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충남 금산(錦山) 사람이다.
일찍이 전주 신흥학교와 군사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신흥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6년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 있는 폴리텍고등학교(Polytec High School)를 졸업한 뒤 U.C.L.A, 버클리대학 등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하였다.
한편 도미 이후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입,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1929년 여름에는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몬타나·오레곤 등지의 5개 지부 대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회합,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北美總會)를 결성할 때, 이살음·임병직(林炳稷) 등과 같이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이 회합에 참석하였다.
하와이의 동지회에서 독립하여 별도로 조직된 이와 같은 동지회 북미총회에서는 시종일관 재정 분야를 담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살음·박호근의 뒤를 이어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북미총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43년 4월에는 10여 년간의 모연(募捐) 적립금 4천 달러를 기반으로 2천 달러의 은행 융자를 받아 로스앤젤레스 36가 1112번지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는 데 중추역할을 맡았다. 이와 동시에 그 기관지로 속쇄판인 〈북미시보〉(北美時報)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1941년 4월 20일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어 독립전선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등을 비롯해 항일독립운동 전반에 관한 문제가 토의 결의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고 호놀룰루에는 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가, 로스앤젤레스에는 집행부(執行部)가 각각 구성될 때, 그는 집행부의 위원(총 14명)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과(國防課)에서 100명 이상의 한인 지원병을 확보하여 1942년 2월 경위군(警衛軍, 일명 猛虎軍)을 조직하였을 때, 참위(參尉) 계급으로 주계과(主計科)를 맡아 재정문제를 담임하게 되었다.
경위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까지 받아 미주 한인의 상무 기백을 모아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것이다. 비록 미군의 지휘를 받는 미국내의 군대였지만, 이 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전쟁에서 해외한인 의용군의 기간부대가 되어 즉시 출동하는 것이 그 목표였던 것이다.
1944, 5년 양년에는 전후 3회에 걸쳐 독립금(獨立金) 3백 원을 출연(出捐), 「한인 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였으며,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1일 열린 제1회 동지회 미국대표대회에 몬타나지방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2권 672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5권 138∼140면
- 송철회고록(이상수, 1985. 6) 186∼191·1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8집 730·731면
- 신한민보(1942. 3. 5)
- 북미시보(1944. 6. 1, 8. 15, 1945. 6. 15, 7. 1, 7. 15)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13권 36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