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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781
성명
한자 趙光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미주방면 포상년도 1999 훈격 애족장
1923년 도미(渡美)하여 하와이 성공회(聖公會) 신부(神父)로서 한국인 2세들에게 국어(國語)교육(敎育)시키는 한편 성공회(聖公會)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모집하였고 스스로도 광복시까지 지속적으로 독립금을 납부하였으며, 1944. 9월에 미해병대 종군 목사로 싸이판 전투에 참전하여 징용(徵用) 한국인(韓國人) 구출(救出)대일(對日)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하와이총지부 위원을 역임하는 등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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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성공회 신부로 독립자금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하와이 지부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하와이로 건너간 조광원은 성공회(聖公會) 신부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인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다. 또한 성공회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 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는 애국단의 후신이다. 애국단이 중국지역의 광복전선통일운동에 참가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한데 따라 하와이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는 하와이 한국독립당지부를 이끌어 가며, 중국지역의 특무공작과 한국광복군 편성 등에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경, 그는 미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하여 사이판 전투에 참전하였다. 사이판에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江華人物史(江華文化院) 493·494面
  • 寫眞(1928. 3. 25, 한인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75面
  • 新韓民報(1930. 3. 13, 1931. 10. 1)
  • 國民報(1937. 5. 19, 12. 22, 1944. 6. 14, 8. 23, 9. 27, 1945. 11. 14))
  • 國民報(륙전대 죠신부, 1945. 5. 2, 5. 9, 5. 24, 6. 6)
  • 國民報(寄稿文, 1945. 7. 4)
  • 서울신문(1946. 4. 4)
  • 한국일보(1972. 10. 8)
  • 매일경제신문(李元淳 전경련 고문 회고담, 1988. 2. 17)
  • USMC記事(일자 미상)
  • 世紀를 넘어서(李元淳 自傳, 발행년도 미상) 182·251·252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8輯 641·642面
  • 태평양주보(1942. 3. 11, 4. 29, 6. 10, 9. 16, 11. 11, 1943. 5. 5, 8. 11, 9. 15, 1944. 3. 8, 1945. 1. 17, 3. 1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광원 조 노아(세례명) 경기 강화 사이판전투
본문
1897년 10월 21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조 노아이다. 강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7일 졸업하였다. 온수리에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어 유년기부터 신자가 되었고, 청년기에는 평신도 지도자가 되었다. 보통학교 2학년 때 강화 내성 남문 밖으로 이사를 하여 남문 안쪽에 살던 조봉암(曺奉岩)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4월 25일부터 서울 정동성당에서 열린 제3회 전도구연합회에서 ‘전도장려부’ 설치를 위한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트롤로프 주교의 명에 따라 미국 성공회 하와이 교구로 파송되었다. 공석이 된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본격적인 사제수업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1923년 11월 일본을 거쳐 12월 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미국 나쇼다 성공회신학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받는 동시에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6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宋鎭禹), 연희전문학감 유억겸(兪億兼), 교육가 김종철(金鍾喆) 등이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한길수(韓吉洙)와 함께 이들을 위한 특별연합예배를 주선하였다. 1926년 5월에는 일시 귀국하여 성공회 성당에 머물며 하와이의 상황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하와이 한인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여 개인도 저금에 힘쓰고 있으며, 이승만(李承晩)이 양로원을 만들고자 수만 원의 자금을 모집하였고, 박용만(朴容萬)이 경제 방면으로 활동하고자 한다는 등의 사실을 소개하였다. 1928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한국인 유지들에 의해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준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하와이교구장으로부터 정식으로 성직을 받았다. 8월에는 몇 해 동안 정간되었던 󰡔영코리안󰡕 복간을 위한 이사부 이사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한국어 교육에도 힘써 1929년 10월 성루가국어학교 교장으로 60여 명의 한인 학생에게 한국어 교육을 시켰다. 1930년 1월 13일 밤 유지 29명이 ‘민족주의에 기인하여 대한 독립운동을 촉진한다’고 표방하며, ‘임시정부로 힘을 모아주고 최후의 1인까지 분투한다’는 취지하에 한인의 정치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를 봉대하자는 취지로 조직한 하와이 한인협회 발기인의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번 사건이 조선민족의 장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10월 30일 하와이 교민단 명의로 미국 대통령 후버와 제네바 국제연맹회장에게 일제 침략에 항의하는 내용의 통고서를 보냈다. 이때 감리교 목사 자격으로, 교민단 총단장, 구제회장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 첩자를 색출하기 위한 한인자위단을 결성하는 한편, 독립자금의 모금에도 나섰다. 1944년 9월경에는 미국 해병대 종군신부로 사이판전투에 참전하여, 대일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인을 구출하는 데도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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