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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628
성명
한자 柳麟錫
이명 金斗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0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895년 가을에 이강년(李康秊) 등으로부터 제천(堤川)거의(擧義)하여 사방에 격문을 전하였다
충주(忠州)진격(進擊)하여 충주관찰사(忠州觀察使), 단양군수(丹陽郡守), 청풍군수(淸風郡守) 등을 주살(誅殺)하고
2. 1896년에 장기렴(張基濂)에게 패하여 평안(平安), 황해(黃海), 함경(咸鏡) 각 도지사(各道知事)들과 연락하여 재기를 꾀하여 초산(楚山)거의하기로 하고 백관(百官)에게 재격(再檄)하여 (敵)성토(聲討)하다가 실패하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갔다
3. 1909년 5월 18일 해삼위(海蔘威)에서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두만강(豆滿江)을 공략하려다가 (倭),(露)의 교섭 결과 체포되었고
4. 1910년 국치(國恥) 후에는 이천만민족대표(二千萬民族代表)열국(列國)성명서(聲明書)를 보내어 소지(所志)를 이루지 못한채 1915년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병으로 서거(逝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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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의(擧義) : 의병을 일으킴
  • 주살(誅殺) : 죄를 물어 죽임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4세 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金平·)과 종숙인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이 나왔는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유중교·김평묵·의암 유인석 등이 그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석학들이었으며,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이가 의암으로서 병자조약에 반대 상소를 올린 바도 있었다.

"국론이 친교와 전쟁 양설로 나누어져 있는데 양적(洋賊)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설이요···팔도 내에서 각각 인망 있는 사람을 하나씩 뽑아서 소사(召使)라 칭하고 그들에게 위권(威權)과 존총(尊寵)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충성스럽고 기절(氣節)있는 사람을 수습하여 의려(義旅 의병)를 만들게 한 다음 그 의려를 관군과 함께 서울로 응원케하여 적이 오면 절충어모(折衝禦侮)하여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이륜(·倫)을 수명하여 사교(邪敎)를 종식케 한다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얻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서 이항로가 올린 이 상소문에서 일찍이 외적에 대한 의병의 조직이 논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암은 병인양요 당시 25세의 청년으로 스승을 따라 서울에 머물고 있었으니 의병론 상소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년 후 제천(堤川)에서 강학하고 있던 의암이 전기 의병운동의 상징적 존재로서 전국 의병진의 중심적 세력이 되었던 것은 필연적인 사실로 볼 수 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거의할 마음을 굳히고 11월 28일 문인인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의병진에 격려의 글을 보냈다. 당시 의암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정리에서 여막(蘆幕)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바 제천(堤川) 의진의 예하 부대들이 제천으로 진군, 양근(陽根)·지평(砥平)·원주(原州)·제천(堤川)에 이르는 일대의 의병이 모두 제천에 집결하게 되어 대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의진이 구성되자 내부적 단결을 굳건히 하고 또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는 명망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지도 체제가 요구되었다. 그들은 의암을 찾아가 대장의 소임을 맡아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는 상중에도 불구하고 권도(權道)를 택하여 출진(出陣)할 것을 허락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이 조직은 연합 의병 부대로서 의암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 할뿐 실제의 전략은 각 예하 부대가 수행하였다. 즉 중군(中軍) 이춘영의 부대와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부대와 유격장 이강년(李康·)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과도 이강년을 통하여 상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의암 의병 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강원도의 3도가 접경하는 충주·단양·원주·영월·안동·문경을 연결하는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 거대한 의병 세력은 충주의 일군(日軍)수비대 공격에서 그 모순 특히 신분상의 모순이 드러나 결국 평민출신 김백선(金伯善)을 처형하게 되고, 그 사건이 급속한 약체화 현상을 가져왔다. 그 결과 독자적으로 활약하면서 전국적인 유기체적 존재이었던 이강년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의병장을 잃고 사산(四散)되어 각지에서 지엽적인 활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주요 막료들이 차례로 패망하자 의암은 잔존자와 더불어 평안도·황해도의 의진을 찾아가나,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요동(遼東)으로 떠났다.

압록강을 도강(渡江)함에 앞서 1896년 7월 초산 아이성(楚山 阿夷城)에서 ‘재격백관(再檄百官)’이라는 장문의 격문(檄文)을 지어 천하에 발표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집권관료들을 통박하고 이어서 "지금 나라를 버리고 압수(鴨水)를 건너감은 기필코 원수를 갚고 다시 우리나라에 예의지방(禮儀之邦)을 세우기 위한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이역(異域)에서 우리의 옷을 입고 우리의 머리를 하고 우리의 구제(舊制)를 지켜 죽어서 귀국할 것이다" 이렇듯 철저한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장한 각오로 요동으로 들어갔다. 7월 20일 압록강을 건넌 의병진은 중국 관헌에게 이범직(李範稷)과 부하 장졸이 피살당하고 무기도 빼앗겼다. 의암이 요동으로 간 것은 청병(請兵)하고자 한 것인데 오히려 자신은 물론 부하 219명의 의병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219명의 의병은 본국으로 되돌려졌다.

그후 1897년 5월 회인현 호려두(胡蘆頭)에 정착하여 재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렇듯 의암이 다른 의진과는 달리 정부의 회유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만주로 돌아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는 것은 일찍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구축을 착수하게 된 흔적으로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1898년 8월 의암은 고종의 소명을 받고 일시 귀국하였으나 초산에서 상소문만을 보내고 알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1899년 1월 요동으로 들어가 동지들과 이른바 의체(義諦)를 상약(相約)했는데 그 목적은 전통적인 국제(國制)와 예의를 지켜 장차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후 통화현 오도구(通化縣 五道溝)에 거처를 정하자 이정규(李正奎)·백삼규(白三奎)·박정수(朴貞洙)·김상태(金尙台) 등 80여 명이 의암을 쫓아와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강학(講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즈음 그의 사상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사상 전개를 보이고 있다.

1900년 그가 다시 귀국한 것은 중국의 의화단 사건 때문이었다. 서양사람이 아니더라도 기타 외국인 역시 생명의 위협이 적지 아니하였으며 그 여파가 만주에까지 파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의암은 황해도 평산(平山)과 평안북도 용천(龍川)·태천(泰川)·개천(价川) 등지에서 강학하였는데 평산은 종숙인 유중교가 강학하던 곳이고, 태천은 동문 박문일(朴文一)이 강학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자리잡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의 문하에 다시 수많은 인재가 운집하여 그들이 모두 훗일 을사의병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출국할 때 그를 수행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 전덕원(全德元)·백삼규(白三圭)·이진용(李鎭龍)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렇게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는 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충청도·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다니며 향약의 조직과 시행을 권장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 되자 의암은 60여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국 유림에 통문을 돌려 비록 병토(兵討)는 못할지라도 언토(言討)·의토(義討)라도 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아울러 백인해(白仁海)·전용제(全庸濟)를 청에 파견하여 원세개(袁世凱)에게 청병하였다. 이때 문인 박세화(朴世和)·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의암은 새로이 결심을 하고 요동으로 거수지행(去守之行)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는 죽음이나 개별적인 항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고 어디까지나 살아서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해외기지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무력항쟁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요동으로 가던 중 각기병으로 용천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좌이수의(坐而守義)하기로 결심하고 그후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항쟁을 대비하였다.

1907년 8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마저 당하자 의병운동은 전민족적 항쟁으로 번지고 의병에 참가하는 신분 계층도 다양화되는 등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이를 저지하려는 일제의 노력도 극렬화 되어갔다. 의암은 전국적인 조직적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상경하였다. 그리고 의병운동은 국외로부터의 원조가 없이는 종국에 실패할 것이라고 보고, 이를 위하여는 국외에 항구적인 항쟁 기지를 마련하여 그곳으로부터 무기가 공급되고 본토회복 작전을 계획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원산으로 출발하였다. 이미 그의 고향집과 가족은 일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참살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1908년 7월 원산에서 해로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의 문인 50여 명이 수행하였는데, 박정빈(朴正彬)·이진룡(李鎭龍) 등 의병장이 섞여 있었다. 떠나기에 앞서 의암은 전국 의병창의소에 대하여 일국진기(一國盡起)와 지구전(持久戰)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지적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의암은 그곳에서 활약 중인 최재형(崔才亨)·이범윤(李範允) 등의 의병진을 방문 격려하고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 등을 만나 해외에서의 무력항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관일약(貫一約)이란 의병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잡았다. 즉 애국(愛國)·애도(愛道)·애신(愛身)·애인(愛人)의 마음을 길러 장차 나라를 되찾으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급하게 본국 침공(本國侵攻)을 하면 도리어 효과는 적고 피해만 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소중한 인명만 상할 터이니 원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후 의암이 예측한대로 국내의 의병운동은 급격히 퇴조(退潮)하게 되었다.

1910년 초 연해주 의병 연합체가 형성되자 이범윤·이남기(李南基)·이상설·정재관(鄭在寬)의 추대로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의 직에 올랐다. 이어 ‘13도 대소동포(十三道大小同胞)에게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2천만 국민의 단결과 결사 보국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조직적 운동 방안으로서 전국 각 도·읍·면에 총재·총령·참모·총무·소모·규찰·통신 등의 직책을 두어 전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국망통곡운동(國亡痛哭運動)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자 계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파천우아령해삼위(播遷于俄領海蔘威)’라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보내 파천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종용하였다. 한편 문인 백삼규·김기한(金起漢)·장덕중(張德中) 등을 북경에 파견하여 원세개(袁世凱)와 정부요인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공동항일(漢中共同抗日)을 권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에서는 내용은 찬성하나 국력이 미약하므로 시기상조(時期尙早)라는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과 함께 성명회(聲鳴會)를 결성하고 그 회장으로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열강정부에 발송하였고, 일본정부에도 항의하는 각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 어느 방법으로도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대일정책 때문에 끊임없이 탄압이 가해져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이때 의암은 문인들에게 의를 지킬 세 가지의 길 첫째 나라에 보화(保華)하고, 둘째 몸으로 수화(守華)하고, 셋째 몸으로 순화(殉華)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나라에 보화하는 것은 나라를 되찾은 연후에 가능한 일이고, 몸으로 순화하는 것은 일국인(一國人)이 다 같이 해야 할 일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니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수화(守華)하는 일이라 하여 동지들과 더불어 이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논리에 따라 국내의 모든 지사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間島)로 나와서 수절(守節)하자고 호소하였다.

의암 자신도 1913년 블라디보스톡에서 나와 간도로 거점을 옮겼다. 그후 서풍현(西豊縣)·흥경현(興京縣)을 거쳐 1915년에는 봉천성 관전현 방취구(寬甸縣 芳翠溝)에 이르러 신병으로 신음하다가 74세를 일기로 타국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70노구로 병마에 시달리면서 탈고한 책이 『우주문답(宇宙問答)』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 전통의 구제(舊制)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중국마저도 서양의 공화제(共和制)를 채택하게 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슬픈 마음으로 저술한 것이다. 이것은 「소의신편(昭義新編)」과 아울러 「의암집(毅菴集)」상하권에 수록되어 편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27·29·39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19~22·27·28·29·30·31면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349·350·351면
  • 독립운동대사전 527·5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17·140~156면
  • 매천야록 192·205·206·270·4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30~137·193·194·200·207·260~262·275·276·406·566· 635·6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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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인석 자 : 여성(汝聖), 호 : 의암(毅菴) 강원 춘천(春川) -
본문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현 춘천시)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서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申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다. 1855년 2월 14살 때 족숙(族叔) 유중선(柳重善)의 양자가 되어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설악면(雪岳面) 자잠(自潛, 현 사룡리 자잠마을)으로 이주하였다. 양가(養家)의 증조부 유영오(柳榮五)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일찍이 교분을 맺었기 때문에 입양된 시점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화서학파 학문의 핵심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였다.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로 만동묘(萬東廟)가 철폐되자 이를 비판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이항로가 유림의 대변자로서 조정의 부름을 받자 함께 상경하여 활동하였다. 1868년 이항로가 사망하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지도를 받았다.1871년 충북 괴산군(槐山郡) 화양동(華陽洞)의 만동묘를 참배하였고, 1874년 스승 유중교와 함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朝宗面) 대보리(大報里) 조종암 대통단(朝宗巖 大統廟)을 방문하여 위정척사사상을 강화하였다.1875년 운요호사건으로 정부에서 개항과 반개항을 놓고 논의가 발생하자, 1876년 1월 유림들과 상경하여 “금일 강화는 비단 국가의 존망이 결판나는 일일뿐만 아니라 사도와 인류가 멸절되느냐 마느냐하는 중대한 일”이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며 개항에 반대하였다.1877년 유중교의 지시로 가평군 외서면(外西面) 화야산(禾也山) 운곡암에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으며 학문을 닦았고, 이후 개화 풍조를 반대하면서 만동묘를 참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83년에는 스승 유중교와 설악산에서 공부하였고, 1884년 춘천군 남면 가정리로 이주하였다. 1893년 제천군(堤川郡) 장담리(長潭里, 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으로 이주하여 강학하였고, 스승 유중교가 별세하자 춘천 가정리 유중교의 강단에서 강회를 하였다.1894년 6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갑오개혁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고자 하였지만 주변의 호응이 없어 실패하였다. 1895년 1월 갑오개혁의 조치 중 하나인 변복령에 반대하였고, 같은 해 5월 충북 제천군 장담리 굴탄(屈坦, 현 봉양읍 구곡리)으로 이주하여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강회를 실시하였다. 그 해 8월 을미사변에 이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며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소탕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해외로 망명하여 중화 문화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대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을 내용으로 하는 ‘처변삼사론’을 선비가 행해야 할 3가지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중국 망명을 생각했지만 안승우(安承禹)를 비롯한 문인들의 만류로 같은 해 11월 의병활동을 시작하여 대장 이필희(李弼熙), 중군 이춘영(李春永), 선봉 김백선(金伯先), 군사 서상렬(徐相烈), 군무도사 안승우를 지휘부로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의병부대가 구성되자 제천군 인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고 이필희와 차후 계획을 논의하며 서북에는 강한 포군이 모여있고 동남에는 인재와 곡식이 있기 때문에 원주(原州)와 제천 사이에 근거를 두고 서북에서는 군사를 모집하고 동남에서는 인재를 모집하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단양(丹陽)으로 의병부대를 이동시켜 관군과의 장회촌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전투 이후 지역 문인들이 의병장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친상 중이며 선비이기 때문에 병사를 지휘할 능력이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성리학적 대도를 보존해야한다는 제자들의 권유로 의병장이 되었다.1896년 2월 영월(寧越)에서 호좌의병부대를 결성하고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전통문화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의병장 취임 즉시 전국에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를 권하였다. 당시 의병의 지휘부는 창의대장 유인석,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申芝秀), 선봉장 김백선이었다. 그 해 2월 11일 호좌의병부대는 영월에서 제천으로 이동하였으나 제천의 방비 태세가 견고하자 충주(忠州)로 진격하였다. 그러면서 의병에 비협조적이었던 단양군수와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처단하여 대의명분을 확고히 세웠다.1896년 2월 15일에는 충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충주성 남문을 통해 달아나던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일제의 앞잡이라는 명분으로 처형하고 인근의 개화파 군수들을 처단하면서 반외세 항쟁을 전개하였다. 호좌의병부대가 충주를 점령하자 춘천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이소응(李昭應)이 합류하면서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작성하여 의병부대의 체제를 구체화하였다. 이 시기 중앙에서는 아관파천의 단행으로 친일내각이 붕괴하였고 전국적으로 의병들의 해산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같은 날 일본군이 달천(達川)을 건너 충주를 공격했지만 중군장 이춘영이 패퇴시켰고, 수안보(水安堡)에서도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춘영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1896년 2월 29일 일본군은 병력을 확충한 후 이틀에 걸쳐 충주성을 공격하였고 성내로의 물자 지원이 차단되자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같은 해 3월 2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포를 빼앗기고 주용규(朱庸奎)를 비롯한 6인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같은 달 5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더 이상의 항전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음을 틈타 충주성을 빠져나갔다. 같은 달 8일 청풍을 거쳐 제천으로 돌아와서 병력을 재정비하였다.이때 문경(聞慶)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이 합세하자 유격장으로 임명하여 호좌의병부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의병부대를 정비하고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可興, 현 충주시 중앙탑면)과 수안보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1896년 3월 15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수안보를 공격하였지만 일본군의 방비가 철저하자 후퇴하였고, 같은 달 18일 가흥을 재차 공격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그 해 4월 25일 친위대(親衛隊) 참령 장기렴(張基濂)이 4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국가의 재물을 빼앗는 것은 의병이 아니라며 의병해산을 종용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자 국모의 원수를 갚고 존왕양이의 의리를 펼치는 것은 대원칙이고, 의병들이 살해한 관리는 국가의 관리가 아닌 난적이며, 왜적과 역적을 토벌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23일 친위대 병력의 공격을 받아 안승우 등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고 단양으로 후퇴하였다.이후 단양에서 수산으로 이동하였고 의병부대 패배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중화의 명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로 의병활동을 재개하였다. 일단 패배한 의병부대를 추스르면서 1단계 여주(驪州), 2단계 강원도, 3단계 서북지방, 4단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구원병 요청, 5단계 중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국내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여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심상희(沈相禧)가 의병부대를 해산하여 여주를 포기하고 강원도로 의병을 이끌고 이동하였지만 친위대 장기렴의 추격을 받았다.1896년 7월 관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받으면서도 서북지역으로 이동하여 같은 해 8월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관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같은 달 24일 압록강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초산 아이진(阿吏鎭)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통해 의병항쟁의 정당성과 춘추대의의 필요성을 발표하여 국경을 넘는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나라의 원수를 갚고 예를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1896년 8월 28일 240여 명의 호좌의병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으나, 다음날인 29일 청나라 관리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고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강을 건넌 240명 중 219명의 의병이 귀국하였고, 유홍석(柳弘錫, 유인석의 종형)을 비롯한 21명이 남아 서본우가 지정해 준 환런현(桓仁縣) 호로두구(湖蘆頭溝)에 머물렀다. 호로두구는 산으로 둘러싸여 의병의 근거지로써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인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기에는 곤란함이 있었다. 이에 위안스카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관련 인사들과 함께 선양(瀋陽)으로 이동하였다. 위안스카이가 임오군란 때부터 갑오개혁까지 한국에 머물며 위정척사정책을 후원했기 때문에 군사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이유로 군사적 지원이 아닌 군자금으로 은자 30냥을 지원받았다.중국의 지원이 여의치 않자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한인 이주민이 있는 퉁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이동하였다. 퉁화현에 의병 재기를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농사와 가축 사육을 통해 식량을 비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여동문사우서(與同門士友書)」를 작성하여 의병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였다. 1896년 9월에는 서상무 등에게 귀국하라는 칙명을 받았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칙유를 받지 않으면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고 이는 군신의 인륜을 없애는 것이니 귀국할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북지역에 기거하며 향후 계획을 세워 나라가 회복되지 않으면 차라리 평생 랴오둥(遼東)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1898년 2월 출발하여 그 해 4월에 랴오둥에 이르렀고 같은 해 6월 퉁화현 오도구에 도착하였다. 2차 망명 때는 1차와 달리 유인석의 문인과 그 가족 등 50~60여 명과 함께 이동하여 의복과 상투를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물을 유지하는 일에 치중하였다. 같은 해 11월 오도구 팔왕동(八王洞)으로 이동하여 의병근거지를 조성하였고, 1899년 근처의 용산촌(龍山村)으로 이동하였다. 이 지역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한인 이주민들에게 충효사상을 교육시켜 후진을 양성하고 ‘소중화 예의지국’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고조선부터 한국의 덕학, 명절, 충신, 효자, 열사에 관한 사실들을 모은 국사책인 『동국풍화록(東國風化錄)』, 시국 문제를 이야기한 『국병설(國病設)』 등 저술 활동을 벌이며 국내외 반일투쟁을 촉구하였다.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주변 환경이 험악해지자 산으로 피산하였고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하면서 중국에서의 활동 전말을 상세히 적어 고종에게 보내 반역의 혐의를 벗었고, 그 해 12월 화서학파의 중심지인 충북 제천과 황해도 평산 등지를 돌면서 중화를 보존하는 일에 힘쓰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면서 평안도에 거처를 정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강회활동을 하며 주자학의 저항 논리를 되짚고 중화 문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901년 5월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이어갔다. 서북지역은 기자(箕子)의 고향이라는 명분과 이항로의 문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지로써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평안도에서 활동하면서 새롭게 건물을 짓고 유교 성현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와 함께 호좌의병의 활동, 화서학파와 위정척사운동의 전모, 존화양이론의 성격, 유인석이 작성한 격문과 편지 등이 수록된 『소의신편』을 간행하였다. 일제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자, 서북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향약과 계를 실시하여 향촌사회의 결속을 강화하여 시국안정을 도모하였다.1904년 10월에는 평산(平山)에서 제자 원용정(元容正) 등에게 향약을 조직하도록 지시하고 경기도 포천으로 이동하여 최익현(崔益鉉)을 만나, 전국 단위의 향약을 제안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제천에서 이소응 등에 의해 향약이 실시되었고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향약과 함께 의병활동의 인적 기반 마련을 위해 계를 실시하여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호남까지 영역을 확대시키고 전국적으로 넓히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담은 「칠실분담(漆室憤談)」을 지어 개화 정책이 초래한 위기를 지적하고 국왕과 집권층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수의(守義)로 방향을 바꿔 향약을 실시하도록 추진하였다.1905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제자들이 의병 봉기를 하자 이들을 후원하였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중화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이를 위해 강원도 화천군 곡운산에 유교 성현을 모시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강회를 열고 후학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였다.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 각지의 관료와 유림들에게 일제를 내쫓을 것을 촉구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왜적 토벌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을사늑약 체결 이후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촉구하자 1906년 4월 의병을 일으키기를 시도하였으나 건강 및 국내외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의를 표하였다. 강원도 춘천 가정리로 돌아온 후 같은 해 6월 전국 각지에 편지를 보내 친일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을 비판하면서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등 위정척사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1907년 3월 본격적인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고 같은 해 7월 한성부(漢城府) 중부(中部) 교동(校洞,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일대)의 이용규(李容珪)와 밀사를 통해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일단 군사력 강화를 위해 해외로 가서 의병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러시아로 가기 위해 함남 원산(元山)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낙마하여 부상을 당해 러시아로 가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1908년 지속적인 의병활동을 위해 백두산을 근거지로 장기 항전을 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작성하였다. 같은 해 5월 러시아로의 망명을 위해 60여 명의 문인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석을 보내고 두만강 넘어 러시아, 중국과 국경이 접한 지역인 연추(煙秋, 현 크라스키노) 중별리(中別里)로 이주하여 연해주 의병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할 때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 해 11월 의병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하기 위한 「의병규칙」을 제정하여 의병부대의 체계를 갖추고자 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1909년 1월 불화에 빠진 연해주 의병의 지도자 이범윤(李範允)과 최재형(崔在亨)의 화해를 주선하였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자 거주지를 이전하여 별도의 대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4월 망국단과 망묘당을 쌓고 유교 성현과 스승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 해 8월 국권을 회복하고 화맥을 보존하며 인종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 「관일약(貫一約)」을 제시하며 의병 활동을 재개하고자 시도하였다. 같은 해 12월 의병을 통제하는 법을 마련하기 위해 「의병규칙」을 발전시킨 「의무유통(義務有統)」을 지었다.1910년 5월 전국적 의병조직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가 되었다. 13도의군은 중앙조직과 국내조직으로 구분되었고 중앙조직은 도총재(都總裁), 부총재, 창의총재, 도총재(道總裁), 도총령, 도참모, 도총무, 도소모, 도규찰, 도통신 등을 두고, 국내조직은 각 지역마다 총재, 총통, 참모, 총령, 소집, 규찰, 통신 등으로 구성되었다. 13도의군 결성식에서 국가를 보존하고 예를 되찾아야 함을 역설하였고, 국권을 회복하고 인류를 구하고 화맥을 보존하는 것이 의병봉기의 목적임을 밝히는 통문을 13도의군 의원들에게 보냈다. 같은 해 7월 28일 이상설(李相卨)과 연명으로 고종에게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영사관 파천과 군자금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러시아 지역에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외무대신을 파견하여 러시아 정부에 한국인의 항일운동에 대해 항의하였고 러시아 정부는 이후 배일운동을 단속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9월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13도의군 이범윤을 비롯한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13도의군이 해체되었다.1911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산속에서 은거하였다. 가을이 되자 13도의군 간부들과 성명회(聲鳴會)를 중심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수총재(首總裁)가 되었다. 하지만 권업회가 재러한인들의 러시아 귀화를 추진하자 의리로 보나 이해로 보나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과 관계를 맺은 러시아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자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1913년 2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우주문답』을 저술하였고 3월 노령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 마우카예프카(木花村)로 이주하였다.1914년 3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시펑현(西豐縣)으로 이동하였고, 그해 5월 싱징현(興京縣) 난천자(暖泉子)에 정착하여 「도모편」을 작성하고 『우주문답』을 발간하였다. 같은 해 4월 김두운(金斗雲)을 베이징(北京)의 위안스카이에게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8월에 콴덴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로 옮긴 뒤 1915년 3월 74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1899년 문인 김화식 등에 의해 그동안 나온 항일의병 관련 글을 모아 문인사우들의 글과 함께 『소의신편(昭義新編)』이 간행되었고, 1902년에는 역시 같은 문인인 백삼규, 김형걸 등에 의해 『소의속편(昭義續編)』이 발간되었다. 사후에는 시문을 모은 문집 『의암집(毅菴集)』이 발간되었고, 2010년에는 제천문화원에서 『국역 의암집』을 출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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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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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자양영당(제천의병 전시관) 충청북도 제천시
2 동상 의암 류인석선생 동상 강원도 춘천시
3 장소 제천의병전투지-충주성터 충청북도 충주시
4 비석 항일의병 전적비 강원도 양구군
5 (제천)의병탑 충청북도 제천시
6 기념관 의암류인석기념관 강원도 춘천시
7 비석 충의현비 강원도 춘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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