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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199
성명
한자 鄭淳萬
이명 王昌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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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86 훈격 독립장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창립(創立)하고 만민공동회도총무부장(萬民共同會都總務部長)으로 활약(活躍)하였으며 간도(間島) 용정(龍井) 서전서숙(瑞甸書塾)설립(設立)하여 민족 교육(民族敎育)독립운동(獨立運動)기반(基盤)구축(構築)하였고, 신민회 조직(新民會組織), 해조신문(海潮新聞), 대동공보발간등(大東共報發刊等) 민족계몽(民族啓蒙)독립운동(獨立運動)선구자(先驅者)로서 기여(寄與)현저(顯著)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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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896년 3월에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李承晩)·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함께 붙잡혔다.

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승만(李承晩)·박용만(朴容萬) 등과 삼만(三萬)으로 결의하여 의형제를 맺고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또한 독립군(獨立軍)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해아(海牙) 밀사의 여비 1만 8천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1909년에는 러일전쟁(露日戰爭) 및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노령(露領)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연해주(沿海州) 지역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였다.

또한 13도 의군부(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등을 창설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6월 21일에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16·11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7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6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50·36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33·39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정순만 정순만(鄭順萬), 왕창동(王昌東), 왕창도(王昌道), 왕일초(王一初), 왕한(王韓), 왕성도(王成道) 충북 청주(淸州) 전기의병, 유신당 사건, 헤이그특사 사건, 안중근 의거, 양성춘 사건
본문
1873년 3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옥산면(玉山面) 덕촌리(德村里) 반곡(盤谷)마을에서 아버지 정석종(鄭錫鍾)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이명은 왕창동(王昌東), 왕창도(王昌道), 왕일초(王一初), 왕한(王韓), 왕성도(王成道) 등이고, 한자가 다른 정순만(鄭順萬)도 사용하였다. 시조 응(膺)의 24세손으로, 중시조는 광주유수(廣州留守)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에 증직된 목(穆)인데, 그의 둘째아들 광업(光業)이 덕촌리로 옮겨온 이래 집성촌을 이뤄 세거해 왔다. 선대는 음직으로 출사하거나 무인직이 많았는데, 덕촌리 이주 이후 관직에 오른 사람은 없다. 출생할 무렵 집안은 사회경제적으로 향반 정도의 처지였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로서 학식과 지조 있는 행동으로 학자로서의 명성이 일찍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1896년경 의병에 참여하며 민족운동에 첫 발을 디뎠고, 충북·경북·강원 일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고 한다. 의병활동을 한 것에 대해 이승만(李承晩)이 못마땅해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향에서 문중의 종재(宗財)와 사재(私財)를 들여 근대 학교인 덕신학교(德新學校, 현 옥산초등학교의 전신)를 세워 문중과 인근 지역 자제들의 신학문 수용과 근대 개명을 위해 애썼다. 1896년경 상경하여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일제에 의해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우범선(禹範善)·이희간(李喜侃)·이승만·이동녕(李東寧)·박용만(朴容萬)과 함께 독립협회 발의자로 지목되었으며, 이승만·박용만·이상재(李商在)와 함께 ‘혁명 신진’, ‘주요 주도회원’으로 평가되었다. 유맹(劉猛)·현채(玄采)·나철(羅喆)·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도총무부장(都總務部長), 총무장(總務長), 부총무(副總務)로 재임하였다는 기록과 독립협회가 탄압을 받고 400여 명의 중견간부들이 붙잡혔을 때 주요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 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리는데, 이들은 이미 독립협회 활동 당시부터 회동하고 의기투합하였다. 1899년경부터는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전덕기(全德基)의 전도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옥중에 갇혔을 때 성경을 탐독하는 등 기독교에 관심을 지녔다. 상동청년회에는 독립협회 출신과 기독교인이 많았다. 1899년 1월 전덕기·이승만·박용만과 함께 상동청년회 명의로 황태자에게 양위할 것을 주장하는 격문을 장안에 뿌렸다. 1904년부터는 상동청년회 총무로 활동하였는데, 그해에 이준(李儁)·이현석(李玄錫)과 함께 적십자사 설립운동에 나섰다가 평리원에서 태(笞) 80도(度) 처분을 받았다. 러일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일본군을 돕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적십자사 설립운동은 주도자들의 일본 인식의 한계를 보일뿐만 아니라, 이후 친일인사로 몰리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1904년에는 보안회에도 참여하여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보안회 집회에 참여하였을 때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려 하자, 옷을 벗고 총구 앞으로 달려들 정도로 극력 항쟁하였다. 보안회 활동으로 투옥되었으나 고종의 특별 배려로 곧 풀려났다. 이 때 옥중에서 이승만을 만나 그가 집필한 『독립정신』 원고를 교열해 주었다. 1905년에는 상동청년회 서기 명의로 『황성신문』에 동포의 멕시코 이민 참상을 고발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을사늑약 반대투쟁은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동청년회에서 을사조약 반대기도회를 주관하는 한편, 회원들을 중심으로 반대 상소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때 김구 등 각지 청년회 대표들이 상동청년회로 모였는데, 이들은 상소에 연명한 자는 모두 사형 당할 것이므로 5인씩 계속하여 대궐 문전에 엎드려 상소를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연설회를 종로에서 개최하였다. 상동청년회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며 항거하였으나, 결국 해산당하고 주도자가 투옥되며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06년 봄, 이상설(李相卨)·이동녕 등과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이해 10월 경 북간도 롱징(龍井)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망명은 신민회(新民會)와 일정하게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설에는 이상설이 고종으로부터 헤이그특사의 밀명을 받고 출발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롱징에서 이상설과 함께 가장 큰 집을 매입하여 학교로 개수하고 서전서숙(瑞甸書塾)이라 불렀다. 숙장은 이상설이 맡았고, 이동녕과 함께 운영을 맡았다. 서전서숙은 처음에 학생들을 갑(甲)·을(乙)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20세 전후의 생도들로 구성된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등반이었다. 이상설은 갑반의 산술, 황달영은 역사와 지리, 김우용은 산술, 여준은 한문·정치학·법학 등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에서 중점을 둔 교육과목은 신학문과 철두철미한 민족교육이었다. 또한 서숙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실상은 독립군양성소나 다름없었다. 일제는 1907년 9월, 서전서숙을 위험시하여 일본군 중좌 사이토 스에지로(齋藤季治郞)를 보내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 보고문서에 의하면, 서전서숙 주요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일정한 액수를 운영 자금으로 내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특히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을 듣고는 의관을 찢어 땅에 던지며 비분강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상설의 헤이그 사행이 결정되자, 이상설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다방면으로 특사의 사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의형제를 맺은 이승만과 박용만에게 영어를 잘하는 인물의 천거 등 지원을 부탁하였다. 이승만은 학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였으나, 박용만은 윤용구(尹炳球)와 송헌주(宋憲周)를 천거하여 지원하였다. 헤이그 사행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자금이었다. 연해주 한인대표 김학만(金學萬)의 지원으로 자금 모금에 노력하여, 특사들이 사행을 예정대로 출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동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특사 일행을 전송하고 서전서숙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연해주 최대 부호인 최봉준(崔鳳俊)의 장조카 최예부(崔禮簿)·민회장 양성춘(楊成春)과 의형제를 맺고, 민회의 총무 겸 서기로서 활동하는 등 한인 사회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 신문 간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여, 1908년 2월 26일 『해조신문(海朝新聞)』이 창간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해조신문』 5호까지 주간·주필·총무로서 1인 3역을 담당하였으나, 장지연(張志淵)이 주필로 초빙되어 오자, 6호부터는 주간을 그에게 넘기고 편집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신문사 운영권과 의병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게재한 장지연과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에서 대립하며 심각한 불화와 갈등을 빚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학이나 망명에 뜻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이 때 그들에게 여행의 안내나 도움을 위해 헌신하였다. 1908년 봄, 장건상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 장건상을 연해주의 총대장격인 유인석과 민회장 양성춘에게 소개하는 등 국내와 연해주 한인사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해조신문』은 창간된 지 꼭 3개월만인 5월 26일 폐간되었다. 폐간호에서 동서양의 사례를 열거하며 어려움에 굴하지 말고 인내력을 가지고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자고 역설하였다. 1908년 11월 18일, 새로운 연해주 한인 기관지인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창간되었다. 윤필봉(尹弼鳳), 미하일로프 등과 함께 다시 주필을 맡았다. 일제측 자료에는 『대동공보』의 탐방원 또는 발행인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그해 11월 15일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1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지방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한편, 1908년 5월경 크라스키노에서 최재형을 총장, 이범윤을 부총장, 이위종을 회장, 엄인섭을 부회장으로 하는 동의회(同義會)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이미 국내에서 의병과 계몽운동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의 병행을 표방한 동의회에 참여하였다. 일제는 20~30명의 동의회 주요인물 중 한사람으로 주목하였다. 특히 일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의거의 조직을 동의회로, 그 요람을 대동공보사로, 의거 논의의 주체를 미하일로프·안중근·정순만·유진율(兪鎭律)·정재관(鄭在寬)·윤일병(尹一炳)·이강(李剛)·우덕순(禹德淳) 등 8인 회합으로 파악하였다. 실제 안중근은 의거 직전 「장부가(丈夫歌)」를 짓는 한편, 대동공보사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의거를 알렸다. 또한 주필 이강은 안중근과 의형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며, 우덕순과 조도선(曺道先) 등 동참자들도 『대동공보』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었다. 『대동공보』가 안중근 의거 이틀 후인 10월 26일부터 수차에 걸쳐 특필 보도함으로써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린 것도 그 연관성을 말해준다. 따라서 일제는 안중근과 함께 늘 대동공보사 근처에 있는 이치권(李致權)의 집에 출입하는 가까운 사이로서 의거에 틀림없이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에 의해 관련자로 지목되었다. 일제는 헌병 대위 마쓰이(松井)를 파견, 첩자를 고용하여 동향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였다. 일제 첩자가 직접 찾아와 만나고 얻은 정보를 마쓰이에게 보고하였다. 안중근과 함께 대동공보사에 출입하는 동류(同類)로 안중근의 신병을 러시아가 관할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일제에게 넘어간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으며, 의거로 인해 독립운동이 용이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중근이 일제 사법부로 이관되는 것을 막고, 극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자 하는 등 계속 노력하였다. 연해주 지역에는 일찍이 한인의 출신 지역에 따라 파벌과 분파가 형성되어 파쟁이 있었다. 그 원인으로 기호 출신인 이상설과 평안도 출신인 정재관이 미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도중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고, 이상설이 연해주에 도착하자마자 정순만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해 기호파를 형성하여 서도파와 대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호 출신 김현토(金顯土)가 페테르부르크에 망명 중이던 친로파의 거두이자 함경도 출신인 이용익(李容翊)을 암살하려던 사건이 발생한 바 있어 그 연원은 더 소급된다. 한인사회의 파쟁은 경성파·서(평안도)파·북(함경도)파 등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독립운동 방법론의 차이, 한인사회 내의 계급 대립, 러시아 당국과 일제에 의한 고도의 첩보공작 등의 요인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한인사회의 파쟁은 민족운동 역량이 약화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설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입감 중이던 1910년 9월 일제가 조사한 「포조사덕지방재주배일조선인명부(浦潮斯德地方在住排日朝鮮人名簿)」에는 한인사회를 5개 파로 구분하고 있다. 일제는 이 자료에서 이범윤(李範允)·이갑(李甲)·최봉준과 함께 ‘유력한 파의 수장’으로 파악하고 있어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을 가늠케 해준다. 특히 이 자료는 ‘정순만파’에 속하는 8명은 특별히 주의해야 할 인물로 파악하였다. 이는 조사 당시 ‘정순만파’의 8명 중 김현토를 제외한 7명이 입감 중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 1월 23일 민회장 양성춘을 권총으로 쏴 죽였다. 이른바 ‘양성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연해주 한인사회는 물론 미주 동포사회에까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양성춘 사건’은 정순만의 격정이 초래한 실수에 의한 오발사고였다. 그러나 당시 『대동공보』를 장악하고 있던 서도파는 고의 살해설을 확대 유포시켰다. 사건 직후 러시아 관헌에 붙잡혀 수감되었다가 그해 11월 8일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과실 살상죄가 적용되어 3개월 금옥과 사원에서의 참회 명령이 내려졌다. 3개월의 금옥을 포함하여 1년여 동안 옥고를 겪다가 1911년 2월 8일 풀려났다. 그러나 당시 한인 사회에는 양성춘의 형 양덕춘(楊德春)과 유진률, 최학만(崔學滿) 등 ‘북한파(北韓派)’가 그를 살해할 것이라는 풍설이 자자하였다. 한동안 이상설과 이진룡(李鎭龍)의 보호 하에 지냈으나, 수감 중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계속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이에 의병들의 모임에 참가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협의하는 등 서서히 독립운동의 재기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 양성춘의 형과 미망인(최봉준의 처제)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향년 39세였다. 이 소식은 『신한민보』 보도 등을 통해 미주사회에 신속히 보도되었다. 그의 피살은 일시적으로는 연해주 독립운동 세력 간 극단적 대립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한인사회의 반성을 촉구하고 세력 간의 통합을 이뤄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찍이 박용만이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아들 정양필(鄭良弼)은 커니군사고등학교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나와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여 건국훈장 애족장(1995)에 추서되었다. 자부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한 이화숙(李華淑)으로 건국훈장 애족장(1995)에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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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2 기념관 덕신학교 기념관 충청북도 청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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