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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2317
성명
한자 朴殷植
이명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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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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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9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을사보호조약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주필로 애국독립사상 고취

2. 합병 후 망명하여 만주, 상해에서 다시 연해주, 니꼬리스크 한인동포의 요청을 받아 잡지를 발간하고 독립운동 계속

3. 임시정부 대통령

4.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안중근전, 건국지, 단조사고, 동명성왕실기 등을 저술하여 애국사상을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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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황주(黃州) 사람이다.

대표저작으로 「한국통사(韓國通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손꼽을 수 있는 민족사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지낸 독립운동가이고, 「황성신문」, 상해 「독립신문」, 「한족공보」의 주필, 사장 등을 역임한 민족 언론인이다.

그의 생존기는 격동의 시대였고, 그가 만년에 봉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은 곧 독립운동의 최고봉이었다. 그는 중키에 악골(顎骨)이 좀 튀어나왔으며 항상 미소짓는 강직 온화한 얼굴이고 관후(寬厚)하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67세의 생애 중 전반생이 넘는 40세 때까지의 그의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적다. 단지 대원군의 집정시대에 유년기를 보냈으며, 문호개방기에 소년기를, 20대의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면서는 신문명 수용의 개화풍경과 일·청·러 등 제국주의의 침입을 경험하였다.

그후 30대에 대원군과 명성황후, 수구당과 개화당 등의 파벌 항쟁과 자주성이 결한 근대 외교와 문명수용이 국가 사회를 위기 속에 몰아넣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런 사회 변동 속에서 그의 사명과 의무를 수행하였다. 민족문화를 수호하고 외세를 격퇴하며 근대사회를 건설하려는 방도가 그의 지향할 바임을 결심하여 이를 구국의 방도로 굳히고 먼저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그의 활동이 표면화한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 고조되었던 만민공동회가 열린 1898년경부터였다. 이해 9월에 민족지사 장지연·남궁억·나수연(羅壽淵)·유 근(柳瑾) 등이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새로이 「황성신문」이란 제호로 창간 보급하였는데 그는 장지연과 같이 주필에 취임하였다.

1900년에는 민족교육을 위하여 교육계에도 투신하여 유림의 태두 곽종석(郭鐘錫)·김창숙(金昌淑) 등과 같이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에서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에 들어가 국민교육 담당자를 집중 육성하였다. 그가 이같이 교육에 뜻을 둔 것은 관직을 탐내지 않고 민족과 국가를 구하려는 애국 정신 때문이었다.

1905년에는 "황성신문"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영국인 배설(裵說)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이 되었다. 그후 그는 정치,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서북학회장, 서북협성학교 교장, 황성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서우학회를 조직하면서 민중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당시의 항일정치운동은 일제가 정치결사를 탄압하기 때문에 부득이 학회, 신문, 학교, 청년회 등을 위장으로 내걸고 항쟁하였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에는 국내에서 더욱 정치 사회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시 최남선과 더불어 서울 광문회(光文會)에서 저술(역사유학)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 하에서 그대로 민족 운동을 잊은 채 칩거할 수 없었던 그는 서간도 환인현으로 망명하였다. 그곳은 고구려 환도성이 있던 곳이고 또한 발해의 서원 압록부의 고지이므로 첫 사업으로 민족 고대 발전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사서를 탐독, 연구함으로써 「동명성왕실기」, 「대동고대사론」,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개소문전(蓋蘇文傳)」,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생각은 서북간도를 비롯한 서북만주와 요동평야가 다 우리 민족의 고대 활동지였음을 증명함과 아울러 그곳에서 민족 문화를 처음으로 이룩했음을 밝혀 그곳을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지로 건설하려는 사려가 앞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3·1절 기념사에서 민족 조상의 내력을 알지 못하면 타민족에게 동화된다고 강조하고, 중국 하·은·주 3대에는 요동반도에도 우리 민족이 살았으나 그곳에 우리 조상이 그 내력을 잃은 까닭으로 우리 민족은 요동평야를 잃었을 뿐 아니라 적어도 1억이 될 인구가 2천만에 그치고 있음을 개탄하였다.

박은식은 서간도의 이 같은 사업을 한정 없이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가 쓴 책들을 윤세복(尹世復)과 더불어 간행한 후, 한족이 많이 이주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노령 연해주를 편력하고 곧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신규식(申圭植)·홍명희(洪命熹) 등과 더불어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총재에 추대되었다. 동제사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와 남북만주 및 연해주 등의 1백만 한족을 바탕으로 조직된 해외민족운동자들의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이 같은 활동을 하는 한편 1913년에는 상해로 가서 「안의사중근전」과 「한국통사」를 저술하여 민족 사학가로서의 한 경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또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민청년들의 교육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우리 민족의 독립은 시기문제만 남았을 뿐 확실한 사실이라고 확신하고, 1894년 갑신이래의 항일운동의 모든 사실을 모아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사를 기고하고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1919년 4월 23일에 소집된 국민대회의 「한성정부」에서 그를 평정관에 선임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에 임명하여 민족언론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 10월 15일 그는 국민교육의 연구장려와 유학생파견 및 지도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서 조직하여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대통령대리를 겸직하였으며, 1925년 3월에는 마침내 이승만대통령의 탄핵면직을 계기로 제2대 대통령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된 시기는 임정이 안팎으로 곤경을 겪던 시련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3·1독립운동 당시 고조되었던 국내외 독립운동이 시일의 경과와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표면 활동이 위축되어 가고 있었고 다른 한편, 1919년 러시아의 적화혁명이래 대두한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독립운동선상에 스며 들어와 독립운동을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욕을 떠나 먼저 임정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책임 지도체제를 국무령 중심체제로 헌법을 고쳐 공포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개헌이었다.

그는 일련의 독립운동과정에서 민족운동자의 결속을 주장하였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의 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그가 임종 때 동포에게 보내는 유언에서까지 남기고 있다.

遺 囑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 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吾族)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간에는 애증친소(愛憎親疏)의 구별이 없어야 된다.

우리가 이 귀중한 독립운동을 기성 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첫째 전민족의 통일을 요구하여야 되겠오.

一. 전족통일(全族統一)이라 함은 말로 주장하기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물론 극란한 일이오, 그러나 제일 먼저 주의할 것은 적어도 우리 광복사업에 헌신하려고 자처한 건전분자들은 지중(至重)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세운 이상에는 환경의 어떠함을 물문(勿問)하고 다 한데 뭉쳐야 되겠오. 물론 어떤 나라에나 각 당파의 분별이 없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일을 보는 민족들은 사당 혹은 붕당을 짓지 않음이 사실이니 여하튼 우리도 이 점에 크게 주의하여 장래 국가대업에 악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되겠오.

二. 독립운동은 우리의 제일 중대한 사업인 즉, 이를 기성코자함에는 하등의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못하게 됨이 사실이오. 바로 말하자면 즉 우리 민족의 체면이나 장래의 행복을 방해할 만한 위험성을 가진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광복사업에 대하여 일호라도 이익 있게 보이는 일은 다 실행하도록 주의하여야만 되겠오.

이같이 말함은 다른 뜻이 아니라 즉 우리가 장래 우리 민족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지 제일 먼저 기초되는 독립국가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오.

三. 독립운동의 성패는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문제이니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일에 성공코자 하면 우리가 통일적 행동을 하여야 되겠으며 단결되어 일하려면 독립운동이라 하는 전민족을 살리려는 대사업에 목표를 두고 이 일을 진행함에 사개인(私個人) 사이에 교분 혹은 감정관계의 어떠함을 일체 돌아보지 말아야 되겠오.

나의 말한 몇 가지 일이 실행키에 어렵지 않음은 아니나 하려면 아니 될 것은 없고 잘 될 터이오.

이는 다른 말 아니라 우리가 금일까지 무엇이 아니되니 무엇이 어찌하여 아니되니 함은 통(統)히 우리가 일을 할 때에 성의를 다하지 못한 까닭이오. 아니 될 수야 어찌 있소.

대한민국 7년 11월 1일

필기 안공근(筆記 安恭根)

독립신문 189호 1925년 11월 11일.

그는 1925년 8월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새로운 국무령을 선임,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물러났다. 잠시 노후를 요양케 되었으나 그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해 11월 1일 오후 8시 노환으로 그가 확신하던 광복일을 보지 못하고 상해 한 병원에서 작고했다. 임정에서는 그의 국가, 민족에 끼친 공훈을 추도하여 처음으로 국장을 거행, 상해 정안사로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1993년 유해봉환, 서울현충원 안장) 국내는 물론 중국, 남경, 일본 동경 등지에서까지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또 하나의 업적은 위에 본 바와 같은 많은 저서 중에서도 특히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남겨 우리 최근세사를 주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한국통사」의 내용은 모두 3편 1백 14장으로 되어 있으며 서술범위는 1864년 광무황제 즉위이래 1910년 경술국치 전후의 백오인사건까지를 취급하였다. 한말의 개화와 보수, 침략과 저항, 분열과 통합, 민중과 지배로 혼돈되어 변전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민족수난사를 그의 확고한 민족사관에 입각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말하고 싶은 주지는 우리 민족이 일시 이민족(異民族)의 강권지배 밑에 있으나 민중은 주체성이 강하고 민족주의의 각성을 통하여 반드시 강한 항일운동과 그 결과로 얻어질 독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919년 3·1독립운동 발발 직후에 쓰기 시작하여 1920년 말에 탈고를 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통사」를 잇는 민족항일항쟁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3·1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취급하였으나 모든 항일운동을 다 포함시키기 위하여 1884년의 갑신정변에서부터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항쟁을 총괄하였다. 평화사상가이기도 한 그의 상하2권의 총56장으로 된 이 「혈사」를 한국민족운동사의 기본원전이라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85·208·346·347·359·362·45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5면
  • 고등경찰요사 15·85·90·95·9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37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43면
  • 기려수필 257·258·265·266면
  • 박은식전서 하권 28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7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20·88·108·139·146·160·416·430·431·443·448·462·477·479·593·80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3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3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6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57·333·43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80·21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94·734·770·8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41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35·621·654·786·821·829·8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86·7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396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17·277·294·325·343·363·491·516·529·535·541·548·6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3·106·109·139·241·242·300·405·514·5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3·315·372·408·471·751·756·781·782·783·784·786·788·864·927·942·943·947·948·952·953·959·962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1·45·59·97·129·170·192·193·197·198·2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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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은식 자 : 성칠(聖七), 호 : 겸곡(謙谷), 백암(白巖), 필명 : 박기정(朴箕貞),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백산포민(白山浦民) 황해 황주 -
본문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남면(南面)에서 농촌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백암(白巖)이다. 필명으로는 박기정(朴箕貞),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 창해노방실(滄海老紡室), 백산포민(白山浦民)을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과 정통파 주자학(朱子學)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17세 때에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집을 나서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친) 등 황해도 일대 청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 때 황해도에서는 박은식과 안태훈을 가리켜 ‘두 신동이 나왔다’고 떠들썩하였다. 1880년에 경기도 광주(廣州)에 살고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다산이 저술한 정법(政法) 관계의 학문을 섭렵하였다. 이 때 정약용의 저작을 섭렵한 것은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82년에 상경하여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목도하였고, 시무책(時務策)을 정부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평북 태천(泰川)에 사는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에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로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특선으로 뽑혔다. 그 후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陵參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무렵 주자학이 경지에 도달하여 서북지방은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유학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40세(1898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을 갖기 시작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유근(柳瑾),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자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후인 1900년(42세)부터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04년 7월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과 양기탁(梁起鐸) 등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국권을 침탈하고, 이를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을 실은 황성신문이 정간되었다가 1906년 2월에 복간 되었는데, 1910년 8월 국권 피탈 시까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한 이 시기 신문 ・ 잡지들에 많은 논설을 써서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사상 ・ 실업구국사상 ・ 사회관습개혁사상 ・ 애국사상 ・ 대동사상 등을 설파하고 국민을 계몽하였다. 이 시기 그의 사상의 특징으로는 애국계몽운동과 무장운동(의병운동)을 연계하여 함께 전진시킬[연무제진(聯武齊進)] 것을 강조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때 강조한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의 핵심은 자강(自强)론에 의거한 교육구국과 실업구국에 있었다. 한국민족과 국가가 생존경쟁에서 승(勝)자가 되려면 강(强)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강자는 다른 강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이어야 한다. 20세기 초에는 우승열패(優勝劣敗)와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공례로 하는 강권주의(强權主義) 시대여서, 강국이 곧 약자를 병탄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경쟁에서 민족성쇠와 국가존망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의 명매(明昧)와 ‘세력’의 강약으로, ‘지식’과 ‘세력’이 우승한 자는 생존할 수 있고, ‘지식’과 ‘세력’이 열악한 자는 ‘자연도태’되어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된다. 민족경쟁에서 우승할 수 있는 ‘지식’은 ‘교육’으로 개발하고, ‘세력’은 ‘실업’으로 증진하는 것이다. ‘교육’과 ‘실업’은 양자가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먼저 두어야 할 것은 ‘교육’이다. 왜냐하면 ‘세력’증진을 위한 ‘실업’도 ‘지혜’에서 나오고, ‘지혜’는 궁극적으로 ‘학문’에서 나오는데, ‘학문’은 ‘교육’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요지였다. 당시 동양의 학문은 철학과 윤리학만 서양에 뒤지지 않고, 사회과학 ・ 자연과학 ・ 과학기술은 서양에 뒤졌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구학문’만 고집하지 말고 ‘신학문’을 신속히 도입 학습해야 하고, 이를 위해 신식학교를 사립으로 신설하여 ‘신학문’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하여 국권을 빼앗겼지만, 모든 국민들이 분발하여 자녀들을 ‘신학문’과 ‘대한정신’ ・ 애국심을 배양하기 위한 ‘국학’으로 교육해 놓으면, 이들이 성장하여 강력한 민력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반드시 국권을 회복하여 대한의 독립을 공고히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신교육 구국론의 영향으로 각 지방에 신교육학회가 창립되고, 사립학교 설립과 신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06년 3월에 창립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였고, 10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 창립을 주도하였고, 기관지 『서우(西友)』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에 진력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창립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통합한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되자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이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였는데 교장으로 추천된 이종호(李鍾浩)가 독립군기지 창설을 목적으로 망명하게 되자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서북학회 활동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63개 지교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확산시켰다. 이 무렵 일제가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공작을 전개하자 이에 대항하여 1909년 9월 장지연(張志淵), 이범규(李範圭), 원영의(元泳儀),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하여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동원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논문이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서북학회월보 제1권 제10호, 1909)이고, 저서로는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를 꼽는다.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되면서 『황성신문』,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언론기관이 폐쇄되었다. 한편, 직접 저술한 모든 서적들은 ‘금서(禁書)’로 압수되고 탄압 당하였다. 일제의 무단탄압에 의하여 한국민족의 ‘국혼(國魂)’이 깃들여 있는 역사책들이 소각됨으로써, 자기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또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國魂)이 불멸이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없어지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1911년 4월 국외 망명을 결행하여, 만주 환인현(桓仁縣)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기거하며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단조사고(檀祖事攷)』,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의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12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하여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1913년에 홍콩(香港)으로 가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으로 활동하며, 캉유웨이(康有爲) ・ 량치차오(梁啓超) ・ 탕샤오이(唐紹儀) ・ 징메이주(景梅九) 등의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정(專政)을 비판하다가 폐간 당하였다. 1914년 다시 상해로 와서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였고, 1915년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해 온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하였다. 『한국통사』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①일반사 ②일제침략사 ③독립운동사의 3면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처음 체계화한 역사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국혼’(國魂)이 담겨져 있는 한국 근대역사를 서술하여, 한편으로 일제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통렬히 폭로 규탄하고, 한편으로는 한국민족의 아픈 역사를 써서 불굴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한국통사』는 한국근대사의 첫 번째 고전이 된 책이었다. 한국근대사를 ‘국혼’이 담겨져 있으면서도 ‘아픈 역사’인 통사(痛史)로 쓴 이유는 한국 청년들과 한국인들을 독립운동 투사로 양성하는 데에는 침략당한 ‘아픔’(痛)을 가르쳐주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일본은 우리 민족을 선생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우대하며 배워갔는데, 오늘날에는 일본이 우리 민족을 노예로 대우하니, 이것은 바다가 끓고 산이 무너져도 더 클 수 없는 ‘아픔’(痛)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부끄러움’(恥)과 ‘아픔’(痛)을 씻는 방법으로는 그 ‘부끄러움’(恥)과 ‘아픔’(痛)을 알게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이 ‘부끄러움’(恥)과 ‘아픔’(痛)을 알면 그것을 씻기 위하여 ‘지통심’(知痛心)이 ‘구국주의’(救國主義)의 원동력으로 전환되며,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공급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일제 침략과 침탈의 사실을 그대로 가르쳐줌으로서 ‘지통심’(知痛心)과 ‘지치심’(知恥心)을 격발하여, ‘통’(痛)을 없애고 ‘치’(恥)를 씻기 위한 구국주의 독립정신을 결정(結晶)하고 격발시킴으로써, 『한국통사』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했음을 밝혔다. 『한국통사(韓國痛史)』의 내용은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정책의 간교성과 잔학성을 전세계에 폭로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온 국민과 청년들에게 민족적 통분을 격발시켜 독립운동에 분기하도록 고취하며, ③ 자손만대에 다시는 이러한 실패가 없도록 반성과 성찰을 촉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통사』는 하와이에서 한글로도 번역되었고, 중국 ・ 노령 ・ 미주의 한국인 동포사회와 국내에 비밀리에 보급되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조직하고 『조선사(朝鮮史)』 37책을 편찬하여 한국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 “조선인 망명자 박은식의 『한국통사』처럼 독립사상 고취의 ‘해독’에 대항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음은 『한국통사』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려준다. 또 이 무렵 상하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한 다음 이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과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후 신규식 등과 대동보국단(大東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에 추대되었다. 1918년 노령 한인 동포들의 간청에 응하여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에 취임하였다. 신문이 재정 사정으로 발행이 중단된 뒤에는 한인촌의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한국역사에 대한 강연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1919년 노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 ・ 1운동을 맞이한 후 6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 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하여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의 통합과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 ・ 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한국근대사 분야의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업적을 쌓았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 ・ 1운동의 특징으로 ① ‘맨손(徒手)혁명’운동인데, 맨손(비폭력)으로 강대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타격을 가한 세계혁명사에 신기원(新紀元)을 이룩한 운동이다. ② 신분계급 ・ 종파 ・ 남녀노소를 초월한 전민족 거족적 운동이다. ③ 도시 ・ 농촌 ・ 방방곡곡의 전국적 운동이다. ④ 갑신정변 ・ 동학농민혁명운동 ・ 독립협회운동 ・ 만민공동회운동 ・ 의병운동 ・ 애국당운동(애국계몽운동) 등 전통의 축적이 폭발한 독립운동으로, 누구도 꺼지게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이다. ⑤ 비폭력 3 ・ 1운동을 일제는 총검으로 야만적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하려고 획책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황혼을 가져온 운동이다. ⑥ 한국민족이 자력으로 한국독립을 보장한 운동이라고 지적하였다. 안으로는 3 ・ 1운동에 의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역량이 비약적으로 대폭 강화되었으며, 밖으로는 전세계가 한국민족의 독립할 능력과 자격을 인정하고 성원하였으니, 이제 한국독립은 3 ・ 1운동에 의해 보장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 ・ 1운동의 결과로써 우리 생애에 독립을 볼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일제의 교란과 탄압에도 굴복하지 말고,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자고 호소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실패 후 임시정부가 약화되고 독립운동계가 혼란과 분열에 빠지자, 사태를 수습하고 1924년 독립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 6월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에서 『이승만 대통령 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되었다. 1925년 3월 21일 의정원은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臨時大統領李承晩彈劾案)』을 통과시키고, 3월 24일 의정원은 박은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임시정부의 혼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바꾸자는 요지였다. 이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전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 선출케 한 다음,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때 인후증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하였는데, 임종이 가까워 오자 안공근(安恭根, 안중근의 둘째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촉(遺囑)을 받아쓰게 하였다. """"나의 병세가 심상치 않게 감각되오. 만일 내가 살아난다면 다행이어니와 그렇지 못하면 우리 동포에게 나의 몇 마디 말을 전하여 주오. 첫째, 독립운동을 하려면 전족적(全族的)으로 통일(統一)이 되어야 하고, 둘째, 독립운동을 최고운동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어떠한 수단 방략이라도 쓸 수 있는 것이고, 셋째, 독립운동은 오족 전체에 관한 공공사업이니 운동 동지 간에는 애증친소의 별(別)이 없어야 됩니다. """"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동포들에게 독립 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하여 통일 ・ 단결할 것을 당부하는 위의 유촉을 남기고 장엄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겸곡문서(謙谷文稿)』(1901),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 『고등한문독본(高等漢文讀本)』(1910),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1911),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1911),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1911),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1911),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1911),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1911), 『단조사고(檀祖事攷)』(1911), 『안중근전(安重根傳)』(1914), 『한국통사(韓國痛史)』(1915), 『이순신전(李舜臣傳)』(1915), 『발해사(渤海史)』(1918), 『금사(金史)』(1918), 『이준전(李儁傳)』(1918), 『성세소설 영웅루(醒世小說英雄淚)』(1910년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위대한 애국계몽사상가, 불굴의 헌신적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서 한국민족의 해방과 독립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대학자로서 고전이 된 다수의 저서와 논설을 남겼다. 그는 독립운동전선의 맨 앞에서 ‘국혼’이 담긴 역사의 횃불을 들고 가르치면서 한국민족의 광복과 최후의 승리를 격려하고 지도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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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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