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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327
성명
한자 張道斌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1998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主筆)취임(就任)하여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에 앞장섰으며 1910년에는 오성학교(五星學校)에서 1917년에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敎鞭)을 잡고 청소년(靑少年)들에게 민족정신(民族精神)고취(鼓吹)하였고 신민회(新民會)가입(加入)하여 구국 운동(救國運動)을 하는 한편 1919년 이후(以後) 한국사(韓國史)(通)민족의식 고취(民族意識鼓吹)를 위하여 “조선사(朝鮮史)”등 30여종(餘種)저서(著書)간행(刊行)하였으며 1922년에는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집행위원(執行委員)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設立) 집행위원(執行委員) 등으로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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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평남 중화(中和) 사람이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주필로 취임하여 "일인하지(日人何知)" "금일대한국민의 목적지(今日大韓國民의 目的地)" "민족경쟁의 최후승리(民族競爭의 最後勝利)"등의 논설을 1910년까지 집필 게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으로 재직하였으며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자 노령(露領) 신한촌(新韓村)으로 망명하여 권업신문(勸業新聞)에 기고하는 등 계몽활동을 하였고 1917년에는 오산학교(五山學校)의 한국사(韓國史) 교사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서울》《학생계(學生界)》《조선지광(朝鮮之光)》 등을 간행하였다. 또 1920년부터 국사연구를 통한 구국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1937년까지 《조선위인전》《조선역사요령(朝鮮歷史要領)》《조선역사대전》《조선사상사》등 30여종의 역사서를 간행하였다.

그는 1922년 조선공제조합(朝鮮共濟組合) 감사,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집행위원, 민립대학설립(民立大學設立)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66회에 걸쳐 "조선사(朝鮮史)"를 집필 연재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기여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평북 영변(寧邊)·평남 상원(祥原) 등으로 은신하며 광복 때까지 저술사업을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2輯 273·274面
  • 東亞日報(1932) 連載記事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113·464·474·488面
  • 大韓每日申報(1908∼1910) 論說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495·578面
  • 汕耘의 生涯와 思想(汕耘文化財團)
  • 朝鮮10大偉人傳(1923. 11. 30)
  • 朝鮮歷史要領(1924. 4. 30)
  • 朝鮮思想史(1925. 4. 3)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976·988·994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장도빈 호 산운(汕耘) 평남 중화 105인 사건
본문
1888년 10월 22일 평남 중화군(中和郡) 상원면(祥原面) 신읍리(新邑里)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호는 산운(汕耘)이다. 조부 장제국(張濟國)은 중앙에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묻혀 산림 유생으로 생활하였으나 한학과 전통 의학에 조예가 깊어 이웃으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부친은 중농 수준의 유생이었다. 엄격한 조부 아래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일찍이 사서삼경을 통독하였고,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닦아 나갔다. 1902년 평안감사의 추천으로 한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시험을 볼 때 어린 나이인 그를 대견하게 여긴 학부대신이 직접 연필을 깎아주며 격려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3년 과정의 소학교를 마치고,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마치고 1906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공립성주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임용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을사늑약을 강요당하는 등 격변의 시기로서, 이때를 전후하여 전통적 유학자에서 개화 계몽 운동가로 사상적 전환을 하였다. 순절한 민영환의 집을 찾아갔을 때 보았던 피 묻은 옷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간직하였다. 서울에 머물 때 상동청년학원에서 국사를 가르쳤다. 1908년 봄 보성전문학교 야간부 법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황성신문 주필 박은식(朴殷植)을 수차 찾아가 만났고, 박은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梁起鐸)에게 발탁되어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 신채호(申采浩)와 1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집필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였다. 1910년까지 「일인하지(日人何知)」,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민족경쟁의 최후 승리」 등의 논설을 집필하였다.『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양기탁의 소개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한성사범학교 속성과 학생들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의연금을 기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신문사를 사직하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며 망국의 상황에 필요한 것은 국사의 연구라고 인식하였다. 곧 ‘우리나라가 망한 후에 독립을 회복하려면 우리 국사를 잘 연구·선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느 날 법부(法部) 앞을 지니다가 법부 문패가 떨어진 것을 보며 망국을 실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국사 연구에 진력하기 시작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동지들의 권유로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취임하였다. 오성학교는 서북학회에서 설립한 협성학교(協成學校)의 후신으로 민족교육기관이었다. 이 무렵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1912년 1월경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북간도(北間島) 옌지(延吉)로 이동하였다. 일시 이곳에 머물며 소영자(小营子)의 한인중학교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에게 국사 강의를 하였고,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민족교육 기관인 명동중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중국 훈춘경찰서에 근무하는 한인 황씨(黃氏)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자마자 신채호를 찾아가 재회하였으며, 이종호(李鍾浩)·이상설(李相卨)·정재관(鄭在寬) 등 한인 지도자를 만나 교류하였다. 이후 신채호와 같은 여관에 기거하며 권업신문(勸業新聞)에 기고하였다. 이곳에서 이갑(李甲), 서간도에서 온 이회영(李會榮), 북간도에서 온 이동춘(李同春)·백순(白純) 등과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중국 혁명당원들과도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한편 연해주(沿海州)에 머무는 동안 고구려의 책성(柵城) 유지와 발해의 동경성(東京城) 유지를 답사하며 민족주의 역사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였다. 1913년 미국에 있는 안창호(安昌浩)가 여비를 보내며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을 제의하였다. 미국행을 결심하고 이듬해 이갑과 함께 북만주 목릉참(穆陵站)에 있던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安定根)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당시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의사의 권유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1916년 귀국 당시 평북 영변(寧邊)의 서운사(棲雲寺)에 머무르며 『국사(國史)』를 발간하였다. 『국사』는 황의돈의 『대동청사』와 함께 통사 저술의 선구적 업적이다. 󰡔국사󰡕는 고구려 중심 사관에 입각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분기를 촉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만식(曺晩植)의 초청을 받아 평북 정주(定州)의 오산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평양(平壤) 주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가 실시되자 신문 발행을 추진하여 『동아일보』 발행을 허가받았다. 그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잡지 『서울』의 창간을 주도하였다. 1920년 『학생계』를 창간하고, 1921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조선년표』와『동명왕실기』를 발간하였다. 1922년 잡지『조선지광(朝鮮之光)』의 창간을 주도하였으며, 그해 조선공제조합(朝鮮共濟組合) 감사,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집행위원, 민립대학설립(民立大學設立)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문화운동을 후원하였다. 1923년 동양서원에서 『조선10대위인전』을 발간하였으며, 그해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하였다. 1924년 『역사요령』, 1925년 『조선사상사』·『조선영웅전』·『조선위인전』·『조선명부전』·『동명왕전』·『을지문덕전』·『연개문전』·『원효전』, 1926년 『이순신전』·『발해태조』·『강감찬전』·『을지문덕전쟁기』등을 발간하였다. 1927년 덕흥서림에서『임오군란과 갑신정변』·『대원군과 명성황후』·『조선상고사강의(1)』, 1928년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발간하였다. 1928년 박문서각에서 『문무대왕전』·『조선역사대전』을 발간하였다. 이외에도 잡지에 우리 역사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1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중앙일보』에 「조선문명사화」를 32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1932년 4월부터 9월까지『동아일보』에 「조선사」를 6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33년 5월부터 7월까지 『동아일보』에 「고도사적탐사기」를 연재하고, 『조선일보』에 1935년 4월「조선고사연구」,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기자조선설의 허위에 대하여」를 연재하였다. 1936년 평양상공사에서 『평양지』를 발간하였다. 1936년 일제가 중추원 참의를 제안하자 거절하였다. 이후 평북 영변, 평남 중화 등지에 은거하며 집필 활동에 전념하였다. 광복 이후 『민중일보(民衆日報)』 사장,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 대표를 지냈다. 1947년 한국대학(韓國大學)을 설립하였고, 그해 11월 단국대학(檀國大學) 설립에 참여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 교수, 1954년 서울시사 편찬위원 등을 지냈다. 『국사강의』(1952),『대한역사』(1959),『국사개론』(1959) 등을 발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여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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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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