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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에서 부친 안태훈(安泰勳)과 모친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安重根)의 동생이자, 안공근(安恭根)의 형이다. 호는 청계(淸溪), 영세명은 시릴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이명으로 안청(安淸), 안정근(安正根)이 있다. 부인 이정서(李貞瑞)와의 사이에 원생(原生)·진생(珍生)·혜생(惠生)·미생(美生)·옥생(玉生)·은생(恩生)을 두었고, 미생은 김구(金九)의 아들 김인(金仁)과 혼인하였다.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한 다음, 서울의 양정의숙에서 법률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중이던 1909년 10월 26일, 형인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응징하는 의거를 결행하자,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동생 안공근과 뤼순(旅順)으로 갔다.변호사 선임 등 옥바라지를 하던 중 이듬해 3월 26일 안중근이 사형당하자, 형의 시신을 여순감옥 묘지에 안장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홀어머니와 누이동생 안성녀(安姓女), 안중근 의사의 유족, 안공근의 가족을 이끌고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처음에 북만주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령으로 옮겼는데, 1914년 1월 중순부터 2월 하순 사이 무링(穆陵)에 머물 때에는 이갑·이동휘 등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자택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는 장모 왕재덕(王在德)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가능했는데, 장모의 경제력은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이후 소왕령(蘇王營, 니콜리스크)으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지으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군 장교로 복무하였는데, 러시아군 복무를 통해 전술을 익히고 실전 경험을 쌓아 후일의 대일 전쟁에 대비하였다.1919년 3월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에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또 이해 10월 31일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선언서에도 ‘대한민족대표’ 30명의 일원으로 이름이 실렸다.1919년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上海)로 이주하여 자녀들을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민족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임명되었고, 상하이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간호원양성소를 개설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 이사로도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황해도 조사원’으로도 위촉되었다.1920년 1월 1일 자로 ‘독립운동가 31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일 무장투쟁에 필요한 군자금 기탁을 호소하는 문서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로 꾸준히 활동하였고, 이 시기 만주지역 독립군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임시정부 특사로 선임되기도 하였다.당시 북간도 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대한국민회와 대한군정서(세칭 북로군정서) 간의 대립과 알력이 심각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에서는 위원을 파견하여 북간도 지역 독립군단체들을 임시정부의 통제 아래 두고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전개토록 이끌 방침을 세웠다. 왕삼덕(王三德)과 함께 파견위원으로 선임되어, 1920년 5월 17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함경북도 독판부(督辦部)에 임시정부 발행의 공채권을 전달하고, 북간도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의민단과 의군단의 연합을 이끌어 냈고, 다시 대한국민회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민단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왕삼덕과 함께 독립군단체 대표들을 모아놓고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이들 단체의 근거지를 찾아가 공감과 신뢰를 쌓아가며 통합을 추진했다. 각 단체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청산리 전투 직전인 1920년 10월 대한국민회·의민단·신민단·한민회의 4개 단체 통합을 이끌어냈고, 이들 연합부대는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국민회 사령관인 홍범도의 지휘 하에 큰 전과를 올렸다.이때 직접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3일째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긴급보고서를 작성하여 왕삼덕 편에 임시정부에 보고토록 하였고, 이를 받은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인쇄 배포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보복으로 자행된 ‘간도참변(경신참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각단체통일협의회를 소집하는 등,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기존의 단체 명칭을 버리고 간북(墾北)남부총판부(總辦府)·간북북부총판부·북로사령부·간북남부총판부 재무관서·간북북부총판부 재무관서의 5개 큰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청산리 승전 후 독립군의 러시아령 이동으로 인해 제대로 가동되지는 못하였다.이 사이 왕삼덕과 함께 별도의 임시정부 파견위원인 이용(李鏞)과 합류하여 대한국민회 관할구역인 명월구(明月溝)에 무관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는데, 1920년 10월 시점에서 학교 건물 건축과 학생 모집이 상당히 진척되었다. 또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국민회 재정책임자인 유찬희(柳纘熙)와 함께 ‘간도참변(경신참변)’으로 피해를 입은 독립군들에게 구호 물품을 보내는 한편, 흩어진 독립군들을 어무(額穆)에 모이도록 통지하고 담요와 겨울용 신발과 여비를 주어 독립군의 재집결지인 밀산(密山)으로 보냈다.1921년 3월 23일 임시정부의 ‘간북(墾北) 교통부 특파원’으로 1921년 4월 경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 해 11월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를 개회하였고, 회장으로 선출된 안창호(安昌浩)가 사임하자, 회장 대리에 선임되었다. 이날 북간도 독립군들의 참상을 설명하고, 적십자회가 이들에 대한 구호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1922년 2월 8일 개회, 6월 폐회)에 출석하여 특별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2년 4월 7일 회의에서, “과거의 우리 일이 잘못된 것과 이 모양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인 즉, 사법(私法)은 개인의 심리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으나, 공법(公法)은 그 보다는 사실을 보아 재정(裁定)할 수 있는 원칙과 연계하여 당국자의 양심은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되어진 결과가 양호치 못한 이상에 당국자가 인책하고, 다른 국면을 전개하기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임시정부 운영에 쓴소리를 하였다.이와 함께 상해중한국민호조총사(上海中韓國民互助總社)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라는 신분으로 중국 측 유력 인사들과 친교를 쌓았다. 1922년 3월에는 공산주의 활동 문제로 인한 당원 간의 분열을 보고 신한청년당을 탈당하였고, 7월에는 독립운동의 현안 논의를 목적으로 설립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24년 3·1절을 맞이하여 “안중근 씨의 아우 안정근 씨의 집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모두 자지 않고 있다가 마중을 나와서 만세를 마주 불렀는데, 안씨의 대부인(大夫人, 모친)이 어린 학생을 보고 춥지 아니하냐? 언제 너희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이 노릇을 하지 아니하게 한단 말이냐고 말하는 그 심중에는 깊은 의미와 회포가 있었을 것이다.”라는 신문기사처럼, 상하이 한인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던 중 ‘뇌병(腦病)’이 발병하여, 1925년 가족과 함께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이사하였다.이후 신병으로 적극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대규모 선단(船團)을 꾸려 평소에는 어업에 종사토록 하고, 유사시에는 한반도 상륙작전에 활용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일제 측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1938년 차남인 진생(珍生)을 조선공학 전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냈다.건강에서 어느정도 회복하여 1935년 상하이의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 제5반 소속으로 활동하였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가족과 같이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협동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활동을 지원하였고, 원생·미생 등 자녀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3년에는 장남 원생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945년 일제 패망 후에는 한국적십자회 회장 및 한국구제총회 회장직을 겸하며 한인교포들의 귀환 및 생활 문제를 보살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한민국 상해총영사관에서 발급한 서류를 소지하고 활동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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