을 돕기 위하여 10월 15일 박애성(朴愛成)·김수필(金守弼)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11월 적기단 모연대(募捐隊)를 무산간도(茂山間島) 방면으로 보내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2월 7일 나중소(羅仲昭)·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북만주 동경성(東京城)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각단연합회의(各團聯合會議)에 참석하였다. 1923년 말부터 1924년 초 사이에 모집한 독립운동자금으로 노령 이만에서 장총 100정, 권총 50정, 폭탄 100개를 구매하였다.
적기단 집행위원장으로서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1924년 활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반도 내외에서 독립운동 선전 활동에 노력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한다는 내용 등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1월 하순 단원 20여 명과 함께 닝안현(寧安縣) 황기둔(黃旗屯)에서 둔화현으로 이동하였다. 간도와 함북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과 단원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2월 8~9일 옌지현 숭례향(崇禮鄕) 다조구(茶條溝) 분수동(分水洞) 어구(於口) 최주봉(崔周鳳)의 집에서, 2월 10일 옌지현 숭례향 소명월구(小明月溝) 낙원동(樂園洞) 공의준(孔儀俊)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적기단원 김호석(金浩錫)·지해일(池海一), 무정단원(武政團員) 임병극(林炳極)·이동빈(李東斌), 군정서원(軍政署員) 이홍래(李鴻來)·이승래(李承來)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과 함께 간도 일제 영사관을 공격하고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밀정 등을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각지에 정찰대를 파견하고 필요한 무기를 입수하기로 하였다.
1924년 8월 노령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중심으로 대한신정부(大韓新政府)를 조직하려는 준비가 시작되었다. 11월 대한신정부 임시중앙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10일 둔화현 흑석둔(黑石屯)에서 대동회(大同會) 간사(幹事) 최중안(崔仲安)과 함께 적기단 비서장으로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는 만주와 노령 각지 대표 김동한(金東翰)·강고려(姜高麗)·김하석 등 24명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과 함께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여 10월까지 왕칭현 나자구로 운반할 것을 결정하였다. 무기운반책임자에 선임되었다. 11월 14일 부하 20여 명과 함께 왕칭현 춘명향(春明鄕) 대왕청(大汪淸)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함북 온성군(穩城郡)과 종성군(鍾城郡)에서 군청과 경찰서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925년 2월 김홍국(金弘國)과 함께 3월 1일을 기해 간도에서 활동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용정을 비롯한 중요지점에서 학생과 청년들이 선전문을 배포하고 별동대를 조직하여 일제 영사관 관원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2월 10일 동지 3명과 함께 옌지현 용지향(勇智鄕) 허문리(許門里)로 이동하였다. 4월 초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장해(張海)·장기영(張基永) 등 십수 명과 함께 적기단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기관지 『전위(前衛)』를 발행하고 북만전위대(北滿前衛隊)를 조직하여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0월 1일 닝안현 황기둔에서 적기단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임시총회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고려부(高麗部)와 협의하고 북만청년총동맹과 연합하여 북만주와 한반도 북부 국경 지대에서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1926년 4월 하순 적기단을 혁신단(革新團)으로 개편하였다. 김철(金哲)·박창렬(朴昌烈) 등으로 전위대를 조직하여 푸쑹현(撫松縣), 안투현(安圖縣), 허룽현(和龍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6월 5일 모연대장 장철(張哲), 모연대원 주길(朱吉) 등과 함께 왕칭현 합막당(蛤蟆塘)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황동수(黃東秀)·한기수(韓基洙) 등과 협의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9월 상순 노령 그로데고보(현 포크라니치나야)에서 혁신단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활동방침을 협의하였다. 10월 상순 혁신단 모연대장 최황(崔瑝), 참모 박우식(朴宇植), 대원 박일환(朴一煥) 등 약 10명을 닝안현 영고탑(寧古塔)에서 간도로 파견하였다.
1929년 8월 하순 이동휘(李東輝)·조동식(趙東植)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 세계 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고려공산당원 확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5개년간 전투준비를 하고 직접행동은 만주 각지에서 개시”한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만주에 분열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단체들이 합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공산당 연변당부(延邊黨部) 책임자 중국인 이청산(李靑山)과 만나 한중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37년 중앙아시아 우즈베크공화국 호레즌 갈대밭으로 강제로 이주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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