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80
성명
한자 文昌範
이명 원창범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90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5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877년경 부친(父親)을 따라 노령(露領)으로 망명(亡命)한 후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민족 교육(民族敎育)을 실시하며 1917년에는 전로한족(全露韓族) 중앙총회(中央總會)를 조직 그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1918년에는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에 서명발표하였으며, 1919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으로 선출되어 해삼위(海蔘威)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조직되자 교통부총장(交通部總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결성하였고, 동부만주(東部滿洲)노령지역(露領地域)의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

1877년경 부친을 따라서 노령(露領)으로 망명한 뒤 1908년 노령 니콜리스크의 타레스부락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위하여 이 학교를 1916년에 이르기까지 운영하였다.

1911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배일선전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발송하고 국권회복을 기도하면서 국내에 무력진공을 계획하는 한편 노령과 중국 동삼성(東三省)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7년 1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쌍성(雙城)에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선임되어 각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자치기관으로 육성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 동삼성과 노령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독립국가임을 천명할 때 서명자 39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칭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노령지방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나갔다.

동년 3월 17일 국내에서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서를 대한국민의회장의 명의로 작성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에 있는 일제 영사관으로 송부하여 일제정부에 전달하도록 하는 한편 기타 11개국 외국영사관에 배부하며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하도록 자동차 여러 대에 나누어 승차한 뒤 독려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는 그곳에 망명하여 있던 독립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3·1독립운동 정신의 결집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상해에 수립하고 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여 내각을 조직할 때 그는 교통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23일에는 국내 13도 대표 이만직(李晩稙)외 23명이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어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내각조직으로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李東輝)가 선임되었는데 문창범은 교통부총장으로 피임되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각 단체 각 당파를 총망라하여 대통령제로 조직을 개편할 때 그는 다시 교통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동년 4월 대한국민의회를 해삼위에서 무시(武市)로 이전한 뒤 흑룡강주(黑龍江州)에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본부를 설치하여 러시아 공산당 정부의 원조를 받아 군대를 편성하였으며 〈자유보(自由報)〉〈신세계(新世界)〉등 홍보물을 발행하면서 독립운동 대표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조국독립을 성취하고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2월 22일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연추(煙秋) 지부의 책임을 담당하여 중국 동삼성 및 노령에 거주하고 있는 교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치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노령내에 거주하는 귀화한 교민들에게 입교를 권유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동년 6월 독립군의 청산리(靑山里) 전쟁 후 노령 하바로브스크 소재 소련 공산군 제2군단과 교섭하여 간도지역 독립군의 노령 자유시(自由市)로의 이주를 성사시켰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인 1922년 6월에는 노령 무시(武市)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이동휘와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10월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독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警務局) 246面
  • 朝鮮民族運動年鑑 5·10·38·150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3·4·20·51·414·439·451·493·508·530·765· 805·815·856·1001·1053·1054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56·58·64·65·67·70·151·251·276·382·437 440·441·442·447·489·492·493·494·495·497·503·515·517·519·520·876·877· 879·880·881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56·63·128·175·215·262·521·522面
  •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3·40·402·582面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27·30·73·143·153·272·308·318·355· 356·357面
  • 武裝獨立運動秘史 16·18·44面
  • 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37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34·344·388·393·394·447面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8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9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53·56·63·72·116·139·154·171·213·219·238·366·36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8卷 36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323面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15·83·87·89·92·96·112·113·117·12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94·770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135·145·189·205·413·418·66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60·97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49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창범 - 함북 경원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연해주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통합 운동, 국민대표회의
본문
1870년 함경북도 경원군(慶源郡) 유덕면(有德面) 죽기동(竹基洞)에서 태어났다. 1877년경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 푸틸롭카 마을(한국명 육성촌)로 이주하였다. 장성한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군대의 납품업자로 큰 재산을 모았다. 러시아 연해주의 원호인(元戶人, 귀화 한인) 재력가로 교육 및 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1908년 최봉준(崔鳳俊), 김학만(金學滿) 등이 이포에 설립한 명동학교의 찬성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했으며, 수이푼(秋風) 시넬니코보(영안평 ・ 대전재)에 설립한 동흥학교에도 많은 금액을 의연하였다. 『해조신문』의 연락원으로 수이푼 푸틸롭카 ・ 크로우놉카(황거우) ・ 코르사콥카(허커우)로 발송하는 신문을 받아서 배포하였다. 1908년 5월 일제의 탄압으로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유진률(兪鎭律), 차석보(車錫甫) 등과 함께 『대동공보』 발간에 주력하여 8월 15일 제1차 발기인 총회에 참가하였다.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어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李鍾浩)가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 한인 사회의 민족운동가들이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구상하는 가운데 조직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끝내는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는데 있었다. 권업회는 언론과 교육 활동에 주력하여 1912년 4월 『권업신문』을 창간하고, 3월에는 한민회와 공동으로 신한촌에 한민학교 교사를 크게 신축하여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권업회는 중앙 조직을 완비한 뒤,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니콜라예프스크, 이만 등 연해주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1913년 6월 30일 권업회 하반기 정기 총회에 우수리스크지회의 대표자로 참석했다. 1914년 1월에는 우수리스크지회의 의원 겸 교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이갑(李甲)이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1913년 12월 25일 최재형(崔在亨) ・ 이상설 ・ 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이갑씨 신병 치료비 의연 청구’를 발기하였다. 한인이 러시아로 이주한 지 50주년을 맞아 준비되었던 ‘한인 아령 이주 50년 기념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1924년 3월 28일 지방 대표원회에 참석하여 100원을 의연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적 대표 기관을 창설하고자 소집된 회의에 최재형 등과 함께 9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6월 3일부터 12일까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회는 원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라는 상설적 중앙 기관을 조직하였다. 대회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의 기관지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청구신보(靑丘新報)』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신보(韓人新報)』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최봉준, 전 보리스 등과 함께 『청구신보』의 창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1918년 6월 13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지방 대표와 각 단체 대표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2차 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회는 원호인과 여호인(비귀화 한인)의 대부 격인 최재형과 이동휘를 명예 회장으로 추대하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였다. 1919년 초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을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 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2월 상하이 신한혁명당의 파견으로 여운형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건너오자,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 자금 조달,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 수립 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다. 여운형 ・ 이동녕 ・ 조완구 등은 독립운동의 중앙 기관의 위치를 외교 활동을 위해 국제도시인 상하이(上海)에 둘 것을 주장한데 대해, 남공선 ・ 김립 등과 함께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수십만 동포가 살고 있는 러시아 지역이 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러시아령과 간도 및 국내 대표들이 참여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대회(全露國內朝鮮人大會)’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 김치보 ・ 김하석 ・ 장기영 ・ 김진과 함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조직을 발기하여,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는 형식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였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에는 김철훈, 서기에는 오창환이 선출되고, 선전(宣戰) ・ 재무 ・ 내무 ・ 외무 등의 집행부를 구성하고 간부들을 선임하였다.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으로서 3월 17일 오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시내 코르사콥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대와 러시아 군대가 출동하여 해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 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오후 3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각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오후 4시부터는 신한촌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한 채 만세를 제창하였으며,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던 중 어둠이 내려 용모를 식별하기 힘든 틈을 타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를 이용하여 시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다음날인 3월 18일에는 한인 노동자들이 대한국민의회의 명령에 따라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였다. 3월 17일에는 스파스크에서 5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21일에는 라즈돌리노예에서 3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당지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려는 기미가 보여 러시아 민병이 출동, 해산시키기도 하였다. 남부 우수리주 얀치헤와 포시예트 그리고 하바롭스크 등지에서도 수백 명의 한인들이 집결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4월 13일 국무총리 이승만을 행정 수반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 각료 중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사는 군무총장 이동휘와 재무총장 최재형을 포함해 3명이었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실질적 정부로서 기능하기 위해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양자 사이에 통합을 위한 교섭이 시작되었다.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대한국민의회 의원 총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잠정 승인’하되 그 정부가 러시아령으로 이전할 때까지 완전한 협력을 보류하고 임시정부의 노령으로의 이전은 일본군의 완전 철수 후에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전권교섭위원으로 원세훈을 상하이로 파견하였다. 원세훈은 5월 7일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위치를 둘러싸고 비타협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양측의 완강한 비타협적 입장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4월 23일 13도 대표들이 서명한 임시 헌법과 각료 명단을 발표하며 조직된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총재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에 이어 한성정부에서도 국내외의 연결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인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다. 한성정부는 대한국민의회나 임시정부에 비해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에 의해 서명되었다는 점에서 권위나 ‘법통성’에서 우위에 있었다. 8월 초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정부는 자신들의 정부를 일체 해소하고, 한성정부를 봉대(奉戴)하며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두기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5개 항의 통일안 마련에 성공하였다. 임시정부는 현순과 김성겸을 전권 위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하였다.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한국민의회 상설 의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한성정부를 유일한 법통 정부로 봉대하기로 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대한국민의회의 해산을 선포하였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옮겨갔다. 10월 20일경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임시정부 측이 약속대로 정부를 해산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입장임을 확인하고, 임시정부 측의 개조 조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내각 취임을 거절했다. ‘승인 ・ 개조 분쟁’이었다. 함께 상하이로 갔던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는 것을 비판하고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채호 등 반임시정부 인사들과 만나 제휴 방안을 논의하였다. 1920년 4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4월 4-5일, 연해주의 일본군이 러시아 적군과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급습한 연해주 4월 참변으로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이 어려워지자, 이전 대한국민의회 관계자 20여 명과 함께 아무르주 블라고베시첸스크로 옮겨가서 대한국민의회를 복설하였다. 대한국민의회가 아무르주로 이동해 오자 아무르주 한인의회는 대한국민의회 봉대를 선언하고, 한인 군대를 대한국민의회에 인도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아무르주 한인의회의 기능과 권위를 흡수하고, 기관지 『자유보』(주필 오창환)를 발간하였다. 한인군대의 확대를 위하여 18세에서 35세에 이르는 아무르주의 한인 장정들에 대한 「징집령」을 내렸다. 아무르주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일본군과 백위파가 지배하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등지에 비밀 지부를 조직했다. 또한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 위원인 김철훈과도 연락을 확보하여 김철훈을 지부장으로 하는 이르쿠츠크지부를 설치하였다. 9월 15일 러시아 내 한인들의 합법적 통일 기관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노농(勞農) 러시아가 밟아온 길을 따를” 것임을 표명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방향 전환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1923년 6월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창조파에 속해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창조파로 구성된 국민위원회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자 이들과 함께 노농신조선국(勞農新朝鮮國) 설립을 계획하였다. 1927년 12월 개최된 소련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농업 집단화와 새 기술에 기반을 둔 대규모 사회주의 농업 생산(집단화)으로의 전환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1928~30년에 걸쳐 반우파 투쟁이 전개되었다. 연해주 지방에서의 반우파 투쟁과 전면적인 집단화는 1929년 말부터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토호로 불린 부호 원호인들이 주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 1929년 제9차 원동 변경 당대회에서 반토호 투쟁이 결정되었을 때, 염하익 등과 함께 토호로 몰려 추방되었다. 최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10월 상하이에서 일제가 보낸 첩자에게 독살당했다는 설과 1938년 러시아에서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충칭(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무부장 조소앙의 이름으로 소련에 수감되어 있는 재러 한인 지도자 57명의 명단과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소련 타스통신사 주중 특파원에게 보냈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 - -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문창범(관리번호:48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