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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820
성명
한자 李甲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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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2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여 애국사상을 고취
2. 광무황제(光武皇帝) 양위 반대 운동(讓位反對運動)으로 삼개월간 투옥됨
3. 그 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으며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정교보(正敎報)를 발간하였고 계속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병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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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평안남도 숙천(肅川)에서 태어났다.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때에는 간부급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연말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에는 한 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개혁당(改革黨)운동을 추진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여 대한제국 육군의 장교가 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해서 국권을 박탈하자, 군인직을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6년 10월에 박은식(朴殷植) 정운복(鄭雲復) 김명준(金明濬)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했으며,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하는 데에도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후에 五星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에도 종사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창립위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건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伊藤博文) 포살사건 때에는 안중근과의 긴밀한 관계로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어 3개월간 가혹한 옥고를 겪었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할 목적으로 간부의 일부를 망명시킬 때 여기에 선발되어 1910년 4월 안창호 유동열 신채호(申采浩) 김희선(金羲善) 이종호(李鍾浩) 등 동지들과 함께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밀산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교육과 군사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노령에서 이 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사업을 하다가 만주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240 26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1 75 91 445 447 4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1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9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8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5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17 3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2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8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7 7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9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24 655 663 66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국회도서관) 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68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갑 본명 : 이휘선(李彙璿), 호 : 추정(秋汀) 평남 숙천(肅川) -
본문
1877년 (음)5월 12일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에서 부친 이응호(李膺灝)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본명은 이휘선(李彙璿), 호는 추정(秋汀)이다. 이갑은 일본 유학 시절 군인을 지망할 당시에 개명한 이름이다. 형은 이휘룡(李彙瓏)·이휘림(李彙琳), 아우는 이휘용(李彙瑢)이다.지방 유지였던 부친의 높은 교육열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1888년 고종이 15세 된 이들을 대상으로 ‘무자 식년시’를 치렀을 때, 이에 응시해 진사 3등에 올랐다. 원래 11세였으나 부친이 아들의 영민함을 믿고 15세로 나이를 올려 응시토록 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되어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나 이 일로 집안은 곤혹을 치렀다. 당대 세도가였던 민영휘(閔泳徽)가 평안감사로 부임해 이 소문을 듣고 국가를 기망한 혐의로 부친을 구속하고 악형을 가한 후 40경(耕, 1경 5천평, 약 20만평)에 이르는 농토를 빼앗았다. 이 일로 집안이 몰락하자 수년 간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숙천군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모친이 입교하여 고을에 첫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에 따라 유교적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1896년 서울로 상경하여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며 자강의식과 함께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자비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해 10월 일본 육군예비학교 세이죠(成城)중학교에 입학하여 1901년 12월 4일 졸업하였다. 1902년 4월 13일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 군무를 익히고 그해 12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때만 해도 군인이 되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보다 군인으로 출세해 민영휘에게 빼앗긴 가산을 찾고 집안을 일으키려 한 결의가 더 강하였다. 1903년 11월 30일에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 견습사관으로 배속되었다. 일본 육사 동기인 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1904년 러일전쟁에 종군해 평양(平壤)과 만주(滿洲) 등지에서 실제 전투를 경험하였다.1904년 8월 2일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29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예비과정인 육군유년학교 학도대로 발령받아 초급군인 교육을 담당하였다. 러일전쟁을 경험하며 강대해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느끼는 동시에 한국의 주권이 침해당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자 서울 원동 집에는 여러 지사들이 모여 구국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1905년 4월 4일 전범개정(典範改正)위원으로 임명되었고, 7월 조경단(肇慶壇,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을 개수할 때 작성된 별단(別單)에 의하면 정9품에 올랐다.1905년 일본 시찰 중에 일본의 대한정책에 의해 8월 1일 일본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보임되었고 한국군을 회유하고자 한 일본 군부에 의해 일본군 훈장인 서보장(瑞寶章)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05년 9월에 돌아와 대한제국 군문에 복귀해 10월 10일에 육군 보병 정위(正尉)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무관학교 학도대(學徒隊)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5일 군부(軍部) 부관(副官)에 임명되었다.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민영휘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권총을 품고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옛날 수탈당한 40경 토지와 그간 10여 년 간에 수확한 곡물 전부를 대금으로 환산하고 오늘날까지의 이자에 이자까지 계산해 지불할 것을 강박하였다. 이를 피해 민영휘는 상하이(上海)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상하이까지 뒤쫓아 끈질기게 압박을 가해 마침내 농토를 되찾고 3만원의 돈까지 변상을 받았다.1906년 1월 23일 풍양비각(豐壤碑閣) 건립 때에 별단 정3품에 오르고 6월 12일 육군보병 참령(參領)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국권을 유린당하는 횡포를 지켜보며 분개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의 애국지사들과 소통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본의 한인유학생 단체로 설립된 태극학회의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가 발간되자 이를 축하하며 50원을 의연하고 창간을 축하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한편 1905년 10월 26일 평안도·황해도 출신 인물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하여 구국교육운동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이 학회는 같은 해에 이동휘(李東輝) 등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설립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해 1908년 초에 서북학회(西北學會)로 출범하였다. 민영휘에게 돌려받은 재산으로 서울 낙원동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교사를 지었다. 서북학회가 해산된 이후 이 학교는 오성학교(五星學校)로 개명하였다.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가입하고 6월 7일 군부 교육국(敎育局) 교무과장에 보임되었다. 그 무렵 헤이그특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로 퇴위시키려 하자 어담(魚潭) 등 대한제국의 군인들과 함께 황제 폐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7월 21일 면관(免官) 조치당하고 군인으로서 정치사회의 일에 관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구금되었다.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군권까지 장악한 일제가 일본에서 육사 교육을 받은 한국군 장교를 회유하고자 할 때, 무죄로 방면되어 8월 25일 풀려났다. 1907년 9월 3일 군부에 다시 복귀하였으나 일제가 군인들을 회유해 통감통치의 안전판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하자 군문을 나와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지를 국외에 마련해 장기투쟁을 할 전략을 세웠다.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이토 히로부미 살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용산(龍山) 헌병대로 끌려가 엄중한 조사와 고문을 받고 3개월만인 그해 12월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를 계기로 더 이상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신민회 회원들은 1910년 4월부터 국내를 탈출해 칭다오(靑島)에 모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으며 그곳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개최된 해삼위회담(海蔘衛會談)에서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시종일관 “의연히 농지개척에 주력하여 생활 안정을 얻는 기반 위에서 독립운동의 투사를 양성하는 것이 한민족의 미래 운동에 유리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북만주 밀산(密山)에서 미주의 아세아실업주식회사(이후 태동실업주식회사)가 재미한인의 주금(株金)을 모금하여 개척이 진행되고 있었다.해삼위회담이 끝나자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러시아 외교관·정치가들과 교류하고 독립의 기회를 엿보며 적극적인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에서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으로 알려진 『노바야 보렘아(신시대)』 신문사를 찾아가 한국민의 불행한 처지와 독립운동의 결의와 계획을 주지시켰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청년양성소를 만들어 청년교육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자 고심하였으나 이범진(李範晋) 전 러시아 한국공사의 자결 소식에 큰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외교활동을 위해 러시아어를 하루바삐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과 과로까지 겹쳐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였다. 어느 날 아침 러시아어 공부를 하던 중 연필을 깎다가 손가락 끝을 칼에 베이면서 손가락이 마비되는 증상을 시작으로 손목, 팔 등까지 이어져 급기야 반신불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1911년 7~8월 시베리아에서 미국으로 귀환하는 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른 안창호의 방문을 받았다. 미국에 도착하자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증명서를 보내왔다.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李惠鍊)이 바느질품을 팔아 마련한 적금 300달러를 보태는 등, 재미한인 156명이 모은 연조금을 보내주었다. 미국행을 결심하였으나 혼자서는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여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시베리아 총회원인 서초(徐超)·최광(崔廣) 두 청년이 동행하였다.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에 도착한 후 독일에서 여객선을 타고 뉴욕으로 향하였다.오랜 항해로 인해 탈진해버려 뉴욕에 도착하였을 때, 당시 검사원 감독인 베커라는 이와 면담한 결과 상륙허가를 받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검사원이 자기와 악수만 할 수 있다면 상륙을 허락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끝내 그의 손을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오랜 여행의 보람도 없이 일행은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등에 들려 명의를 찾아 병을 고쳐보고자 진료 받았지만 별 차도가 없자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왔다.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Чита)로 와서 동포사회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병환 중에도 시베리아 지방총회 제2대 총회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치타에서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 발행을 지도하고 북만주 밀산에 설립된 무관학교 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병환이 악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얼마간 체재하였다가 1912년 12월 13일에 지린성(吉林省) 무링(穆陵)으로 향하였다. 무링은 북만주지역이나 동청철도 조차지 안에 있어 행정적으로 러시아령에 속해 안심하고 요양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링역 인근 주막거리에서 걸어서 20분쯤 되는 외딴곳에 안중근의 가족과 이웃해 살면서 안중근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의탁할 수 있었다.국내에 있던 부인은 남편이 무링에서 요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딸 이정희(李正熙)를 동반해 무링행을 감행하였다. 압록강을 넘어 단둥(丹東)을 경유해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해 시아주버니 이휘림의 집에서 머물면서 여행경비와 자금을 얻고 선양(瀋陽)과 창춘(長春)을 경유해 하얼빈역에서 동청철도를 타고 무링역에 도착, 마침내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1913년 12월 25일 재러 한인 동포사회는 의연금모집 발기회를 결성하고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왕령(蘇王營)(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김이직(金理直)의 주도로 의연 모금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전 동포사회로 번져 나갔다.무링에서도 일제의 감시 눈총은 계속되었다. 일제는 “과격패의 일부분 두령”인 존재이며 “이갑이가 이 땅(무링)에서 동지를 모으는 중”이라며 경계하였다. 가족이 오면서부터 부인과 딸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아 병세는 나아져 일어나 앉기도 하고 운동도 할 정도로 차도를 보였다. 민족 대동단결의 결의를 다지며 청년 학생들을 모아 군사교육을 하는 청사진을 다시 펼치며 의욕에 차게 되었으나 병세는 다시 악화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일본이 동청철도 연선에 가택을 수시로 수색하는 등 무링에까지 일제의 세력이 미치게 되면서 안중근 가족과 함께 1914년 2월 7일에 부득이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국이 되면서 러시아령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교포 계몽과 산업 발전을 꾀하면서 시세를 관망하던 중 이상설(李相卨)이 1917년 3월 2일에 서거하자 이 소식을 들고 크게 낙담하였다. 6월 10일 진료를 온 의사에게 자신은 사흘밖에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예언대로 (음)4월 24일 오전 1시 30분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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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위패)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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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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