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1887년 7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선덕면(宣德面) 풍호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원도경(元道京)이고, 모친은 신안 주씨(新安 朱氏)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호는 춘곡(春谷)이다. 주계훈(朱啓勳)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정평군 부내면(府內面) 연봉리에서 세거하며 소규모로 농사를 짓던 부친이 두 살 때 세상을 떠나자,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틈틈이 한문을 배웠고, 자질을 아끼던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18세에 상경하여 일진회(一進會)에서 운영하던 광무학교(光武學校)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대동법률전문학교(大東法律專門學校)를 다녔다. 당시 이동휘(李東輝)·이상설(李相卨)·안창호(安昌浩) 등과 만났고, 특히 배일(排日)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예비검속되어 약 3개월간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1911년 3월 비밀결사인 ‘독립단’에 참여하였다가 발각되어 약 5개월동안 옥고를 겪었다.풀려난 이후 1912년 7월 망명을 결심하고 부산(釜山)과 함경도 청진(淸津)·회령(會寧) 등을 경유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 롱징(龍井)에 도착하였다. 12월에는 소모록구(小母鹿溝)로 이동해 모록의숙(母鹿義塾)을 열고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다가 1913년 이명수(李明洙) 등과 함께 지린(吉林)·펑텐(奉天)·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광저우(廣東) 등을 돌아보고, 칭다오(靑島)에 머물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지린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영사관이 체포령을 내려 북만주의 무링현(穆陵縣) 팔면통(八面通)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박무림(朴茂林)·나봉규(羅鳳奎)·안태훈(安泰勳)·안공근(安公根)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1915년 5월에는 연해주의 우수리스크로 가서 이상설·이동휘·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였고, 대동학교를 세우고 고등소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8년 1월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결성되자 상설위원에 선임되었고, 재무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문제와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로 발전시키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 박은식(朴殷植)·문창범(文昌範)·조완구(趙琬九)·이승복·이동녕과 함께 우수리스크 대표로 참석하였고,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의 상설위원장으로서 대한국민의회 설립 취지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3월 17일 국외 한족을 대표한다는 대한국민의회가 정식으로 발족되면서 상설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상설위원장으로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한족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설위원회를 임시국민의회로 운영하자고 제안하였다.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4월 15일 대한국민의회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과 노령에 임시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협의하기 위한 특사로 파견되어, 5월 7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안창호와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하여 6월 17일 협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다. 이 협의안에는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며, 임시의정원과 아령국민의회를 합하여 의원을 조직하되 노령에 의회를 두자는 주장이 있으면 허락할 것”이라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임시의정원에서 부결되자, 다시 안창호 등과 논의하여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1919년 7월 우수리스크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를 열어 협의된 내용을 보고하였고,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방안을 이끌어 내어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 재무부로 보냈다. 한편, 임시정부는 8월말 현순(玄楯)과 김성겸을 파견해 대한국민의회에서 설명하게 하였고, 그 결과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는 해산을 선포하였다.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과 국무원을 발표하고 같은 달 15일부터 공식적인 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10월 11일 임시정부 교통총장에 임명된 전 대한국민의회 의장인 문창범(文昌範)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해산하기로 논의된 임시의정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임시정부가 한성정부를 봉대해 새롭게 정부를 수립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문창범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20년 2월 15일 임시의회를 열어 대한국민의회를 다시 설치하였고, 임시정부 반대 활동을 전개하였다.한편, 1920년 2월 7일 우수리스크에서 주최한 대한국민의회 독립기념식장에서 연설을 하다가 일제 헌병이 쏜 총에 맞았으나,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4월 5일에는 니콜리스크의 집에서 동료들과 회의를 하다가 일본 무장병력에게 기습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이때 김리식·최재형·엄주필·황가피톤 등이 사망하였다.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를 장악하자 문창범 등 약 20명과 함께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로 이주하고, 정보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러시아정부·공산주의자 등과 접촉하며 1920년 9월 15일 대한국민회의 내무부장 겸 부의장으로 반제국·반자본주의 투쟁 선언서 발표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의회의 간부들과 한인보병자유대대를 조직하고 그 아래에 공산당 야체이카를 만들었다. 또한 대한국민의회 간부들과 이르쿠츠크의 전로한인공산당그룹과의 제휴도 강화하였다.1920년 말 상하이로 이주하였고, 1921년 2월 박은식·김창숙(金昌淑)·최동오·김진우·고일표(高一彪)·김강산·정인교·유진호·유건혁·유례균·이민창·손영직·안병찬·왕삼덕과 함께 “군책(群策)과 군력(群力)을 종합하여 독립운동의 최량 방침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해 임시정부 수립과정의 문제와 조직·제도가 갖고 있는 한계 및 구조적인 문제 등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1921년 5월 연설회 등을 통해 국민대표회가 발족되었고, 국민대표회 기성회 20인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베이징·톈진(天津) 등의 지역에서 기성회의 설립이 이어지자, 8월 국민대표회주비회가 조직되었다. 그러자 상해기성회대표로 주비위원에 선임되었다. 1922년 3월에는 여러 문제로 연기되던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당위성을 주장하였고, 4월 주비회의 회계로 선출되었다. 7월 20일에는 문제해결을 위한 목적으로 임시정부와 주비회 인사들을 모아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한편, 9월 18일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편집간사로 선출되었다.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고 회의가 진행되자, 연해주 중부지방대표로 참여해 의정기초위원과 생계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자급자족 원칙을 통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보장, 이주 조선인 생계유지를 위한 각종 조합 설치 후원, 금융기관 설치 등의 내용이 회의에서 통과되도록 노력하였다.개조론과 창조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국민대표회의는 4월 말 폐회될 예정이었다. 개조파는 여러 안건을 계속 토의하였고, 김규식(金奎植)·신채호(申采浩)·김두봉(金枓奉)·지청천(池靑天) 등의 창조파는 러시아로 돌아가 독립운동 거점을 다시 만들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5월 16일 의장·부의장 선출, 시국문제 관련 회의 및 단독 신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 초안 작성 등을 진행하였다. 6월 7일에는 헌법기초위원 수정위원으로 윤해(尹海)·신숙(申肅)·박종근(朴宗根) 등과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조직 구성과 함게 박은식·문창범·신채호·이동휘·이상룡 등 31인의 고문, 국민위원 33인, 국무위원 4인 등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국민대표회의 무산 이후 1923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창조파를 중심으로 지지자들을 모아 국민위원회를 소집하였고, 1차 회의(1924. 2. 19~13) 참석을 위해 상하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김규식을 동행하였다.1925년 3월에는 일·소어업협정 부대의 비밀협정의 소련내 한국독립운동자들에 관한 조항에 따라 김규식·신숙·강구우(姜九禹)·김세준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강제추방되었다. 이후 베이징에 거주하며 베이징대학 노문과를 다녔고, 3월부터 『도보(導報)』 발간에 참여하였다.1927년 2월에는 김운(金雲)·박관해(朴寬海)·이상일(李相一) 등과 중국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고, 국내로 압송되어 1928년 8월 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30년 1월 말 풀려났다. 이후 서울에 거주하면서 1931년부터 『중앙시보(中央時報)』 주간을 맡았고, 유광렬(柳光烈) 등과 함께 조선문필가협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한 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에서 장학사업에 힘썼다.1936년 2월에는 뤼순감옥에 수감중인 신채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삼천리』 4월호에 「단재 신채호」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후 1940년대에는 북경대학 동기인 이조헌(李祖憲)의 농장이 있던 경기도 평택에서 은거하였다.광복 이후 계동 한학수(韓學洙)의 집에 거주하며 8월 19일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을 창당하였다. 고려민주당은 8월 28일 우파 인사들이 참여한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이 창당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리고 당수로 추대된 이후, 김병로(金炳魯)·조병옥(趙炳玉) 등과 자주 회합하며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출범시켰다. 이때 백관수(白寬洙)·김도연(金度演)·조병옥·백남훈(白南薰) 등과 함께 최고위원격인 8인의 총무로 선출되어 함경도를 대표하였다.1946년 5월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자, 5월 30일·6월 14일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 등과 회합을 진행해 도출한 세 가지의 의견일치 내용을 국민들에게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리고 7월 10일 좌·우 대표가 구성될 때, 김규식·김붕준·안재홍·최동오와 더불어 우측 대표를 맡아 이후 회담에 참여하였다.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지만, 토지개혁문제로 10월 9일 탈당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다. 한편, 이 문제로 고심하다가 7원칙 합의 발표 이전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위원장이던 김구(金九)를 찾아가 토지문제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민중동맹에 참여하고 조선농민당(朝鮮農民黨)을 창당하였지만,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1947년 10월에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에 참여해 홍명희(洪命熹)·이극로(李克魯) 등과 함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는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관여하며, 김규식·김붕준 등과 북한에 갔다가 5월 초에 귀환하였다.1950년에는 5·30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 후보로 서울 중구 갑구에서 윤치영(尹致暎) 등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9월 8일 김규식의 집에서 붙잡혀 납북되었다. 1956년에는 북한의 강요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하지만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하고, 12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11월 21일 김규식·조소앙·조완구·엄항섭 등 납북인사 15인에 대한 추모제와 위패봉안식이 국립묘지 현충원에서 거행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