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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5404
성명
한자 尹海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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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독립장
1915.3월 만주 국자가(滿洲局子街)에서 이봉우(李鳳雨)와 함께 간민회(墾民會)조직(組織)이래(以來) 1918.12월에는 노령(露領)으로 망명(亡命)하여 문창범(文昌範) 등과 전로한족회(全露韓族會) 중앙총회(中央總會)창립(創立)하여 부회장(副會長)으로 활동(活動)하다가 1919.2월 파리강화회의 대표(巴里講和會議代表)선발(選拔)되어 파견(派遣)된 바 있으며 1922년에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소집(召集)되자 부의장(副議長)으로 선출(選出)되어 창조파(創造派)(屬)하여 활동(活動)하다가 개조파측(改造派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탈퇴(脫退)하자 국민위원회 의장(國民委員會議長)취임(就任)하여 창조파측(創造派側)에서 추진(推進)하는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창립(創立)결정적 역할(決定的役割)을 하였으나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서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해체령(解體令)이 내려지자 창조파(創造派) 간부(幹部)들과 함께 노령 해삼위(露領海蔘威)이동(移動)하여 계속(繼續)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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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남 영흥(永興) 사람이다. 1915년 3월 이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이봉우(李鳳雨)와 함께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중국 동삼성(東三省) 국자가(局子街)를 근거지로 교민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에 힘썼다.

1917년 12월 그는 노령(露領) 니콜리스크에서 문창범(文昌範)·김립(金立)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취임하여 노령지역 교민들의 항일 역량을 결집하는 한편 청구신문사(靑邱新聞社) 주필로서도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후신인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파견될 대표로 고창일(高昌一)과 함께 선출되어 조국독립과 정부건설의 승인을 요구하기 위해 파리로 출발하였으나 당시 소련에서 일어난 볼세비키혁명으로 인하여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9월 26일에야 파리에 도착하게 되어 모든 계획이 무위로 끝나게 되었다.

1922년 12월 20일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소집을 위한 예비회의에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23일 중국 상해에서 신숙(申肅)등 140여 명의 각계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동삼성과 노령의 독립운동인사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개조파(改造派)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즉시 해체하여 동삼성 및 노령의 독립운동인사를 총망라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되, 동삼성 또는 노령으로 정부가 이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조파(創造派)가 서로 대립되었을 때 그는 창조파에 속하여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6월 4일 국민대표회의 개조파가 탈퇴하자 창조파 39명은 6월 7일에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의장에 취임한 뒤 신정부인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창조구락부(創造俱樂部)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반대하는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대표들의 상호친목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동년 8월 국민대표회의 창조파인 박용만(朴容萬)·신숙·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중국 상해를 떠나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가서 조선공화국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노령에 있던 노농정부(勞農政府) 관헌과 의견이 충돌되어 추방당함으로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중국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으로 갔다가 1924년 다시 중국 북경(北京)으로 돌아갔다. 그는 1934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 국제공산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 警務局) 10面
  • 朝鮮民族運動年鑑 11·179·180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20·491·1081·1084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425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44·45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46·347·388·389·44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77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205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67·377·712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17·130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國會圖書館) 194·216·272·295·305·309·318·319·321· 446·486·500·51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39·178·185·324·330·364·525·712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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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윤해 본명 : 윤호제(尹湖濟), 이명 : 윤해(尹海)·윤면제(尹冕濟)·야보르스키(Яворский), 필명 : 혜자(惠子)·혜구(惠球) 함남 영흥(永興) 국민대표회의
본문
1888년 3월 5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인흥면(仁興面) 능동(菱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호제(尹湖濟)이며, 이명으로 윤해(尹海)·윤면제(尹冕濟)·야보르스키(Яворский)를, 필명으로 혜자(惠子)·혜구(惠球)를 사용하였다. 부친인 윤병헌(尹秉憲)은 1901년 성균관 박사, 1908년 영흥군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경학회(經學會) 회장 등을 맡았다. 형은 윤광제(尹光濟), 조카는 윤만주(尹萬柱)이다.1905년부터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서북협회, 함남친목회 등의 단체와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전문과를 졸업한 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1910년 3월 한민교육회(韓民敎育會)를 조직에 참여하고,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경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1912년 4월 19일 간민교육회 대표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에서 권업회(權業會)를 발기한 인사 중 하나인 이종호(李鍾浩)와 만나 국자가(局子街)에 권업회 지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1912년 12월 권업회 연론부장(演論部長)에, 1913년 2월 총무에 선임되었다. 러시아 당국이 1914년 9월 권업회를 해산하고 『권업신문(權業新聞)』이 폐간되자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로 가서 이종호와 함께 『권업신문』의 재간행에 힘썼으나 좌절되었다.1917년 6월 3일 니콜스크(Никольск)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회(全露韓族代表者會)의 결의로 창간된 『청구신보(靑邱新報)』의 주필을 맡았다. 1년여 후인 1918년 6월 13일 니콜스크에서 열린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에서 대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대회에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 지역의 대표자도 프랑스로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이후 니콜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합을 거쳐 고창일(高昌一)과 함께 대표자로 확정되었다. 두 사람은 1919년 2월 5일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된 ‘조선인 총대표’ 증명서를 가지고 파리로 갔다. 같은 해 9월 26일 파리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파리강화회의는 폐회한 뒤였다.1920년 1월 4일 국제평화추진회가 주최한 프랑스주재 중국사회단체연합대회에 참가하여 한국독립부흥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관용(李灌鎔)과 함께 1920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 총화에 한국위원회 대표로 파견되었지만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후 한반도의 억압 상황에 대한 소개를 목적으로 조직된 ‘한국통신국’에 참여하고, 프랑스 파리대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1921년 말 무렵 중국 상하이(上海)에 갔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와 향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여부를 두고,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중앙기관을 만들자는 입장을 내세웠다. 『독립신문』 주필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가 필요하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1922년 2월 13일 괴한에게 ‘시국에 대한 설화’가 있다는 이유로 권총으로 위협을 당하고, 고창일로부터 자신에 대한 암살 정보를 통지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28일 숭산로(嵩山路)에서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였다.1922년 10월 23일에 퇴원하고 다시 국민대표회의에 북간도 대한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 헌법기초의원, 외교분과의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 5월 15일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대립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시베리아로 ‘새로운 혁명 중앙’을 이동시키고 소비에트 노농정부와 무기 탄약, 자금 등의 교섭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 존폐를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 개조파가 이탈한 가운데 창조파가 중심이 되어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폐회하였다. 1923년 6월 7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을 위해 모인 회합이고 결코 어느 국토 있는 국가의 정권에 대한 처리를 위한 회합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상해 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독립운동까지 중지할 수 없다”, 국민위원회는 “천하의 정권시(政權視)하기를 요구하지 않는 동시에 오인(吾人)은 정권시하지 않는 바이다. 이는 다만 독립운동중앙간부 즉 혁명중앙간부일 뿐”이라는 취지의 폐회사를 하였다.1923년 9월부터 1924년 2월까지 국민위원회와 꼬르뷰로의 통합회의에서 민족혁명당 건설이 결정되었다. 1923년 10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코민테른 극동부 대표 파인버그(Joseph Fineberg), 꼬르뷰로 대표 김만겸(金萬謙)·이동휘(李東輝), 국민위원회 대표 김규식(金奎植)·신숙(申肅)·이청천(李靑天)·원세훈(元世勳) 등과 함께 참석한 회의에서 혁명적 민족당을 조직할 문제와 당 강령, 조직 등을 교섭하였다.국민위원회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퇴거 조치를 명령받자 북만주로 이동하여 북만주 지역의 분산된 힘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사상을 알릴 취지로 학우단(學友團)에 글을 게재하고 『농민익보(農民益報)』를 발행하였다. 민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동운동이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1924년 조선노동당의 비밀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당에 참여하였다.“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경험을 연구”할 목적으로 러시아로 망명하여 1926년 10월 중국손일선노동대대학에 입학하여 1928년 10월에 선동선전과를 졸업하였다.1929년 하바롭스크 고려민족협회에서 개편된 모스크바주재한인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31년 5월 만주로 가서 훈춘(琿春)에서 연락책임을 맡았다. 1934년 모스크바로 이주하였다.스탈린 대숙청기였던 1939년 12월 31일에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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